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불량식품. 그 끊을 수 없는 유혹
창천항로 무삭제 완역판 1
이학인 글, 왕흔태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삼국지』만큼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수많은 작가들이 각색한 작품은 없다고 본다. 독자들이 『삼국지』를 읽는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작가들이 『삼국지』를 각색하는 이유는 아마도 단 한가지인 듯 싶다. 

   흔히 말하기를 『삼국지』는 세푼의 허구와 일곱푼의 진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저 '세푼의 허구'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 것 아니었을까. 20세기 말에 삼국지 붐을 일으킨 『이문열 삼국지』를 잠깐 살펴보자.  

 

   
 

   이로써 공명의 남만정벌은 끝났다. 하지만 정사(正史)에 비추어 보면 가장 허황되고, 연의(演義)를 지은 이의 작가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 이 남만정벌이 아닌가 한다. 

   진수(陳壽)의 정사는 <장무 3년 봄 제갈령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해 가을해 그 땅을 평정하다(章武三年春 亮率衆南征 基秋悉平)>란 한 귀절뿐이고 주에서도 서너 줄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민간의 설화도 참고는 되었겠지만, 맹획을 상대로 제갈량이 펼친 그 현란한 계책들과 갖가지 준비, 그리고 맹획을 도우러 나온 설화적 남만왕들은 거의가 연의를 지은 이의 상상력에서 나온 셈이다. 지나치게 공명을 추켜세우다가 공명을 한 술사(術士)나 이인(異人)처럼 보이게 해 오히려 현실감이 없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재능이다. 삼국지연의를 기서(奇書)라 일컫는 것도 실로 그런 지은이의 재능을 높여 한 말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이문열 삼국지』 9권 「孟獲은 드디어 꺽이고 孔明은 成都로」중에서 - 

 
   

 

   저 한 구절로 서술한 역사에서 나관중은 엄청난 소설적 역량을 펼쳐놓았고, 후대의 작가들은 이런 '넘사벽'을 보며 질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문열은 그런 나관중에 버금갈만한 자신만의 삼국지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문열 역시, 정사를 추축으로 『삼국지』에는 서술되지 않은 각 주요 인물들의 어린시절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만의 삼국지를 착실히 건실했다.  

   소설에선 좀 특이한 경우지만, 다른 매체, 특히 만화에서는 이런 재구성/재해석이 빈번해졌다. 특히나 7~80년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고우영 삼국지』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고우영은 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삼국지』에서 단 한구절로 처리한 서술을 굉장히 흥미롭게 확장시키곤 했다.  

 

   
 

   평소에 이각은 해괴하고 요사스런 술법을 좋아했는데, 진중에 항상 무녀를 불러들여 북을 울리며 내림굿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피우곤 했다. 모사 가후가 여러 차례 중지할 것을 간했으나 이각은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다.  

- 『황석영 삼국지』 2권 「이각과 곽사의 난」중에서 -    

 

  

-『고우영 삼국지』 2권에서 -

『삼국지』에서 단 한구절로 처리한 사건을 고우영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약 10여회의 사건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 생생한 '무녀-엑소시스트'의 캐릭터를 집어넣고, 독자들이 성인만화에서 기대할만한 장면들을 넣었다.

 
   

 

   『창천항로』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길게 돌았다. 『창천항로』는 『삼국지』이나 『삼국지』가 아니다. 이 만화에서 정본으로 쓴 것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이다. 이 만화의 스토리 작가 이학인(李學仁)은 정사의 행간 사이를 무한정 확장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삼국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사를 바탕으로 썼는데도 그 '구라'의 정도가 『삼국지』를 뺨 칠 정도로 넓고 방대하다. 

   『창천항로』는 조조의 일대기이다. 조조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시대를 통틀어, 정치, 무예, 문예, 예술, 건축 등 거의 전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이 배출된 인물들 중에 가장 파격적인 인물이다. 이런 거의 절대자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인물의 일대기라니, 좀 김이 빠지는 느낌도 들지만, 역사의 행간을 통해서 조조라는 인물이 어떻게 한(漢)을 바라보고, 극복하고,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는지에 대한 재미는 꽤나 솔찬하다. 특히나 1권과 2권에 걸친 조조의 첫사랑 이야기는 정사에 기록된 단 한줄의 기록으로 펼쳐놓은 '구라'의 결정체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어느날 조조가 중상시 장양의 침실에 침입해 마구 검을 휘둘렀으나 그 무예가 '절인'의 경지에 이르러 어떠한 사람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창천항로』 2권 14장 「장양의 상처」중에서 - 

 
   

 

   이학인은 이 한 줄의 역사를 가지고, 조조의 첫사랑 '수정'을 탄생시키고, 조조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맴돈 왈패들을 엮는다. 수정은 '서쪽 오랑캐' 처녀로 그녀는 서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삼국지에서 알렉산더, 클레오파트라, 연기의 마인(魔人)- 아라비안 나이트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아찔한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리고 십상시 장양은 '성도착자'로 나온다. 조조가 장양의 침실에서 칼을 휘두른 것은 자신의 첫사랑 수정이 장양에게 팔려가자 그녀를 되찾기 위한 것이다. 단 한줄의 기록에서 믿지못할 이야기가 뽑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참 구슬프다.

   물론 『창천항로』의 공은 스토리를 구성한 이학인에게 있지만, 작화를 맡은 왕흔태(KING☆GONTA)의 공을 뺄 수 없다. 왕흔태는 이 감당할 수 없는 '구라'에 실체를 입혀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감당할 수 없는 구라를 더욱 규모가 크게 그림으로 묘사해 독자들이 아예 그 세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만일 이학인의 글이 '소설'로 나왔다면, '펄프픽션'류의 소설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왕흔태의 그림이다. 

   『삼국지』보다 더 삼국지스러운 『창천항로』는 조조의 성장담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정본을 읽은 사람들은 더 많이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삼국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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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09-12-2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천항로, 어릴때 재밌게 읽었습니다! 무자비한 영웅주의가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창천항로>의 세계관은 만화 <묵공>(영화로도 나왔지요...)과 대비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미리 성탄인사 드립니다. 서재 문패로 걸어놓은 Tomek님 질문에 기상청은 일단 yes라네요^^

Tomek 2009-12-23 09:15   좋아요 0 | URL
이거 읽은지 벌써 10년이 되가네요. 그때는 성인만화면서 삭제판으로 나오더니, 몇 년전에 무삭제판으로 다시 나오더군요. 그김에 다시 사긴했는데, 중고장터에 구판을 올렸는데 팔리지는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것 같아 고민입니다.

성탄인사 고맙습니다. ^.^

아포지 2009-12-2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루시드 폴은 저도 예전에 참 좋아했는데, 최근 음반들은 들어 보지 못했네요. 아 그나저나 창천항로는... 조조팬으로서 매우 호쾌했던 만화입니다. 촉한정통주의 때문에 유비파가 전적인 지지를 흔히 가져가는 데다가, 조조는 간웅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고우영 만화만 봐도 좀 너무 안좋게 그려지지 않았던 거 합니다. 하지만 정말 르네상스보다 앞선 르네상스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Tomek 2009-12-28 14:22   좋아요 0 | URL
파격적인 인물이었죠. 서양사에서 비교인물을 꼽아보자면 람세스급? ㅋㅋ 만화에선 너무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놓아서 그런지 긴장감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좀 아쉬운 점이죠.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