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열린책들 세계문학 41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임희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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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배경은 프랑스의 왕정복고 시기다. 혁명 후의 반동으로 왕정이 복고되어 루이18세가 통치하고 있던 시기다. 다시 귀족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구체제 왕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프랑스를 지배했다. 늙은 귀족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토지를 되찾지 못했고, 부르주아 계층들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프랑스는 가문의 명예보다는 돈이 중요시되는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된다. 그리고 그 변화로 퇴폐해진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통해 신랄하게 고발한다.

고리오 영감은 한때 잘나가던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재산을 딸들을 출가시키는 데 모두 소진하고 지금은 보케 부인의 하숙집에 기거한다. 보케 부인의 하숙집은 나이 든 노인이나, 늙은 과부, 지방에서 막 상경한 학생 등 돈이 많지 않은 하숙인들이 대부분이다. 영감은 처음엔 그나마도 좋은 방에 살았지만 자신의 재산을 계속해서 두 딸에게 대주며 점차 값싼 방을 전전하게 되었다. 딸들은 저마다 돈 많은 배우자를 구해서 부유하게 살아가지만 영감은 딸들을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난하게 살아간다.

주인공인 외젠 드 라스티냐크는 법학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올라온 학생이다. 그는 고리오 영감의 옆방에 하숙한다. 그는 파리의 화려함에 반해 사교계에 입문해 출세하고자 하는 꿈을 꾼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파티에 초대되고 거기서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고리오 영감의 첫째 딸이었다. 라스티냐크는 그녀에게 고리오 영감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쫓겨나고, 둘째 딸 델핀과 만나게 된다. 그는 델핀과 고리오 영감의 사이를 오가며 둘과 친분을 쌓아나가고, 동시에 고리오 영감의 헌신적이었던 과거를 하나하나 알게 된다.

고리오 영감은 부정(父情)의 화신이다. 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신념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딸들에게 베풀어 가난해질수록 딸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가 제조업을 할 적에 그에게 붙어 귀여움을 떨던 딸들은 그의 도움을 받아 출가하고는 그의 직업을 탐탁잖게 여긴다. 딸들을 위해 일을 그만두지만 더는 수입이 없는 그를 딸들과 사위들은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았다. 과거엔 그나마 '돈 잘 버는 우리 아버지'로 소개되던 그는 직업이 없어지자 쉬쉬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프랑스의 가장 잘 나가는 두 미녀의 아버지이지만, 그는 보케 부인의 하숙집에 살며 늙은 노인 취급을 받고 아름다운 두 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않는다.

라스티냐크는 출세하겠다는 야욕에 불타올라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돈을 꾸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구한다. 그는 자신을 꾸미고 사교계를 드나들고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 델핀과 친해지는 한편, 그녀의 이야기를 밤마다 고리오 영감에게 들려준다. 그는 고리오 영감의 헌신과 몰락을 통해 연민을 느끼며 프랑스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타락한 이면을 직시하게 된다.

보트랭은 라스티냐크에게 접근해 그를 유혹한다. 하숙집의 빅토린 타유페르 양과 맺어지면 그의 오빠를 죽여 빅토린 양이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라스티냐크는 그의 말에 흔들리지만, 결국 고리오 영감을 버리지 못한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트랭이 소설 속의 어떤 인물들보다 유독 도덕적인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룻밤에 순진한 사람으로부터 전 재산의 반을 후려내는 말끔한 신사에게 징역 2개월을 선고하면서, 형편이 너무도 어려워져서 1천 프랑짜리 한 장을 훔친 불쌍한 녀석은 어째서 징역살이를 해야 하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이른바 법이라네." p.136

탈옥수였던 보트랭은 하숙집에 사는 늙은 노파 미쇼노의 고발로 경찰에 잡혀간다. 그가 체포당하면서 외치는 말은 상징적이다.

"당신은 우리보다 나은가요? 우리가 어깨에 진 파렴치함이 당신들 마음속에 있는 파렴치함보다는 덜합니다. 타락한 사회의 무기력한 구성원들인 당신들 말이오. 당신들 중 가장 낫다는 인간도 내게는 저항하지 못했소." p.236

하숙인들은 보트랭이 체포당하자 오히려 그를 신고한 미쇼노를 다그치고, 그녀를 하숙집에서 내쫓는다. 선과 악이 뒤바뀐 기이한 상황이다. 이는 당시 퇴폐하고 타락한 프랑스의 사회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라스티냐크의 <이곳에서는 비열한 범죄만이 자행될 뿐이다! 차라리 보트랭이 더 위대해.> p.298 혼잣말에서도 표현된다. 발자크는 화려한 프랑스 사교계의 이야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하숙집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자본에 의한 타락이 부유층과 서민층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보케 부인은 고리오 영감이 처음 하숙집에 들어왔을 땐 관심을 감추지 못하다가, 그가 가난해지자 영감이라고 낮춰 부른다. 고리오 영감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보여주는 하숙인들의 싸늘한 언행은 그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결국 이야기는 고리오 영감이 죽어가는 것으로 파국을 맞이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딸들에게 내주었던 아버지는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죽기 전의 그에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수의를 입을 돈조차도. 라스티냐크는 고리오 영감의 죽음을 통해 성장한다. 고리오 영감은 죽음이 고통에 괴로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부자였다면, 내가 딸들에게 내 재산을 다 주어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더라면, 딸들은 왔을 테지. 내 뺨에 입 맞추며 뺨을 핥아 댔을 테지." p.312

자신의 무지함을 후회하고 딸들에게 저주를 퍼붓다가도 종국에는 딸들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다고 소리치며 죽어가는 그의 모습에선 딸들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이 느껴진다. 끝까지 영감을 지키는 것은 라스티냐크와 그의 친구인 의대생 비앙숑이다.

발자크는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부패한 귀족들과 돈에 물든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지독히 인간적 면모를 가진 고리오 영감과 대비하여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철된 프랑스의 사회상을 여실 없이 부각시킨다. 작품 내내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중심은 돈이고,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찾아와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도 돈이다. 고리오 영감은 죽기 전까지 자신에게 더 이상의 돈이 없다는 사실과, 딸들에게 앞으로 더욱더 물질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복고 시기의 지식이 선행되어야 깊게 읽을 수 있는 사실주의 소설이지만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되는 현재에도 분명 뜻깊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이 작품이 고전으로 살아 있는 것은 1835년 출간되어 현재까지 17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왔음에도, 아직도 유효한 사회적 통찰을 담고 여전히 독자에게 반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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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2-07-1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글 잘 보고 갑니다.
잊혀질 뻔한 고리오 영감을 덕분에 다시 머리에 담아보고요...

백운호 2012-07-18 15:37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lunaelle 2012-07-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을 읽고 백호님 만큼 깊게 생각해내지 못한게 부끄럽네요.
다시 한번 읽어보거나 새겨볼 만한 줄거리 설명, 문장 모두 잘 봤습니다 ^^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랜섬 릭스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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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찍는 순간 과거나 미래와 단절된다. 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의 매력은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사진 수집가들을 통해 몇 장의 사진을 구했다. 오랜 시간 동안 벼룩시장, 골동품 시장 등지에서 돌아다니던 사진 들이었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사진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작가는 사진에서 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사진을 다시 시간의 흐름에 얹어 놓았다. 그곳이 원래 사진이 있었던 자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연관 없는 많은 사진들이 서로 얽혀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고, 그 결과는 이 책으로 나타났다.

이야기는 몇 장의 사진들로 시작된다. 목이 없는 어떤 남자의 사진. 공중에 떠 있는 한 소녀의 사진. 커다란 돌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 제이콥의 할아버지는 그 사진들을 보여주며 어린 시절의 제이콥에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머물렀던 한 고아원의 이야기였다. 그곳의 아이들은 괴물들에게 쫓겼고, 서로를 지켜주었다. 제이콥은 언젠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되는 것 처럼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제이콥에게 할아버지가 보았던 괴물들은 2차대전 시기의 군인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은 진실이었다.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떨어져 자신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그리고 그들을 쫓는 이들이 있어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설정은 익숙한 것이다. 그런 진부한 설정을 가져왔음에도 이 소설이 매력을 갖는 것은 역시 작가가 소설의 중간중간 배치해놓은 사진들 덕분이다. 물론 그 사진들이 소설의 사실성을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면 이 소설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이 수집가들을 통해 얻은 실제 사진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의 내용과 긴밀히 연결되는 사진들을 보며 허벅지를 치게 되는 일이 잦다. '아! 이 사진을 여기에 연결시키다니!'하는 식이다. 이야기를 구성해놓고 거기에 알맞은 사진을 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일 정도였다. 사진을 이야기에 끼워 맞추려는 억지를 부리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내는 구성법이 일품이었다. 다음엔 어떤 사진들과 어떤 이야기들이 어울러질지를 상상하는 것, 그 재미가 이 소설을 읽는 맛이었다.

약간 아쉬웠던 것은 사진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이야기를 벌여놓고 제대로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설명하는 데만 공을 쏟고, 세계에 대한 수수께끼가 모두 풀려버리니 이야기를 끝마치는 식이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음에도 소설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이야기에 붙일 사진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에 뒷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건 사진이 없는 순수한 이야기가 되리라.

수많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소설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장의 스냅샷 같은 소설이었다. 석양을 받으며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마지막 한 장의 사진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설은 그 사진 앞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준 셈이다. 사진 뒤로 끝없이 이어질 이야기들은 독자들이 상상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찍는 순간 미래도 과거도 없어지므로. 그것은 온전히 사진을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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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elle 2012-07-1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못 읽어본 책인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 흥미롭습니다 ㅎ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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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한 지 근 7년 가까이 되었다.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생각으로 책장 한 켠에 모셔놓고 새로 책을 구매할 때마다 빚을 진 심정으로 뿌옇게 먼지만 쌓여가는 책을 힐끗거리곤 했다. 그럼에도 여태껏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은 동양 고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책을 펴면 가득 보이는 한문들, 혹은 논어, 맹자, 장자 따위의 이름들은 시작부터 나의 기를 꺾었다.


근래 들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겼다. 소설만 줄창 읽어댄 내 목서 목록을 보고 오래도록 자기 반성을 한 뒤였다. 이왕 읽을 거 서양 철학서보다는 동양서를 좀 읽어보자는 각오를 했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것이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이었다. 그래, 한 번 읽어보자. 다짐했다. 고전 읽기는 엔간한 내적 필연성이 없으면 쉬이 도전하기 힘든 부분인가 보다.


7년 동안 책장에 꽂아둔 것이 무안하도록 책의 내용은 가벼웠다. 동양 철학에 관심 있는 중, 고등학생. 혹은 대학 새내기들에게 딱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사실 50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 따위를 다 다룬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책은 관계론에 초점을 맞춰 동양 고전들의 특징이나 배경, 주요한 구절 따위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


저자가 동양 고전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서론에 밝히고 있듯이 책은 고전을 해석하고 적당한 주를 다는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작업을 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시선에 맞춰 구절을 해석하고 강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때문에 일반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견을 덧붙이고, 그에 어울리는 추가적인 해석을 부가한다. 이러한 방식에는 장단점이 고루 있겠다. 함축적인 동양고전의 서술 특징 때문에 쉽게 설명이 와 닿지 않는 학생들에겐 여러 가지 비유나 다른 사례로 논지를 보강하는 이 책의 방식이 유익하겠다. 하지만 저자의 주관적인 색채가 많이 묻어나기에 본격적인 동양 고전 읽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불만을 품을 소지도 있겠다.


책에 소개된 어구들은 약간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논어 '학이'편의 첫구절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이 책이 빛나는 것은 고전의 전문가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신영복이 저런 구절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동양 고전들을 소개하고, 고전 간의 관계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에 본격적인 고전 공부를 하기 전에 몸풀기로 읽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같은 책을 통해 철학적으로 일가를 이룬 분이 아닌가. 그를 통해 해석된 동양 고전은 또 그 나름의 색채로 매력을 갖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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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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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전 작,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남아 별다른 고민 없이 구입해 읽기 시작한 책이다.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전 작품은 최진영 작가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 서사를 강하게 밀고나가는 힘은 뛰어났지만 소설이 풀어내는 암울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는 상상의 범위 안에서 쉽게 가능한 것이었다. 언뜻 독하게 써내려간 듯 싶지만 선배 작가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가 더 잔혹하고 깊었달까. 비슷한 면모를 보이는 김이설 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맹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끝나지 않는 노래'는 그녀의 장점이었던 서사의 힘을 힘껏 끌어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3대에 걸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다. 두자의 이야기, 그리고 두자의 쌍둥이 딸인 수선과 봉선, 그리고 두 엄마의 딸인 나. 매력 없어 보이는 주제지만 작가는 이 뼈대에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살을 붙여 독자를 압도한다. 대단한 힘이다. 지루한 묘사나 어설픈 심리 묘사는 최대한 지양하고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 끝없이 이어지는 장구한 이야기를 소설 속에 꽉꽉 채워넣었다. 소설의 본 기능에 충실한 소설이랄까. 작가의 이야기꾼적인 면모를 다분히 보여준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반복되는 지독한 삶, 그럼에도 조금씩 다른 세 여인의 삶을 흥미롭게 그려내는 작가의 필치가 노련하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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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을 준비했다. 가장 멀리 가본 곳이 우리나라 바로 위의 중국 연변이었으니, 인도에의 여행은 각오를 단단히해야 할만큼 긴장되는 것이었다. 미국엔 댈 것도 없고 유럽에도 미치지 못한 거리지만 어쨌든 3시간 반이란 시간을 뒤쫓아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 달 정도로 계획된 여행이었기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고심한 것은 여행지에 들고갈 책이었다. 처음엔 가방 무게를 줄이는 방법으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두 권이지만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곱씹어서 읽을만한 고전이기에 사색의 도구로 안성맞춤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별로 읽고 싶지가 않았다. 먼 나라까지 가서 골치아프게 ‘파우스트’라니. 그래도 고전 하나쯤은 챙기는 것이 좋아보여 알베르 카뮈의 ‘이인’을 챙겼다.


김영하는 ‘랄랄라 하우스’에 여러가지 독서법을 모아놓았다. 그중 가장 으뜸되고, 부유한 독서법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에 직접 찾아가 풍경 가운데서 글을 읽는 것이었다. 내 생에 이 부유한 독서법을 체험할 날이 언제나 또 있을까. 그래서 괜찮은 인도 소설을 뒤져 찾아낸 것이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두 권짜리 소설이라니. 짐을 줄여야 하나 아니면 가장 부유한 독서법을 체험해봐야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엔 짐을 줄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인’과 ‘한밤의 아이들 1,2’ 이렇게 세 권 정도라면 어떻게 가방에 쟁여볼 만할텐데, 내 가방엔 이미 책이 한 권 들어가 있었다.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현대문학 4월호’를 챙겨놨던 것이다.


근데 사실 여행지에서 가장 잘 읽었던 책은 친구가 가져온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었다. 여러 예술가들의 사례를 빌려 여행에 대해 탐구한 이 에세이집은 여행의 가운데 놓인 나에게 절절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이 한 문장 ‘나의 기대 속에서 공항과 호텔 사이에는 진공 밖에 없었다.’는 절묘했다. 그 예상치 못한 진공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경험했던가.


이 책을 여행의 막바지에 읽어서 굉장히 아쉬웠던 점이, 책의 끝에 나오는 여행법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행중에 마주친 풍경들을 소유하고자 하는데 가장 단순한 방법은 바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로 풍경이 소유되었다 생각하고 다시 그 사진들을 꼼꼼히 탐색하거나 감상하지 않는다. 작가는 온전히 그 풍경을 내것으로 만드는 방법으로써 스케치를 제시한다. 그 풍경을 직접 그려봄으로써 그저 눈으로 훑을 때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들을 애정깊게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없었으므로 작가가 제시하는 다른 방법인 ‘말 그림’을 이용하여 풍경을 언어로 적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매력적인 작업을 여행이 끝날 무렵에야 알게 되어 안타까웠다.


외국 고전, 한국 단편이나 시, 에세이 등을 두루 읽어본 결과 여행지에서는 에세이가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여유와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얼핏 어울리는 듯싶지만 깊은 탐닉을 요구하는 문학작품들을 읽다보면 문득 여행의 본질이 흐려지는 듯했다. 애초에 쉬기 위해 떠나간 휴양지라면 이야긴 달라지겠지만, 내가 여행한 인도는 숙소를 벗어나기만 하면 소설이 펼쳐지는 곳이었으므로. 적어도 숙소에선 가벼운 에세이로 머리를 식혀줄 필요가 있었다.


다음 여행에는 에세이를 들고가는 편이 낫겠다 싶지만, 사실은 무거운 외국 고전이 어울릴 법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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