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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인문학 서적은 어떤 면에서 보면, 오타쿠들의 세계와 비슷하다. 한 권의 책, 아니 한 편의 글을 읽기 위해 주렁주렁 달려있는 주석을 찾아보며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인내심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밀리터리 오타쿠와 일본 대중문화 오타쿠, 그 둘을 충족시켜야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는' 굽본좌의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이진경 씨(이진경은 필명이고 박태호가 본명이다. 직함을 붙이려면 본명에 붙여야하기에 감히 '씨'를 붙였다)와 굽본자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이 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긴. 그의 저서가 어디 쉬운 게 있었던가. 그나마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진경의 필로시네마』조차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면 거의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책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이 어렵더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각각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취합되어 역사(history)가 되는지, 수 많은 역사들 속에서 어떻게 통합적인 역사(History)가 만들어지는지, 저자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설명한다. 지금은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이라 생각하는 '맑스주의'를 통해 역사와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롭고, 주류의 역사가 아닌, 소수자, 타자의 시선으로 전복된 역사의 실례와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라는 큰 틀을 이용해 진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을사조약으로 강제적으로 맞이한 근대와 '근대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2000년대를 반추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역사를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실들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난삽하지는 않다. 각 편의 글은 설정해놓은 주제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주석들은 그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
책을 읽으면, 2008년에 있었던 '근현대사 교과서 사건'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왜 그들이 역사를 그렇게 그들 방향으로 돌려놓고 싶어하는지. 잉여생산물이 도래하고 난 이래로 부르주아지들의 기득권은 바로 그 '잉여생산물'이었으나, 어느순간부터 '시간'을 통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계급들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생산물의 양은 물론이고, 그들의 삶조차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런 주류계급들은 그들 중심의 언어와 그들 중심의 역사로 재편하기를 원한다. 통제된 시간과 재편된 역사속에서 (표준어라 불리는) 통일된 언어를 배움으로해서 모두들 그 주류에 포함되어 있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
세상과 역사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있으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인문학 서적은 『공산당 선언』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 것 같다. 행동강령이 쓰여있지 않지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을 개념화하지만, 도구화하지는 않는다. 읽고 직접 느끼고 행동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