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저씨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난 니 아버지 친구야!" "할 말 없으면 아빠 친구라 그러고! 아빠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속마음을 들킨 건가... 당황스러웠다. "나... 니 아버지 좋아했어!" "거짓말!" "얘가 진짜......" "아저씬 아저씨 다칠까 봐 맨날 거짓말하잖아요? 내 마음도 알고 아저씨 마음도 알면서! 아저씬 아저씨 말이 다 맞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사람이 무슨 카메라 부품 같은 줄 아세요? 관계만 알면 고칠 수 있게!" "너, 이녀석! 아저씨 화낸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나머지 한껏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질러 보니 노인네들이 왜 가끔 그런 식으로 성질을 부리는지 알 것 같았다.-134쪽
남은이가 손을 뻗어 아직도 젖어 있는 내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나는 얌전히 받아들였다. 남은이의 손끝이 눈가의 주름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주름을 펴보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난 그냥 좋아요. 아저씨가." 남은이는 내 눈가의 주름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그보다 더 천천히 말했다. 달빛이 들어와 남은이의 뺨에 맺혔다. 두부처럼 연하고 투명한 뺨이 잘못 다루면 으깨져 버릴 것 같이 움직였다. 그래서, 나도 남은이처럼 손을 내밀어 남은이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그런 거 잘 몰라." "세상일을 다 알고 해야 되는 거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죠." 나는 겁이 났다, 솔직히. "겪어 보면 다를 거야. 사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냐."-149쪽
"내가 오십 년 넘게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살았거든. 근데 세상엔 진짜 나쁜 놈들 많아. 사기 치고. 돈 떼먹고. 꼭 니 아빠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무슨 말씀이세요?"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싫고, 남이 나한테 그러는 것도 싫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게 뭐가 문제냐는 거지.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피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얘기 무슨 얘긴지 알겠니?" "그게 지금 프러포즈 하는 거예요?" 남은이의 목소리도 눈동자도 떨렸다. "왜? 그래도 이 얘기 하려고 이십 년 만에 백 미터 이상 달린 건데?" 남은이는 환하게 웃었다. 목도리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는데도 환하게 웃는 게 보였다. 그래서 나도 환하게 웃었다. 남은이는 환하게 웃다가 손을 뻗어 땀에 젖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수십 년을 해매 온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남은이의 손길이 닿으니 나는 그대로 이제는 조금 제자리에서 기대어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이 됐다. 안심이 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식은땀이 쏟아졌다.-155쪽
예전에 인간문화재인 목공 장인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었다. 평생 나무만 보고 나무만 만지고 살아서 지혜로워지기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는 평생 나무만 보다 보니 시야는 더 좁아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더 넓은 걸 요구한다는 거다. 그래서 자신은 나무를 보며 자기가 보지 못하는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다. 나는 그 얘기에 너무 공감이 갔다. 나야말로 평생 카메라만 만지고 살았으니. 카메라 부품만 보고 살아온 나는 이제 스물다섯 먹은 여자아이 생각까지 이해해야 한다.-198쪽
며칠 잠을 못 잤어요- 어디선가 남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없이 밤을 새고 과제물 제출하고,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커튼 위로 춤을 추는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오빠 버릇 있잖아요? 얼굴 비비는 거. 너무너무 피곤할 때 하는 건지 그때 알았어요. 너무 몰랐어요, 오빠를." 나는 남은이를 보고 있지 않아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는지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오빠가 평생 안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무뎌질 수도 있고, 오빠가 변할 수도 있고.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백 프로는 아니니까." 커튼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매 순간 매순간 어떤 면으로는 오십 대 오십이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남은이 눈동자와 같은 노란 노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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