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숭고함
-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더이상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직접적인 말이다. '고전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문체가 소설이, 역사가 아닌, 이곳 현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독자들의 큰 바람이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해 엄정하고 냉엄한 시선으로 가다듬은 문체로 이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비판하고, 방향을 제시해준다면 그의 독자로써 얼마나 복될까? 하지만 그것은 독자들의 이상일 뿐이다. 김훈은 독자들의 이상이 빚은 인물이 아니다. 김훈은 김훈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낸다.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보일법한 것들도 스스럼없이 다 드러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보적'인 틀에서 김훈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김훈은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지금의 이 세상을 깨뜨리기 보다는 이 세상에 맞추어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가부장제도를 존중하고 '여자'는 가부장제도하에서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여기 저기서 실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김훈이 오히려 묻는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게 도대체 뭔데?'
그는 '세상 잡사를 싫어하면서도 세상 잡사를 말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는 그가 보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번잡스러운 일도 그에게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래서 그는 그 풍경을 보고, 그 너머의 것을 사유하고 글을 쓴다. 단, 이 글들은 애초에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들이 아닌, 신문지면, 잡지 칼럼에서 소비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쓴 글이다. 신문과 잡지의 분량은 정해져 있다. 한정된 분량 덕분에 그는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대신, 빠른 템포로 간결하게 넘어간다.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등의 산문집에서 끝까지 밀고나가는 그의 사유에 진절머리쳤던 독자들이라면, 그보다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이상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생각났다. 이스트우드는 김훈과 달리 자신의 정치색을 확실히 드러냈다. 그는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 이고, 총기소지를 지지한다.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로 인터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언론에 이렇게 얘기했었다. "그자식이 날 인터뷰하러 온다면 총으로 쏴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정치색으로 그의 작품을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세르지오 레오네, 돈 시겔과 함께 한 서부극과 형사물에서 이 세상을 지키는 역을 했었다. 그가 배우가 아닌 감독을 한 영화를 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명징해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상을 완성체로 보고 있다. 그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보면 나쁜놈들은 그냥 나쁜놈들이다. 그들은 갱생을 할 수 없는 존재고, 이스트우드 또한 그들을 갱생의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몰아내야할 존재들이다.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나를 지키고 안전한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그가 지키는 가족, 그리고 이 사회는 그가 목숨을 걸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다.
김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가부장제도를 존중하고, 이 사회를 지키고 존중한다. 단지 그가 정치성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그 자신도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런 편가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끼니를 떼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세상 밑바닥에서 담론의 가장 밑바닥인 '밥'과 '끼니'에 대해 쓰는 글이 정치성을 초월하는 거대담론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어쩌면 김훈 사유의 힘이 아닐런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김훈의 글을 읽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생각하다가 글이 두서 없이 되어 버렸다. 내가 원래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