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09년도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회사와 각 부서에서는 연말결산을 준비중이고, 매체에서는 올해의 사건, 올해의 영화, 올해의 드라마... 뭐 이런 목록들을 양산하고 있고, 이곳 알라딘에서는 올해의 책 투표를 진행중이다. 나또한 개인적인 책, 영화 목록을 정리하려다 갑작스런 일로 인해 작성을 중단한 상태다. 조금 방향을 틀어, 올 한해 작별한 사람,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작성하려 한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 

           

   비록 말년에 '가슴 아픈' 말씀을 하셔서 여론에 뭇매를 맞으셨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행적은 고작 그정도의 '실수'로 덮어버리기에는 정말로 거대하다. 그 연세였으니 '호상'이란 말도 그리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어둠을 밝혀주신 '어른'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은 마음속에 큰 구멍을 만들었었다. 지금은 편히 쉬고 계실려나, 아니면 또 바쁘게 움직이실려나. 그곳에서는 좀 쉬시길 바랍니다. 

 

2009년 3월 7일 배우 장자연 氏

       

   한 여배우를 죽음으로 내몬 사건은 '역시나' 흐지부지하게 종결됐다. 죽음으로써 진실이 밝혀지길 원했던 그 절박함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전보처럼 텅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가 죽었어도 세상은 아무일 없이 공장 미싱 돌아가듯 잘만 돌아간다. 다음 생에서는 부디 이 나라에 태어나지 마시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우리는 그저 무력감과 허무감만 느낍니다.

 

2009년 5월 23일 - 노무현 전 대통령 

           

   누구에게나 2009년 5월 23일의 기억은 제가끔 존재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난 이날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여느때처럼 웹서핑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포털에 올라온 속보를 보았다. <盧 전 대통령 응급실 행> 처음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생각했었다. 원래 그 양반 지병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나니 <노무현 전 대통령 응급실 행>이라고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그 기사를 보고 웃었었다. "아~ 이 양반 이제 재판 받으려니까 링겔걸고 휠체어타고 가시려나. 가지가지 한다." 컴퓨터를 끄고 그날 아침 10시. 버스에서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사인은 자살"이라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 일을 하다가도 버스 안 출퇴근 길에서도 갑자기 올라오는 감정에 못이겨 손등을 물고 울음을 참았던 기억. 한 사람의 진심을 알기보다는 주위에서 수근대는 말에 한 사람을 재단하고 내친 그 미안함. 난 그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 그도 다른 정치인들처럼 한 3년 독방에서 생활하고 사면 받은 후, 어른으로써 한국 정치에 대해 몇 마디 쓴소리 내지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었지만, 너무 많은 숙제를 남기고 갔다. 숙제를 할지, 미루고 놀다 혼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위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2009년 6월 25일 - King of Pop 마이클 잭슨 

           

   10대 때에는 영웅이었다가 20대 때에는 성형중독자이자 소아성애자인 괴물로 이미지가 박혀버린 마이클 잭슨. 그도 죽어서야 그런 불명예를 벗을 수 있었다. 단 한순간에 전설에서 괴물로, 다시 괴물에서 인간으로 그를 써내린 매체들의 장단에 맞춰 놀았다는 사실이 전 대통령의 죽음과 겹쳐 매우 심란해 했었다. 바닥을 친 영웅의 불명예를 되찾을 기회라 여겼던 <THIS IS IT>콘서트는 그의 죽음으로 무산이 됐지만, 유작 영화로 제작되어 그의 팬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됐다. 차라리 괴물이어도 괜찮으니 그냥 살아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2009년 6월 28일 - 유현목 감독

             

   유현목 감독의 영화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고루하다. 하지만, '고루하다'는 말이 '재미없다, 지루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고인에게 큰 실례다. 그는 『오발탄』으로 한국 영화를 서방에 알렸고, 한국 영화에 '모더니티'를 끌고 온 선구자다. 일본영화와 표절시비도 있긴 했지만, 실험성을 표현하는 담대함은 뛰어났다. 안타깝게도 시대에 도태되어 마지막 10여년은 전혀 작품 활동을 못하셨지만, 대신 남아있는 작품이 대신 그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2009년 8월 4일 - 수영선수 조오련 氏 

  

   사람과의 비교 대상이 더이상 없어 바다 생물과 비교를 하곤 했던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단신으로 대한해협을 건넌 것이 몇번이었는지 셀 수 없을만큼, 그는 박태완 이전의, 수영계의 아이돌, 아니.. 이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수영 그 자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아이스 에이지2』에서 바다 거북이 역을 맡아 기꺼이 목소리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물론 영화사의 홍보효과의 일원으로 섭외되었겠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몇 편의 뉴스클립을 제외하고는, 이것 뿐이다. 그저 죽어서도 사망신고를 올리지 못하는 그의 딱한 처지가 안타까울뿐이다. 

 

2009년 8월 18일 - 김대중 전 대통령 

          

   천수를 누리셨지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의 충격과 그 빈자리의 상처가 치료되기도 전에 또 한 분의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가슴 한켠을 먹먹하게 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꿈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뵜었다. 아침나절의 싱그러운 약수터였던 것 같은데,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김전대통령이 누군가와 함께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지팡이도 없이. 너무 놀란 내가 '감히' 말을 걸었었다. "아니, 병원에 누워계신다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걸어다니셨어요?" 그러자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 "아~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수 있는가. 이제 움직여야지. 걱정해줘서 고맙더라고." 그리고 꿈에서 깼다. 아내한테 그 꿈 얘기를 하고나서 며칠 후 김전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뉴스를 속보로 접했다. 땅에 묻히시는 그 날까지도 나이 지긋하신 'tomb raiders'의 공격을 받으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 그곳에서는 지팡이 없이 편이 쉬시길 바랍니다. 먼저 가 있는 노통을 만나시거든 조금만 혼내주시길. 

 

2009년 8월 21일 - 배우 이언 氏 

       

   『천하장사마돈나』에서 이언은 정말 씨름선수 같았다. 이 말은 그가 씨름선수 출신이라서 씨름선수 같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씨름선수를 '연기'했다. 기능적인 역할이 아니라, 주인공과 반대되는 지점에서 부딪히는, 씨름만 알고, 씨름만을 위하는 진짜 씨름 선수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류덕환과의 씨름장면에서 그의 마지막 웃음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야지. 하루종일 똥싸는 얼굴로 살지마. 즐겨!"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건강한 웃음을 볼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2009년 9월 1일 - 배우 장진영 氏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반칙왕』에서였다. '여자' 배우같지 않은 여배우. 중성적 매력의 털털함이 시선을 끌게 했다. 그러다 그녀를 내 세포에 각인시킨것은 『소름』이었다. 늘 얼굴에 멍을 지닌채로 미친여자처럼 오래된 아파트를 서성거리는 그녀. 벗어날 수 없었던 인연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 자꾸 그녀의 죽음이 오버랩되는 까닭은. 힘든 투병생활을 견뎠을 그녀.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길 바랄 뿐이다. 

 

2009년 12월 20일 - 배우 브리트니 머피 

                      

   솔직히 얘기해 그녀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원래는 히스 레저가 차지할 자리였으나,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로 대체되었다. 

   지난 일요일에 아내와 함께 집에서 『씬 시티』를 봤다. 우리가 그 영화를 본 것은 순전히 미키 루크와 조시 하트넷 때문이었는데, 세 번째 에피소드 「The Big Fat Kill(성대한 살육)」을 보는 도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여배우를 보고 대화를 했었다. 

"누구죠? 저 여자?"
"브리트니 머피. 애슈틴 쿠처랑 결혼하고 이혼했잖아요. 그 이후로 애슈틴은 연상에 빠지고."
"결혼 했었어요?"
"아닌가? 뭐 같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가 죽었다는 뉴스를 봤다. 왜, 어째서 영화를 보면서 다른 배우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했는데, 왜 하필 그녀에 대해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스러울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명단이 많이 빈다. 망자는 말이 없고, 남은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짐을 매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에게 해묵은 작별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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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2-2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특종으로 선정 될만큼 좋은 페이퍼네요.
참 많은 분들이 가셨죠~ 삼가 그분들을 기리며...

Tomek 2009-12-24 10:03   좋아요 0 | URL
아홉수라 그런걸까요? 2010년에는 좋은 소식만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novio 2009-12-2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고, 우리 옆에 언제나 있을 것만 같았던 분들이 이미 세상을 달리했군요. 솔직히 실감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역사에서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그리고 브리트니 머피의 죽음은 한 해를 마감하는 상황에서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올해는 정말 이래저래 슬픔이네요.

Tomek 2009-12-24 14:54   좋아요 0 | URL
올해의 슬픔이 내년에는 기쁨으로 돌아와주길 바랍니다.
Adieu, 2009.

글샘 2009-12-29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죽었으면 떡돌린다는 넘은 안 죽고, 피눈물로 저문 한 해였습니다. 불은 유난히 많이 나구요. 슬픔이 새록새록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내년엔 또 얼마나 슬픈 한 해가 될는지요.

Tomek 2009-12-29 11:10   좋아요 0 | URL
2010년엔 좋은 소식만 들려오길 기대합니다. 그래도 아직 상자안에 '희망'은 남아 있겠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