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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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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술은 우리가 갖는 상식과 질서, 형식들을 무너뜨리고 재설계한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면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성을 허물고 망가뜨리는 것, 온 질서와 구도를 파괴하고 왜곡하며, 뭉개고, 덩어리지게 하는 것. 엄격한 질서와 대조를 이루며 예술의 세계는 미지를 구축하는 전복적 미학을 갖추게 되었다. 인류가 발명해낸 예술의 여러 속성들 가운데서도 ‘그로테스크’적인 면모는 단연 본질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 여느 작품과는 다른 강렬한 인상을 품게 되는 것은 예술의 근간에 가장 인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석의 모양에 가까운, 아직 아름다워지기 전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그로테스크함’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작품은 대개 좋지 않은 감정인 불쾌함, 조금은 우스꽝스러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인상을 품으며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세계의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로 인지해왔다. 현실과 동떨어진 매력을 주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사는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는것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우리를 위협할 공포가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로테스크함’이란 세상 어느 곳에라도 존재하는 희로애락의 틈에 잠재된 개념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공포를 말할 때 그것을 둘러싼 정황이란 건 편하기 이를 데 없는 믿음의 성에서 출발함을 안다. 익숙한 계단을 오르내리고 오래 봐온 사람들과 편안한 교감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낯섦은 시작된다. 아무런 의심의 정황이 포착되지 않을 때 공포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되어있다. 이를테면 반전 영화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식스센스>라는 영화만 보더라도 긴장감이 깔려 있긴 하지만, 아주 익숙한 상황에서 철저하게 제외했던 인물에게 역전의 상황이 닥친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공포란 신뢰의 바탕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배가 되는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하기 위해서는 공포의 감정이 아주 가까운데 있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서의 공포란 분명 생경하고 전혀 모르는 세계를 창조해 그곳에서 발생되는 이질감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익숙하고 보편적 상식에서 비틀어지고 해괴하게 변모된 상태를 우리는 극대화 된 공포의 감정으로 수용한다. 이런 감정이 바로 그로테스크란 단어를 정의할 때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다. 생경해진 세계, 익숙하고 편안한 세상이 갑자기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 이것이 ‘그로테스크’의 본질인 셈이다. 믿고 있던 세계의 신뢰가 무너지고 갑자기 그 세상이 없던 것이 되어 버릴 때 우리는 그 안의 거대한 기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것을 손놓고 바라본다. 이 광경들의 전율을 고스란히 공포의 감정으로 느끼고 뭔가를 깨닫는다. 

 

 

이 책에서는 공포의 궁극이 ‘죽음’을 느끼는 감정 때문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단지 죽음을 두려워해서 갖는 공포심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믿음의 세상에 등돌려진 불편한 조우, 이면을 목도하게 되는 일이 두려워서라고 말한다. 마치 악마에게 저당 잡힌 삶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영원히 내주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인질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공포의 대상은 분명 정체가 모호하고 미지의 무엇이며, 허상의 무엇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확연하지 않은 무엇이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함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거나, 대체로 불안한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질서의 붕괴는 가장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므로 그로테스크를 표현한다는 건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가련한 불사새의 질주와 같다. 그리고 이 감정은 어디에라도 도사리는 불행한 역사의 이면이 키운 씨앗에서 키워진 것이다.
그럼 여기서 그로테스크가 왜 태동하게 되었을까란 의문이 다시 움튼다. 16세기부터 낭만주의시대와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장르에 도드라진 그로테스크함이 어떤 이유로 등장했고 어떠한 의미로 이해되어 흘러갔는지 이 책이 말해준다. 물론 각 작품마다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작품 자체만의 설명에 더 심혈을 기울여서 각각의 특질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를 차치 해두고서라도,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오던 미술작품과 연극과 소설 등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면모의 뿌리를 살펴보는 일은 애매하게 알아오던 개념의 확신을 돕는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말하는 역사적 진면모를 한 꺼풀씩 벗겨내 진짜 눈에 보이는 불편을 악마적으로 해석해 낼 필요가 있다.  
다시말하면 그로테스크의 등장은 인간의 불행이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주 직설적인 사고로 탄생한 것이다. 미지의 무엇이 과연 어떤 실체로 등장하는지, 사람들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비로소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그 시대가 표방하는 질서와 세계관을 강력히 저항한 몸짓이 존재함을 인상 깊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 예술적 가치가 얼마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는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가장 멀고 위험한 벼랑 끝에 서서 말하고 있는 이유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로테스크’한 불편함에 다시는 그 작품이 보고 싶지 않다 해도, 우리는 이 비극의 광경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 봐야 하는 작은 의무가 지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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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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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갇힌 마을은 온통 미지의 세계인 것만 같다. 이곳으로 통하는 길은 청량한 기운이 돌고 사계의 아름다움이 잠든 고요의 숲이다. 길고 긴 역사의 숲길을 지나 이윽고 다다른 마을에서 장광하고 유려한 그림들이 펼쳐 있다. 그곳을 우리는 우주라, 무한공간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보고, 자연스럽고 때론 엄격히 흘러가는 질서를 엿본다. 감당하기 벅찬 지극히 고요한 사색의 시간이 펼쳐지는, 그야말로 혼자가 되는 공간에 와 있는 것이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는 자연으로 우주로 가는 숲길 같은 책이다. 자연의 조짐들이 사계의 구분으로 미묘하게 나뉘고 옛 그림 안으로 정겨운 단어를 문 나비와 벌이 마음껏 날아다닌다. 계절이 다음으로 이동하려는 자연의 틈을 보게 되는 것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모든 변화 앞에 경건하게 혹은 자연의 일부인 냥 멈춰서서 ‘옛 사람’을 만나게 해주니 이 얼마나 반가운 조우인가. 그림을 앞에 두고 감히 다른 상상일랑 할 수 없는 시간의 무한성이 고마워 내가 자연의 일부이고 그림 안의 모든 사람인 듯이 행동하게 된다. 그들과 함께 노닐고 싶어지는 순간, 어느새 옛 그림이 너무 친숙하다. 시간의 틈새에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나누는 기쁨이란 참으로 크고 깊다.  

 

이 책은 각 계절마다 17편의 작품을 선보이며 작가가 온종일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닐었을 여정의 기록을 담아낸다. 옛 그림의 정취와도 알맞게 글쓰기 역시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맑은 얼굴로 시 짓는 듯이 펼쳐진다. 작가는 마치 조선의 어느 선비였을 법한 단정한 인상으로 시간안내자의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처음 본 그림은 생경한 눈으로 보게 하고, 많이 봐온 그림에선 작가 손철주의 눈이 더욱 빛나서 도무지 같은 그림을 봐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도 응시하지 않은 다름을 엿보는 안목, 오래 머물고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알만한 빼어난 시선으로 시종일관 그림 안에서 유영한다. 그리고 이 그림들의 주인이 독자의 것이 될 수 있게 기꺼이 구름이 되고 한 마리 새가 되어 조연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옛 그림 중에서도 각 계절마다 어울릴 그림을 선별하고 엄선한 까닭에선지 손철주만의 유별난 애착이 묻어나 보인다. 그의 글은 옛 시인처럼 삼라만상의 응축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안목으로 넘쳐나고 요즘 말로도 응축해 내보일 줄 아는 ‘시 언어’의 아름다움이 알알이 박혀있다. 
그의 그림 읽기에서 특히 우리 옛말에 대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알게 되는 점도 새롭다. 알고는 있었지만 거의 쓰이지 않던 우리말을 만날 때 고개가 크게 끄덕여 지는 반가움이 있고, 전혀 알지 못했던 순우리말에는 이렇게도 아름다웠던가 싶어지는 앎의 깨달음이 깊이 배어난다. 그림의 정겨움과 더불어 그의 언어들은 감정의 폭을 더욱 넓혀주는 샘과 같다. 역시 우리 그림에는 우리말의 어울림이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빛날 재료인 셈이다.  

 


또한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예리한 비판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제 고조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면서 정치계파의 이름은 술술 꿰는 괘꽝스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싶어지고, 남 탓은 그만두고 세태에 맞게 처신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준다. 옛 사람들의 정서와 태도로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 이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새삼 옛 것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메마른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지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옛 사람들이라는 자양분으로 자란 나무이므로. 하여 숲을 이루는 오랜 시간들을 한 권의 책으로서 돌아보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옛 그림과의 교신을 자청해야지 싶어지는, 참 정겨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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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도시 안을 거닐며 건축을 보고 그것을 에두르고 있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그곳의 유구하거나 사소한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 나왔다. 세계적 건축가이면서 여행자이기도 한 안도다다오가 세계 여러 곳곳 방황하면서 느낀 온기와 철학을 담아낸 것이다. 
방황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디일지, 어떤 지점이 그의 영혼을 움직였을지, 또 그만의 건축 철학은 그곳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지 궁금한게 참 많아진다. 완전한 건축서이거나 완전한 에세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겸손이 오히려 불완전한 미학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미술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반가운 책이 나왔다. <클릭, 서양미술사>가 독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온 이래 10년간의 작업으로 탄생한 <클릭, 한국미술사>는 시대와 분야, 주제별로 당대를 대표한 미술의 방대한 역사를 한눈에 정리한 백과사전이다. 
천 여점에 이르는 도판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거나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발해의 미술, 근대미술의 회화 역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한국미술사를 알게 해준다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 듯 싶다.  

  

  

국내 유일한 차이콥스키의 전기서. 그의 생애를 자세하게 다룬 책이 없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그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가장 유명한 음악가 가운데 한 분이니 말이다. 괴팍한 천재 차이콥스키의 성정을 자세히 알게 되는 계기를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장의 음악cd 구성으로 생애와 맞물린 지점들을 음악과 함께 포착해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의 숨겨진 음악세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유익할 반가운 책이다.  

   

 

 

 

<그림으로 읽는 한국근대의 풍경>은 근대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당시의 삶을 엿볼수 있는 책이다. 봉건의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전개의 과정이 어떠한 사건과 문화사적 계기로 변모했을지 살펴보는 일이 무엇보다 흥미로울 것 같다. 한장의 그림으로 담아낸 주요 정치사적 이면과 생생한 당시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궁금해진다. 특히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희귀 자료들이 공개된다고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무너지고 유실되었다는 표현이 아닌 '잃어버리다'라는 말이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말그대로 잃어버리게 되고 만 사건의 그림자가 먹구름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 건축물의 잃어버린 사건을 아홉가지 챕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오래되었다거나, 혹은 전쟁의 여파로 없어진 것은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던 추리에, 이 책의 아홉챕터 목록은 여러 이유들을 추론가능하게 한다. 왜 잃어버리게 되었는가를 상상해보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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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속의 영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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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명사들의 진지한 관점들을 읽고 나니 새삼 영화의 스토리나 미장센, 연기 이외의 시각에는 한번도 물음을 던져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가 갖는 위상이란게 누구나가 태동의 역사부터 대충은 꿰고 있을 미술이나 음악 따위의 영역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랄 것도 없는, 예술이라는 무대의 주연들이 잠시 주춤하는 새 나타난 광대역의 신인, 영화는 이쯤이랄까. 미적 창조가 돋보이는 명백한 예술의 고고한 성질 그것과는 때때로 대척점에 서서 극렬한 논란꺼리를 안겨주는 영화라는 장르는 어쩐지 달라도 뭔가 달라보이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제 영화는 예술의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기도 하는 명실상부한 예술의 집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영화의 역사가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만한 충격과 큰 감동을 선사해 주면서 여느 예술보다도 그 영역을 넓고 크게 확장하며, 열렬한 호응 속에 다 큰 성인이 되어 버렸다.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내는 영화 판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것은 정말이지 좋은 본보기로 자리잡아 갔다. 그러나 일면 예술의 본질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는 것이 영화를 좀 수상한 장르로 여기게 하는 문제일지 모르겠다. 그 예로 영화는 작품 이외에 제반되는 산업과 자본의 토대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을 지니고 태어났다. 독립영화가 있긴 하지만 독립영화만을 예술영화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분류란게 딱히 쉬운 일도 아니다. 만약 그 지점이 진정한 창조의 가치를 스스로 발하는지에 대한 점이라면 이 역시 아슬아슬 하기만 하다. 역자의 말처럼 영화는 예술의 제7이라는 숫자에서 머물거나 내쳐지거나 하는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그럼 영화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가 예술이라는 명징한 영역 안에 있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면 이는 어쩌면 현대사회에 태동한 새로운 잣대로써 가늠해 보는게 맞지 않을까. 그래서 예술이란 단어의 기준은 영화 하나로도 본질을 수정해야 할 만큼 조금 더 확장된 논란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렇게 애매한 관점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라는 장르에 예술적 실마리를 제공하고 그 시작점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영화를 만들어낸 사람보다 심리학자나 미술이론가, 기호학자, 작가 등 다양한 사유자들의 개성있는 논의들로 엮어 낸걸 보면 더욱 그 의도가 드러난다. 어떤 논문을 읽다보면 영화에 대한 사유라기 보다 사진예술이나 미술 등의 역사 공부를 하는 것 같아서 이것들이 대관절 영화와 무슨 상관이던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결국 영화라는 게 사진과 미술 음악 장르의 복합물이라는 걸 감안하면 각각의 뿌리를 더듬는 일도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저마다 영화에 대해 가진 사유들은 시대를 이해하고, 심미안적인 예측과 함께 예술의 여러 속성과 맞물려 잘 녹아 있다. 요사스러운 시기도 없고 경외시하는 일도 없이 다분히 새로운 영역에 대한 세심한 진단이 이어진다.

특히 나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자연이 예술가를 모방한다는 흥미로운 시각이 새로웠다. 사진은 창조력에서 예술가를 능가한다는 말은 발터벤야민의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그 진면모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영화가 아직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포착해내지 못하지만 초자연적인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고유한 능력 그 특별함 속에 곧 시작점을 찍을거란 가능성을 열어 두는 관점이다. 만약 이들이 아바타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본다면 또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영화는 스크린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함축적인 언어와 형태로 카메라의 앵글에 담겨 전달된다. 하나의 숏에 담을 수 있는 총체적인 가치나 혹은 소소한 단서들일지라도 빛과 말과 형태로 치환해 말을 걸어오는 일은 너무나 멋진 작업같아 보인다. 대관절 예술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랴.
 

어쨌거나 영화는 태동부터가 독자적이지 못하고 여러 재료의 결합으로 가능해진 것이었으므로 다양한 견해와 이해의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기만 하다. 어떤 이는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라고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라고도 하는 이 다양한 견해들을 모두 체득해 '안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예술 속 영화란 '상상력에 움직이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행위' 인 것 같다. 
영화가 영화적 발화를 하는 시점에 대해 그 상상력의 크기와 부피의 매력을 가늠해보면 예술에서 상상력이 지니는 절대적 가치와 그 맥을 같이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상상은 우리 내면에서 점진적으로 자라기도 하고 어느 순간 찾아오기도 하는데 영화적 상상력이란 이 순수한 상상에 어떤 장치들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장치로의 인위적 조작이 영화의 출발이었듯이 예술의 매듭 역시 상상력에서 끝날 것이다. 창조란 현실을 모방한 세계가 아니지만 현실의 일면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여러 장에 걸쳐 이들이 영화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원리와 양식, 심리학, 기호학,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곳으로 부터의 접근이고 이 사람들이 다 영화를 예술에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대해 이토록 깊은 사유를 하는 동안 우리는 팝콘이나 먹으면서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영화의 이면 혹은 역사의 원리와 근본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된다. 알려 애를 쓴들 개념의 배치도 정도도 그려내지 못할 제로치 가까운 우매함만이 드러날 뿐인게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사유 속의 영화>는 영화가 일상의 줄기를 한 지점 한 지점마다 돌기를 새겨가며 자라나는 장르이고, 저마다 전에 없던 영화에 대한 사유를 조금이라도 하게 된다면 좋을, 그런 영화 사유 장려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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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김도경 지음 / 현암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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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물 구조도를 천천히 보다가 문득 ‘나는 바보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분명 익숙하게 봐온 건축인데도 하나하나 그 이름을 따라 읽어 가다가 고작 ‘지붕, 기둥, 계단, 대들보’ 모르면 우스워질 단어들에 반가워하는 내 기색 때문이었다. ‘요즘 것들은 옛것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어르신들의 푸념이 온전히 내 탓이오라고 무릎이라도 꿇어 자책하고, 이 책이라도 열심히 익혀서 내 텅 빈 뇌에 공양 바치자는 심경으로 읽어내려 갔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용어와 지식들은 몰라도 될 만한 전문적인 것들이고, 돌아서면 쉽게 잊혀졌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라는 문구의 제안처럼 정말 그렇게 되어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네 건축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 안에 세심히 박혀있는 과학적 논리가 어떻게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인지를 알게 되는 일을 고스란히 이 책으로 배운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은 크게 일곱장으로 나누어 평면에서부터 초석을 다져 기둥과 가구를 세우고 공포로써 유형을 결정하며 지붕을 올려 마감을 하는 건축의 모든 역사와 과정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모든 페이지에 걸쳐 사진과 그림들이 아주 상세하게 설명돼 있어서 상상만으로 부족한 이해의 구체를 도와준다. 이 작업을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고 역사를 공부했으며 나름의 시각으로 풀어냈을까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숙연해질 정도로 반듯한 기분이 든다.
집은 곧 우주이고 자연이라고 말하는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는 여정이 이토록 치밀한 계산과 자연의 융화 과정이었다니, 정말이지 심지가 끝을 모르고 타내려가는 신비로움이 있다.
 

어느 고장의 어느 유적지를 들러도 옛 건축은 비슷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기분을 선사하며 서있다.  단아한 지붕의 선과 그 밑의 화려한 공포의 멋, 이어진 하늘의 그림같은 풍경 정도를 탄복하며 바라보는 수순의 감상 정도가 고작일테다. 그저 자연 풍광의 그림 같은 한 채, 세세히 들여다본들 선조들이 살아내면서 세세하게 지어올린 지혜까지 엿보게 된다는 것은 우매해서가 아니라 알기 힘든 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직접 살아내며 알게 될만한 소소한 지혜나 과학적 근거들을 목격하는 일은 소중하고 새롭다. 과학적 토대가 부실한 시대였다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을 정도로 정교해서, 오히려 지금의 과학이 못 따라가는 위대함이 어디에든 숨어있다는게 한없이 놀랍다. 과학적인 토대로써 균일하게 지어졌고 자연과 사상의 멋이 논리적으로 융합된 구조물로 거의 완벽하기만 하다. 우리 건축의 뼈는 선조들의 정신과 자연에 어울어지는 삶의 융화를 단단히 흙에 심어 올린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저자는 마치 그 시대로 가서 목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스케치를 하고 온 시간여행자인 것만 같다. 그 시대의 혼마저 느껴질 정도로 역사의 맥을 짚어내고 그 틈을 살필 줄 아는 건축의 재단사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환경과 지혜가 결합한 구도라는 이해는 당시의 법과 사상 종교 등 모든 면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건축물 하나로서 드러내는 한국미의 원형을 다 보여준다. 한국인이 구축해낸 정신과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건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건축 하나로 당시의 우주만큼 광활한 가치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었는지는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건축에 투영된 삶의 방식과 시대정신, 예술에 대한 지적 통찰력까지 추론하는 일, 집은 곧 우주이고 자연이라는 명제. 기둥과 기둥 사이의 비움이 곧 공간이 되고 이어 채움의 미학으로 충만해지는 조화로움은 얼마나 위대한가. 섬세한 우리 선조들의 실용이 보태지면 일상이 사물을 포용하는 가치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건축이 왜 시대를 상징하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지 모든 궁금을 풀게 한다. 모든 재료의 크기와 쓰임, 모양새와 틈에는 자연이 주는 조화가 담겨 있고 정신이 깃들여 있으며 궁극의 가치가 스며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건축이며 우리의 혼이고 뼈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통해 한국 건축이 세상을 담은 우주고, 우주의 가장 위대한 '섬'임을 본다. 자연 위에 덩그러니 놓여만 있어도 왜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는지를, 이 책으로 이제 좀 더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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