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70년대는 역사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그 시대를 기억하기엔 너무 어렸다. 내 유년기는 80년대부터 시작했고, 경제개발, 유신, 독재로 점철된 70년대는 실체로 다가오지 못하는 간접 경험의 시대다.
민주주의의 시대에서 독재의 시대로,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산업 중심의 사회로. 70년대는 지금 대한민국의 틀을 다져놓은 시대다. 오로지 '잘 먹고 사는 것' 이라는 생존에 목표를 둔 시대였다. 인간의 모든 가치들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였다. 밥벌이를 책임져준 농촌에서는 더이상의 일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린 소년, 소녀들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돈을 벌 길은 공장으로 대표되는 막노동과 식모나 술집밖에 없었다.
영화는 종삼(종로 3가) 588에서 시작한다. 호객행위를 하는 창부들이 단속으로 잡혀가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폭행으로 끌려온 창수(송재호)가 영자(염복순)를 알아본다. 그리고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넘어간다.
팔이 없어 괴물로 취급받는 영자와 팔이 없어 미인으로 추앙받는 밀로의 비너스, 그 극명한 대비
영자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밥'이다. 아직 영자는 이 사회의 자본주의를 맛보지 않았다.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왔고, 그녀가 살아왔던 세상은 쌀이 중심인 농경사회다. 농경사회에서 쌀은 생존이지 탐욕은 아니다. 영자가 식모살이를 하는 그 집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에도 그녀는 그녀 입술에 묻어 있는 밥풀을 떼 먹는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도착하지 않았다.
집에서 쫓겨난 후, 영자는 술집 작부 생활을 하는 '고향 언니'와 같이 산다. 그녀는 영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돈. 돈. 돈. 돈이 문제야." 결국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고 그 돈을 버는 것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영자는 겁탈을 당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향 언니는 여자로써 '쉽게' 그 문제되는 돈을 벌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영자는 기술을 배워,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싶어한다.
이 영화가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 유행한 '호스티스물'의 첫 효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그 태생은 전혀 다르다. 당시 호스티스물이 믿었던 남자나 (혹은 애인) 사고와도 같은 강간을 당하고 삶을 포기한 채로 술집이나 588에 흘러 들어가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 영자는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고작 그정도 이유로(!!)' 삶을 포기 하지 않는다. 영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영자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열심히 시다일을 해서 돈을 벌어 보지만, 이것 저것 나가는 돈을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동전 몇 푼이다. 영자에게 돈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운전을 배워 택시를 몰고 싶은 영자는 버스 차장이 되지만, 그만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만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괴하고 무서운 장면. 아스팔트를 뒹구는 영자가 하늘로 날아가는 자신의 왼팔을 본다. 그리고 그녀의 날아간 팔은 '삼십만원'의 가치로 환산되어 영자에게 지급된다. 그리고 고향 언니는 영자의 왼팔에 매겨진 돈으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설레어한다. 등가법칙으로 영자는 자본주의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얼마나 잔혹한가!!
영자가 팔을 잃은 것은 그녀의 꿈을 잃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꿈은 삼십만원으로 환산되어졌다. 그리고 그 돈은 고향 언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돈이다. 인성이 사라지고 돈만 남은 이 세상을 영자는 더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온 기찻길. 고향으로 갈 수 있지만, 갈 수 없는 그 길 위에서 영자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기차는 그녀 앞에 선다. 오직 돈이 가치있고 숭배받는 사회에서 영자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을 해결하고자 몸을 판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남자들의 욕망뿐이다. 그렇게 영자는 시나브로 오염한다.
그런 그녀에게 구원은 '사랑'이지만, 창수는 그녀를 '동정'한다. 작은 구원같아 보였던 화가와의 관계도, 팔이 없는 그녀를 보고 '밀로의 비너스'라고 운운하는 것도, 겉보기엔 그럴듯한 위로 같지만, 실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팔이 없는 사람에게 '비너스같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위로일까? 경찰서에서 영자를 만난 이후로, 창수는 영자를 매일 찾아간다. 그녀가 병에 걸리자 그녀를 치유하고, 벌이가 없을 때 돈을 주고, 의수를 달아주고 그녀의 때까지 벗겨준다. 하지만 창수는 영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왜 그 애가 그렇게 됐는지 화가나요!"라고 말할 뿐. 창수는 영자를 그렇게 만든 그 근본적인 이유에 다가가기 보다는, 그저 그런 영자를 보살펴줄 뿐이다. 그런 창수와 그런 영자는 서로에게 '1'이란 존재가 아닌 '-1'일 뿐이다.
더러운 세상의 묵은 때를 밀어주는 창수. 하지만 그런 그도 영자를 구원하지 못한다.
영자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조선작의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아마도 영자는 죽었을 것이다. 영자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해피엔딩을 마련하고 있다. 결국 영자는 '사랑'을 찾고 구원을 받아 이 세상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역겨운 결말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숨죽인' 그 70년대의 한복판에서 그런 '작은' 구원이라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죽었을, 수많은 영자들, 우리 누이, 이모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