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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Lucid Fall) 정규 4집 - 레미제라블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제가 이 음반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울적해지는 무참함에 자판을 두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매자의 입장에서 몇 마디 적어야겠지요. 음반을 받은 수요일, 집에 도착해 CD를 데크에 넣고 플레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그 찰나의 짧은 시간마저도, 두근거림으로 인한 아찔한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전 루시드 폴의 음악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한 곡, 한 곡 스피커에서 그의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전 그가 조곤조곤 읊조리는 외로움에 울적해졌습니다. 그 울적함은 체념이나 미련의 울적함이 아닌, 미안함과 죄의식의 울적함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이상 골방에 틀어박혀 지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에 걸어나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소외된 존재에 대해 노래합니다. <미선이>때 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를 '내지르지' 않습니다. 그는 소외되고 잊혀진 자들이 되어 그들을 노래합니다. 감정을 자극해 눈물을 짜내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의 입장이 되어 세상에 남아있고 그들을 잊은 우리들에게 노래를 합니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중에서-
서서히 밀려오던
군화 소리
대검의 빛
줄어드는 시간
(......)
시간이 흘러가도
기억속의 그대 얼굴
지워지지 않아
작은 풀 하나 피지 못했던
차가운 여기 이자리에
홀로 남은 날 잊어 줘요
이제는 볼 수 없어도
그대는 나를 잊어요
-「레미제라블 Part.1」에서-
죽어가던 사람들
싸늘하게 쓰러져
빛을 잃은 빛나던 도시
믿을 수 없던 비명소리
이제는 믿을 수 밖에
그대는 오지 않으니
(......)
시간이 흘러가도
기억속의 그대 얼굴
지워지지 않아
눈이 보지 못해도
귀가 듣지 못해도
차가운 여기 이 자리에
그대 있음을 알고 있죠
아직 날 울리는 사람
어떻게 그댈 잊어요
-「레미제라블 Part.2」에서-
노래를 들어보면 「평범한 사람」은 용산참사를, 「레미제라블 Part 1, 2」는 광주항쟁을 노래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노래들은 '우리들'을 위해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울고 있는 내 친구여, /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와 같이 「평범한 사람」은 아직도 용산참사에서 죽은 '평범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따듯한 집에 앉아 인터넷으로 욕을하고, 이젠 그나마 그들을 '사건'으로 박제하려고 하는 '저'같은 놈은 이 노래를 듣고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노래는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 눈물흘리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레미제라블」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주항쟁에서 공권력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녀의 애틋한 사랑으로 풀어놓았습니다. 이 슬픈 이야기를 개인적인 사담으로 좁혀놓아서 '저'는 그들의 이야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마치 드라마를 보듯, 영화를 보듯, 아니 좀 더 돈을 써서 뮤지컬을 보듯, 그들의 슬픈 이야기를 보고 슬픈 눈물 한 방울 닦아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광주가, 용산이 그런 값싼 눈물로 해결되는 '비극'일까요? 루시드 폴은 우리들이 무의식 혹은 역사의 저 편으로 박제시켜놓으려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잔인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잔인함이라면 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우린 아무 문제 없다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루시드 폴은 다 풀어진 「진달래 타이머」를 다시 팽팽히 감았습니다.
물론 제 해석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그저 소외된 존재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벼꽃」과 「고등어」를 들으면 그 의미는 훨씬 더 명징하게 다가옵니다.
모두들 날 알지 못한다고 해도
한번도 날 찾아 본 적 없다 해도
상관없어요
난 실망하지 않으니
머지않아 나락들은 텅빈 들판을 채울테니
눈을 크게 떠
나를 찾아도
더 이상 나는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생각난다면
불꽃같던 내 사랑 하나는
믿어줘요
-「벼꽃」 중에서-
몇 만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그래도 나는 안다네
그동안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난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고등어」 중에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밥과 반찬인 고등어에게조차 위로받는 삶이란... 그저 그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나옵니다. 쌀과 고등어가 사람들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진데도, 이런 역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만, 전혀 기억하지 않는 고마운 존재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생이 뭐 별 것인가요? 하지만 기록되는 역사는 '별 것'만 기록하죠. 그 역사를 굴리는 사람들은 무시하며... 루시드 폴은 그런 우리를 '고작' 벼꽃과 고등어로 우리를 위로해줍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두 번째 곡 「걸어가자」로 루시드 폴의 대답을 대신하려 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나를 데리고' 이렇게 걸어 '가자.'
세상이 어두워질 때
기억조차 없을 때
두려움에 떨릴 때
눈물이 날 부를 때
누구 하나 보이지 않을 때
내 심장 소리 하나 따라
걸어가자
걸어가자
-「걸어가자」중에서-
*덧붙임
1. 열 한번째 곡「문수의 비밀」은 사랑스러운 후렴구 때문에 라디오에서 '어버이날'에 리퀘스트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러다 최성빈의 「사랑하는 어머님께」같은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2. 전체적인 앨범의 구성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1집『Infield Fly』가 떠오릅니다. 사회 참여적인 전반부와 사랑 노래인 후반부. 물론 루시드 폴의 구성은 그렇게 이분법적이지 않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