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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사정 볼 것 없다 - Nowhere to Hid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를 시작으로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서는 내러티브가 최소화하기 시작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내용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형사가 범죄자를 쫓고 범죄자는 결국 잡힌다.' 영화는 팜므파탈이라던가, 반전같은 것을 숨기고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우직하게 이 내용으로 진행된다. 스토리를 최소화시킨 반면, 캐릭터는 생생하다. 이명세는 2시간이라는 필름의 화폭 안에서 마음껏 그의 이미지를 그린다.
감독의 철저한 취재 때문인지 흔히 영화나 TV에서 보이던 스테레오 타입의 형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박중훈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코믹과 위악을 넘나들고 안성기 또한 대사 한 마디 없이(정확히 표현하자면 두 번 말을 하지만 거의 혼잣말 수준이다) 냉혹한 살인자 역할을 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씬만 따로 떨어뜨려놓고 본다면 마치 실험영화처럼 극단까지 밀어 붙이지만, 그 장면들이 튀지 않고 영화에 녹아든 이유는 각 장면들이 단순한 내러티브에 복속되기 때문이고, 또 형사의 생활을 묘사한 세밀한 디테일때문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에서 두 편의 영화가 파생됐다고 생각하는데, 캐릭터의 생생함은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으로, 형사 생활의 일상성은 김유진 감독의 『와일드 카드』로 옮겨졌다고 본다.
영화는, 리듬감과 캐릭터의 생동감이 워낙에 뛰어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을 보류하게 한다. 즉, 그냥 입벌리고 영화에 빠져들게 되는 경우인데, 우형사(박중훈)의 고문장면과 피의자의 집에 쳐들어가 윽박지르는 장면을 별 거부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달려가던 영화가 한 번 멈추는 씬/씨퀀스가 있는데, 그게 '이발소'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인상적이다.(이발소/미장원은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개그맨』과 『M』) 김형사(장동건)가 실수로 용의자를 이발소에서 쏴 죽이자 붕떠있고 달려가던 영화의 리듬이 잠시 늦춰진다. 그 일이 있은 후, 우형사는 눈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동생을 찾아가 안부를 전하고 그 동생은 오빠를 위해 장갑을 선물한다. 눈이 내리는 겨울의 기적과 가족의 화해를 암시하는 이 장면은 더할나위없이 따뜻하다. 그렇게 잠시 위안을 받은 우형사는 김형사를 (그만의 방식으로) 위로한다. 리듬감으로는 가장 처지지만, 이명세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씨퀀스는 감독의 인장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의 성공은 이명세가 내러티브가 없이 이미지와 운동으로만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 다음 결과물 『형사』는 참혹한 실패를 했다. 분명 이 영화에 내러티브는 없다. 그러나 일반 관객들은 내러티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디테일 때문이다. 디테일이 내러티브를 대신할 수 있어서 관객들은 별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형사』엔 디테일이 없었다. 그 자리를 상상력이 대신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이명세 영화의 정점이다. 물론 그는 더 나아갔지만,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앞으로 그의 영화를 더이상 볼 수 없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