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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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책을 읽은지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떨린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혀지고 아득해질줄 알았는데, 점점 더 선명해지는 기억처럼, 긴장이 풀어진 감정들이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 중 하나는, 그의 소설은 왠지 서양의 '번역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점이다. 서양, 특히 영미쪽의 원작을 번역한 작품들은 우리말로 쓰여있어도 왠지모르게 '아득한' 느낌이 난다. 그 소설들이 비록 동시대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문화적인 차이 때문이겠지. 

   그런데 김연수의 소설에서도 왠지모를 그런 '아득함'이 느껴졌다. 처음엔 그의 소설에 유난히 외국인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으나(「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지금은 '외로움'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가 엮은 소설에서는 유난히 외로움을 겪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 외로움은 애인이나 가족을 잃은 외로움이기도 하고, 자신이 속해있던 세계의 붕괴로 인한 막막함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 상처입은 인물들끼리 외로움과 막막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라는 것은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어"라는 식의 무책임한 말이 아닌, 상대방의 상황에 들어가는 것이다. 케이케이의 고향 밤메에 가 보는 것(「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가 묻혀있는 '세계의 끝'에 가보는 것(「세계의 끝 여자친구」), 용산의 불길을 찍은 카메라가 달려있는 헤어진 애인의 택시에 타 보는 것(「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서로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것(「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사진에 찍힌 구름을 보러 일본에 가는 것(「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한 사람의 똑같은 이야기를 매달 쓰는 것(「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아버지가 비명횡사한 그곳을 찾아가고 그 행위를 귀로 듣는 것(「달로 간 코미디언」) 모두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김연수는 "난 널 이해할 수 있어."라는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글을 길게 이야기로 풀어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김연수가 소설에서 서술한 것처럼 힘들고 지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 '경험'한다면 소설 속 그들이 느낄 수 있었던 먹먹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과문한 탓에, 이런 어려운 말들이 김연수를 설명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의 소설을 통해, 소설이란, 문학이란, 삶에 있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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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10-02-15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먹한 감동' 가장 효과적으로 김연수 작품을 표현한 것 같네요.

Tomek 2010-02-16 09:12   좋아요 0 | URL
novio님 리뷰가 더 적합하죠. 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낑낑거리며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