전출처 : Tomek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B-side Ourselves

   지난 금요일,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저자이신 강신주 선생님과의 만남을 위해 홍대 살롱 드 팩토리에 갔습니다. 직장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자리는 이미 만원이고 선생님 말씀은 벌써 시작되었더군요.  

   동녘 출판사 관계자분께서 주신 핸드 아웃을 들고 자리를 앉았습니다. 보통 '저자와의 대화'는 의례적인 강연과 독자들의 질문으로 진행되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굳어져 있는데, 선생님은 이런 '가벼운' 자리에서도 실제 강연을 하시는 것 같이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자리를 채운 독자층은 굉장히 다양해 보였습니다. 20대의 학생부터 50대의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시'와 '철학'을 한데 버무려 맛깔스런 주제를 뽑아내신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인지 다들 상기된 분위기였지요. 

 

   강연은 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시인의 시와 철학자의 사상을 다루었습니다. 문정희 시인의 「유방」이라는 시와 여성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이의 '차이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문정희 시인은 자신의 것이면서도 남편과 자식에게 예속되어 있는 신체기관인 유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내 것이로구나'라는 것을 느낀 것은 그녀가 유방암 검사를 받기 위해 차가운 엑스레이 기계앞에 상반신을 밀착하고 "찌그러진 유두"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차가운 기계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몸을 느낀 시인의 시는 그래서 굉장히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경험은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지만, 남성들 또한 그 느낌을 (여성들 만큼은 아니지만) 알 수 있습니다. 문정희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로 여성은 물론 남성들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수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선생님은 문정희 시인의 이런 일련의 작업을 이리가레이의 사상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철학도들에게 '빨간책'으로 불리우는 『서양철학사』를 한 번 찾아보세요. 거기에 여성 철학자가 얼마나 등재되어 있나. 한 명도 없습니다. 철학자 뿐 아니라, 정치가, 사업가, 종교인 등 역사에 남아있는 여성의 이름이 얼마나 있을까요? 여성의 지위는 확실히 남성에 비해 불평등합니다. 이 지위를 평등하게 맞추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지요. 

   

         

 

   그런데 이리가레이는 이 페미니즘 운동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페미니즘'이란 여성을 남성의 위치로 끌어 올리는 것이거든요. 그녀가 보기에 '페미니즘'이란 여성을 '남성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판단하는가 봅니다. 그녀가 생각하는 여권신장이란, 남성을 여성에 맞추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남성의 여성화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리가레이가 생각하기에 여성은 자신의 몸 안에서 타자를 끌어안는 존재입니다. 여성들은 '임신'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내 몸 안에 내가 아닌 다른 개체를 끌어 안는 경험을 합니다. 임신을 못하는 여성들이더라도 '생리'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몸 속에 존재하는 이물질과 같이 지내는 경험을 하지요. 다른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를 통해 여성들은 남성들의 폭력성과는 다른 모성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박애주의적인 경험을 남성들도 배우게 된다면 이 세상은 더 평화롭고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차이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감싸안는 문정희 시인과 이리가레이의 사상은 지금 찢어지고 분열된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인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독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강연은 이런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처음 책을 기획했을 때 이 내용을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뺐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내용은 선생님이 강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이 원고를 쓰는 방식은, 이번에 독자와의 만남에서처럼, 강연 내용을 작성해서 핸드 아웃을 돌리고, 강연을 하면서 피드백을 받고, 그 후에 다시 윤문을 해서 최종 원고를 탈고하는 방식이라는 군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이 책의 저자는 강신주 혼자가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한 시인들, 철학가들, 그리고 강연을 들은 많은 분들이 공저한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저자 강신주'와 그의 저작들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한 순간이었지요. 어쩌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재판에서는 이 글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시 30분에 시작한 강연은 10시 30분이 되어도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여러 대화가 있었지만,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이란 애초에 '불륜(不倫)'이라고 정의하셨지요.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못했던 순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철학은 해체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현상을 조각조각 해체하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나 현상을, 우리를 가리고 있는 '위선'이란 치양막을 확 들쳐냈기 때문에 그런 당혹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미화하는 존재"니까요. 선생님의 그런 공격적인 말씀은 우리가 미화하고 있는 그 치양막이 갑자기 벗겨졌을 때, 그 진실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에 대한 대답같았습니다. 우리가 불편하지만 진실을 마주해야하는 이유는, 갑자기 마주칠 수 있는 그렇게 홀딱 벗겨질 수 있는 순간에 대처하기 위해서니까요. 하지만 그 한 순간을 위해 힘들게 진실을 견디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래서 불가에서는 인생을 '苦'라 칭했나 봅니다.  

   후기를 읽어보니 선생님과의 대화는 새벽 3시까지 진행됐다고 합니다. 저도 계속 있고 싶었지만, 배고픔의 고통 앞에선 견딜 수가 없더군요. 10시 30분에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날 강연에서 배운 것은, 시나 철학이 아닌, '진실'에 마주쳐야 할 '용기'인 것 같습니다.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알라딘과 동녘 관계자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강신주 선생님께도요. ^.^; 

 

 

* 덧붙임: 

   강의 중에, "인간에게는 수 많은 자아가 있으며,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그 수많은 자아 중 가장 강력한 자아가 내 안의 여러 자아를 누르고 있는 결과"라고 하신 말씀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분열증을 앓아야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지요. 그런데 여러 예시를 보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2차세계대전만화』를 그리고 <시사IN>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는 굽시니스트가 '후기'에서 '자아'를 분리한 모습입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정말 재미있네요. 

   그리고 김연수 작가 또한 사회적 자아와 소설을 쓰는 자아가 있다고 얘기한 걸 보면 문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대신 강신주 선생님의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문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씀에 위안을 삼아야 할런지... ^.^; 

김혜리: 보통은 그냥 "작가로서 성숙했다"고 표현할 텐데 복잡하네요. 같은 사람이지만 소설을 쓰는 순간의 자신은 다른 존재라고 여기시나 봅니다. 

김연수: 왜 소설 쓰는 자아와 제 자아가 다르냐면 창작하는 과정에 단절이 있어요. 처음 사회적 자아로서 뭘 쓰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먼저 스토리를 만드는데 쓰레기 같은 것들이 나와요. 평소의 내가 얼마나 후진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마감을 앞두고 잠도 안 자고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고쳐 쓰다 뻗어버리는데, 내 자만심도, 습득한 지식도 다 부정하고 아무것도 없이 깡그리 벗겨진 그 상태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예요. 그러니 평상시의 저와는 다른 존재가 썼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대표적인 예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에요. 그 작품을 끝내는 순간에는 "이것은 소설임에 틀림없다"는 환희가 들었어요. 독자들도 제 에세이와 소설이 다르다는 걸 알아요. 에세이와 평소의 저를 좋아하지만 소설은 어려워하는 분도 있어요. 저 역시 독자들을 만나 소설을 설명할 때면 이미 평소의 자아로 돌아가 있기 때문에 남이 쓴 작품을 말하듯 어색해요. 문예지에 연재할 때는, 첫회가 제일 쉬워요. 마감하고 한달 놀고 한달 자료 찾고 마지막 달에 2회분을 쓰려고 첫회를 읽어보면 너무 잘 썼어요. 도저히 이렇게 쓸 수가 없고 남이 써줬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겠다 싶어요. 그렇게 비참해하다가 간신히 쓰죠. 그리고 3회에 가면 또 가까스로 썼다고 여긴 2회분이 훌륭해 보여요. 그 상황이 반복되는 거죠. (웃음) 

[김혜리가 만난 사람] 소설가 김연수 중에서, 『씨네21』No.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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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10-03-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방면에 관심도 많으시고 깊이도 있으시네요. 종종 님의 블러그에 오면 놀랄 뿐입니다. ^^

Tomek 2010-03-16 17:05   좋아요 0 | URL
아이고... 깊이는 커녕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도 많은걸요... 그저 이런 저런 글쓰기는 제게 있어서 '치유'의 과정일 뿐이예요.
고맙습니다. ^.^;

2010-03-18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