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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 본즈 - The Lovely Bones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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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사랑스러운(lovely) 아이의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선물로 받은 사진기로 자신의 모습을 찍는 14살 소녀의 천진난만함. 행복한 가정. 태어나서 처음 느끼기 시작하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장면의 연속에서, 소녀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 이름은 수지 새먼. 1976년 12월 6일. 나는 살해당했다."
영화는 <베리 린든>처럼 아이의 죽음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준다. '비극'이라는 드라마를 강조하지 않고, '운명'을 이야기한다. <러블리 본즈>는 수많은 '유아살해 영화(아, 정말 끔찍한 목록이다)'들과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것이 영화에 독(毒)이 될지 득(得)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낌은, 안 읽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에 만족했었다. 그러나 같이 영화를 본 아내를 비롯한 다수의 관객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 불평한 것이 아니라, 그 정서에 대해 불평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피터 잭슨의 실패작이 아니다. 단지 그가 만든 '유쾌하지 않은' 웰 메이드 영화다.
첫 사랑이 시작되려는 14살의 수지 새먼(시얼새 로넌)은 그의 이웃 조지 하비(스탠리 투치)에게 강간당하고 무참히 살해당한다. 그의 가족은 깊은 슬픔에 빠져 지내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수지는 천국과 이승의 중간 세계에서 (In Between) 머물며 가족들을 바라보고, 그 세계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며 지낸다. 수지가 죽은지 1년이 다 되어갔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어머니(레이첼 와이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마크 왈버그)와 동생(로즈 맥키비)은 홀로 사는 이웃 하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는 수지가 머물고 있는 중간 세계, 다른 하나는 가족들과 살인자가 살고 있는 이승이다. 아마도 소설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로 진행하지 않았을까? 유령이 현실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햄릿』에서처럼, 잠깐 비추는 정도일 뿐이니까. 이승에서는 혈육의 '부재'를 극복하고 위기를 봉합하는 가족의 모습이 보여지고, 중간 세계에서는 수지의 행복한 환상이 보여진다. 피터 잭슨은 이 이질적인 두 세계를 거의 동일하게 나누어 보여준다.
중간 세계에서의 환상은 그의 전작 <천상의 피조물들>이 생각날 정도로 탄성이 나오는 아찔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만큼의 감흥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천상의 피조물들>에서 환상이 현실 세계를 사는 소녀들이 꾼 꿈이었다면, <러블리 본즈>의 환상은 현실 세계에 없는, 유령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환상장면이 불필요하거나,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난 그 장면이 그만큼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설레임을 느끼는 소녀에게, (가족말고) 생애 첫 키스를 기대할 수 있었던 첫 데이트를 앞에 두고, 무참히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아이에게, 그 정도의 위로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수지의 환상 장면은 내게 있어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감탄을 불러 일으키면서도, 그 상황을 생각하며 탄식하게 만드는. 어쩌면 이 영화는 수지를 위한 피터 잭슨의 진혼곡이 아니었을까.
그에 반해 현실 장면은 굉장히 삐끄덕 거린다. 너무나도 쿨한 할머니(수잔 새런든)와 죽은 딸의 방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기어이 떠나는 엄마, 집안일은 뒤로한 채 범인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아빠. 이들의 위기와 갈등은 (마침내) 살인범의 증거물을 찾아낸 동생이 집에 들어오기 직전에 봉합된다. 폭행에 깁스를 한 아버지와 다시 돌아온 엄마, 그들의 화해와 포옹으로 동생은 증거물을 (잠시) 내려 놓는다. 그렇게 산 가족들은 죽은 딸을 떠나보내고(혹은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 장면에서 스필버그(제작자로 참여)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마도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이 영화의 '결말부'일 것이다. 확실하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화해를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망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것도 아닌, '어설픈 권선징악'은 동양 문화권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확실히 '불쾌하게' 생각할 듯 하다. 영화로만 따진다면, 어떤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런 '어정쩡한' 결말이 이 영화에 맞다고 생각한다. 확실하게(아니 시원하게) 복수했다면, 가족들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어떤 부채의식도 가지지 않고, "그래도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곧 무참히 살해된 수지를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수지가 우리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 "모두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그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스런 시체(the lovely bones)는 떠날 때에도 눈물을 짓게 만든다. 이 슬픔이, 이 느낌이 보편적인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덧붙임
1. 위에 언급한 the lovely bones는 '사랑스런 시체'란 뜻이 아니고, '갑작스런 시련을 통해 점점 커지는 유대감'을 뜻한다고 합니다. 위키를 찾아보니 소설 후반부에 수지가 얘기하는 것에서 따왔다고 하더군요. 물론 영화에서도 언급됩니다.
"These were the lovely bones that had grown around my absence: the connections - sometimes tenuous, sometimes made at great cost, but often magnificent - that happened after I was gone."
2. 살인자 하비와 수지의 동생이 벌이는 서스펜스 장면은 사람을 옥죄게 하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주먹을 꼭 쥐고 "아, 쫌!!" 이라고 외쳐본 적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3. 브라이언 이노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