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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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우는 글쓰기
로제마리 마이어 델 올리보 지음, 박여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매주 토요일 오후, 알렌 릭맨의 긍정 버전같은 팀 알렌이 주연한 가족 시트콤 <아빠 뭐하세요(Home Improvement)>를 낄낄거리며 본방사수를 하던, 어느날. 실수로 리모콘을 깔고 앉아 7번에서 13번으로 화면이 움직였던 그 때, 빈 화폭 앞에 얌전히 앉은, 한 화가를 만났던 것은.
혹시 보스턴(Boston)의 타미 아저씨가 아닌가 싶을정도로 과한 아프로 헤어스타일에 앙상한 손을 가진 그 화가는 스케치도 하지 않고, 붓으로 물감을 찍어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엔 장난같은 붓질이 점차 덧칠이 되어가면서 그림의 형상을 띄어가는 모습은 경이를 넘어 경악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어떻게 붓질 몇 번 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지?" 하지만 더 경악했던 것은 그림을 완성해가는 화가의 말이었다. "어때요, 참 쉽죠? 아주 쉬워요."
Bob Ross
그렇다. 난 밥 로스(Bob Ross)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양으로 그림을 가르치던 그는, TV에 나와 그림이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지를 '직접 몸으로' 가르쳐줬다. 실제로 그가 가르쳐준 그림은 정말 쉬웠다. 물감과 붓만으로도 멋진 그림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따라해 본 사람은 알 거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웠었는지.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를 읽고나서, 밥 로스가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책의 저자인 로제마리 마이어 델 올리브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쓰기란 행위가 반복된 삶에서 피폐해지는 영혼을 어떻게 치유하는지, 지리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꽃피우게 하는지, 잠든 나 자신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등에 대한 글쓰기 예찬을 편다. 그리고 여러가지 글쓰기에 대한 실례를 들어본다. 참 쉽다. 책을 읽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신문사에 보내 고료를 받을 수 있거나, 블로그에 올려 핫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데... 글쓰기가 정말 쉬운가?
정훈이 만화 <씨네21>
이 책은 (아쉽지만) 글쓰기의 비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글쓰기에 비법이 어디있겠는가? 이 책은, 기왕에 글을 쓰려면 작가처럼 멋진 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래서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9회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을 맞이한 타자에게, 똥 쌀것 같은 표정 짓지 말고, 그냥 맘 가는대로 편하게, 힘껏 배트를 휘두르라는 조언을 건네는 책이다. 글쓰기, 별 거 아냐. 홈런은 이승엽이나 김태균이 치면 되지. 우린 그냥 배트를 휘두르자고. 게임은 매번 있으니까.
헤밍웨이가 얘기했던가. 사람들은 일기를 쓸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말. 글쓰기는 욕망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알리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이다. 사회 안에서 톱니처럼 맞물려가며 개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다(돈이 있으면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다 읽었으면, 이제 할 일은 노트를 피거나, 컴퓨터를 키는 일이다. 내가 쓴 글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일단은 나를 바라보자. 내 욕망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하나씩, 하나씩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나와 내가 글로 대화를 하다보면, 이 책대로 글쓰기에 대한 사랑이 피어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나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다. 이 책은 '글쓰기'란 소재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배트를 힘껏 휘둘러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번 기회에 스코어는 잠시 잊어버리고, 배트를 한 번 휘둘러 보는 것이 어떨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