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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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환상성이나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문학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깊이가 얕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읽어서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가슴을 울리지 않으면 그 먹먹함이 남아서 숨통을 죈다. 그렇다고 다시 소설의 첫장을 펴서 꼼꼼히 숙독할 의지가 나에겐 조금 부족하다. 내가 남성 작가의 소설을 주로 읽는 것도 그런 맥락일 텐데, 김숨의 소설은 자꾸 나의 그런 치부를 건드렸다. '내가 과연 무슨 이야길 하고 싶어하는 걸까! 말해봐!' 국문학과적 본능으로 그 밑바닥을 파해쳐 보고 싶지만, 역시 나는 무지하기에 노트에 점 몇 개를 찍곤 넘어가곤 했다.


김숨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구 뛰논다. 그 구분은 어렵다. 소설은 익숙한 일상의 한 장면을 제시하면서 시작해, 어느 한 부분에서 갑자기 비논리성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 방법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주도면밀해서 독자는 자신이 홀린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작품을 따라 읽게 된다. 그러다보면 소설이 언제 이런 안개 속에 휩싸인 건지, 애초에 그랬던 것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술을 사러 나간다며 집을 나서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붙들고 놓지 않는 어머니. 결국 전화선을 몸에 둘둘 감은 채 잠이 든 어머니를 뒤로하고 홀로 식사를 하는 나. 그런 내 앞에 홀연히 서 있는 노망난 노인(모일, 저녁). 사막여우를 보기 위해 동물원에 가, 직접 우리에 들어가서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음식물을 받는 나. 혹은 홍학의 사이에 서서 핏물로 얼룩진 듯한 얼굴을 물에 비춰보는 나(사막여우 우리 앞으로). 퇴직한 날로 유통기한이 끝나 버린 아버지의 머리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어머니와 함께 지우고 다시 새기는 작업을 하는 나(럭키슈퍼). 이러한 이야기들은 문학적 효용을 넘어가지 않으며 이야기에 기묘한 매력을 덧붙인다.


이 소설집에서 자주 나타나는 키워드 죽음, 혹은 질서의 유지이다. '간과 쓸개'에서 주인공은 간암 환자이다. 그의 누님은 담석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그는 누님을 한 번 만나보려고 하지만, 계속되는 정기검진과 치료로 날짜를 잡지 못한다. 계속해서 병원을 전전하면서 생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모습은 수도 계량기통 안에 가득한 귀뚜라미들과 닮았다.



유독 등이 미끈한 귀뚜라미를 나무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는데, 그 귀뚜라미의 다리들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귀뚜라미의 더듬이가 내 손가락에 스치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그 귀뚜라미를 놓칠 뻔했다. 설마 했는데, 그 귀뚜라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죽은 귀뚜라미들 속에서 저 홀로 악착같이 살아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기만 하였다. pp. 20~21  


필사에 대한 저항은 기존의 질서에 반하는 행위이기에 처절하고 비참하기만 하다. 그에 대비하여 '북쪽 방(房)'의 곽노는 그 질서에 순응한다. 그는 폐에 문제가 생겨 위도 반절을 잘라내야 했다. 그는 아내에 의해 북쪽 방에 격리된다. 아내는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그를 떨쳐내 듯이 그를 방에 가두었다. 방에서 점점  육탈하며 죽음에 다가서는 그는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인다. '인간이건 짐승이건 식물이건 광물이건, 종국에는 수축을 거듭해 필멸에 이르게 되어 있다.'(p. 134)는 그의 말은 그의 생각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초연함은 결코 위대해 보이진 않는다.


결국 죽음이라 함은 생의 질서인 셈인데,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이 질서 유지에 강박적이다. '룸미러'의 남편은 자신의 아이들이 잠에서 깨는 것을 두려워한다. 두 아이들은 깨어 있으면 서로 싸우기 바빠 정신을 빼놓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로 인하여 평온이 훼손되는 셈이다. 그는 직장에서 돌아올 때도 집에 전화를 하여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다. 소설 속에서 남편과 나는 장례식장에 가는 길인데, 남편은 뒷 좌석에서 잠이 든 아이들을 백미러로 연신 확인한다. 교통이 마비되고, 소실점까지 차들이 가득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날고, 어떤 새는 차 유리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남편은 아이들이 깰까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사고의 현장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도, 결국 작가는 어떤 사고가 났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아이가 깨어났을 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준다. 사고의 경중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흑문조'에서는 보일러 배관에서 물이 새, 배관공이 구멍난 배관을 찾기 위해 부엌의 바닥을 온통 뚫어 놓는다. 그 상황에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쉬고 있는 안방마저 그들이 침범해 바닥에 구멍을 낼까 하는 것이다. '육의 시간'에서도 남편이 살아 있는 시체와 같은 기이한 여자를 집에 데려와 같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가정의 평온함이 유지되었기에 그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발굴단들이 찾아와 집에서 함께 기거할 때도, 그들이 평화를 깨지 않았기에 화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소설에선 '깨우지 않는 남편'도 등장한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 화자는 오른 전셋값을 빌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는 중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 한다. 제발 깨워달라는 말에 어머니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구나.'라고 대답한다. '럭키 슈퍼'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는 잠들어서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오빠에게 말한다. 오빠의 대답은 이렇다. '깨운다고 뭐가 달라지냐?' 직장을 잃은 남편은 가정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요인이다. '북쪽 방'의 곽노인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이렇게 질서를 지켜나가지만, 그것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럭키슈퍼'에서 어머니는 새벽6시에 슈퍼 문을 열어 저녁 11시에 닫는 생활을 끝까지 지키지만, 새로 들어선 서울슈퍼 때문에 그나마 있던 손님까지 발길을 끊어버린 상태다. 오히려 어머니는 근처 식당에서 일을 하고, 가게엔 새로 물건을 들여오지 않아 있는 물건보다 없는 물건이 많다. 그렇지만 저 규칙은 그대로다.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에서도 화자의 어머니는 매표소에서 일평생을 살다가 매표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다리를 쓰지 않아 다리가 홍학처럼 가늘어졌다. 자식들이 아무리 매표소에서 끌어내려해도 버텨내었던 그녀의 질서는, 그녀가 원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화자가 들른 동물원의 유리 부스 안의 직원은 울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우는 건 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는 거에요.' 하지만 사람의 눈물이란게 그런 것인가. 눈물은 울 시간이 되었기에 흐르는 것이 아니다. 슬프고 고통스럽기에 흐르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애써 감추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 하는 말인 것이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질서도 그러한 것일 게다. 질서가 좋기에 그에 대한 강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없는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신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며 애써 스스로를 감추는 것일 게다. 그 슬픔을 알고 나면, 그들의 속에 감춰진 진짜 눈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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