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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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러브 - 사랑스런 로맨스
신연식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근데 사실 세계의 어떤 작품이건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영화가 허술해 보여요. 왜냐하면 활자는 디테일을 꼼꼼히 담아낼 수 있는데, 영화는 뭉텅뭉텅 이미지로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거꾸로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면 굉장히 지루해요. 이미지를 보며 감정을 이미 느꼈는데 활자로 일일이 그걸 묘사하고 있으니까 뻔해 보이는 거죠. 장르별 특색이라고 봐야죠."
-공지영,「송해성, 공지영의 대담」 중에서, 『씨네21』 571호 -
"참 신기해요. 영화가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영화는 힘들게 촬영한 장면을 버려가면서 완성을 하잖아요? 그에 반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에 계속 덧붙이기를 하는 데 말이에요."
-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DVD 오디오 코멘터리 중에서 -
이 책을 독립적인 작품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영화의 연장선으로 봐야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공지영 작가가 지적한 대로, 이미 영화로 본 내용을, 그래서 화려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진 그 감정을 다시 빈곤한 활자로 복습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을 구입한 것은, 워낙 영화가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진주 귀고리 소녀』를 쓴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저 말 때문이었다. 분명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다. 제아무리 공들이고 돈을 들여 찍은 장면이라 하더라도, 영화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버려진다. 영화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 운동성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신연식 감독의 원래 이야기가 어땠는지가.
소설과 영화의 이야기에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소설의 특징이라면 역시 디테일에 있지 않은가. 소설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형만과 형만의 친구들(기혁, 윤사장, 강목사) 그리고 형만과 본의 아니게 스쳐간 여인들(종희, 영희)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형만이 왜 기혁에게 큰 돈을 빌려주었는지, 남은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영화에서 설명하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부분이 고스란히 서술되어 있다. 정보나 인물의 이해 면에선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남은에 대한 설명은 빠져있다. 소설 역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이야기라,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쉽기는 하다.
소설에서 작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형만, 윤사장, 강목사 이들 셋의 조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형만의 조카인 재영은 시도때도 없이 자신의 사랑 문제로 삼촌을 괴롭히고, 윤사장의 부탁으로 형만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조카 재형은 주는 것 없이 밉고, 강목사의 조카인 의사는 깐족대면서 형만에게 사무적으로 형만의 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굉장히 낄낄거리면 읽었었다. 영화에선 설명할 수록 지리해지고 별 의미도 없는 부분이지만(그래서 설명이 안되었겠지만), 소설에서는 이런 작은 묘사가 잔잔한 재미를 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신연식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전 자신의 머리속에서 나온 원형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묘사한 인물들과 영화에서 연기한 인물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배우들이 해석을 한 결과물들이다. 영화에서는 안성기 씨를 떨어뜨려 놓고선 형만을 생각할 수 없다. 남은 또한 마찬가지로 이하나 씨를 제한다면 생각할 수 없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신연식 감독이 만들어낸 인물들을 그들 배우들의 해석이 들어간 결과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는 이들 배우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나는 나만의 <페어러브>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게 활자의 장점이 아닌가.
영화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50여년을 외롭게 사랑 없이, 사랑 않고 살아온, 자기만의 세계 안에 침잠해 있는 인물이 갑자기 찾아온 사랑 때문에 어쩔줄 몰라하고 좌충우돌 벌이는 작은 소동은, 정작 본인은 괴롭겠지만, 읽는이는 재미있다.
결국 형만은 카메라를 들었을까? 그래서 남은이의 눈과 같은 노란 노을을 찍을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