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설거지 - 안정효의 3인칭 자서전
안정효 지음 / 세경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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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번역가인 안정효 선생의 자서전.

 

돌이켜보니 번역서/영어학습서 빼고 내가 그 동안 읽은 안선생 소설/수필이 순서대로

1)<갈쌈>(책세상,1986) - 92년 무렵

2)<소지/미늘 外 한국소설 문학대계86>(동아출판사,1995) - 96년 말/97년 초

3)<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민족과문학사,1993) - 99년 언제쯤

4)<영혼에 묻어난 이슬>(등불,1991) - 99년 언제쯤

이랬다.

 

어릴 때 겪은 6.25전쟁과 비극적 가족사에서부터 파란만장했던 중고교 때와 서강대 영문과 전설이 됐던 대학 때와 기자 때, 베트만전에도 참가한 군복무 때, 그 뒤 직장인으로 살다 프리랜써 번역가로 소설가로 산 일을 뛰어난 기억력과 여러 참고 자료로 되살렸다.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은

1)서강대 입학 때까지만 해도 영어실력이 변변찮았다는 것

2)가정사가 생각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는 것

3)작가의 꾀라고 해야 하나 기지라고 해야 하나가 꽤 놀랍다는 거였다.

 

물론 작가의 영어학습책도 몇몇 오류를 보여 까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작가는 대한민국 영어학습계의 전설이 될 만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대학교 때 영어공부에 보인 열성을 보면 난 언제 뭣에라도 저렇게 빠져든 적 있나 싶어 부끄러워진다. 하기는 작가는 더 어릴 때도 영화보기,만화그리기 같은 데 푹 빠진 걸 보면 뭣에 푹 빠지는 것도 재능인가 싶기도 하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첨 알게 됐다. 99년에 읽은 걸로 기억하는 <영혼에 묻어난 이슬>이란 수필집 어딘가에서 폭력적 가부장을 슬그머니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게 절절한 체험에서 나온 경험인 건 이제야 알았다. 작가는 3남3녀의 맏이였는데 어릴 때 바로 밑 동생인 둘째이자 맏딸이 폐병으로 죽은 얘기나 6.25때 피란가다 막내여동생을 버리고 가다 결국 돌아와서 다시 데리고 간 일,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다 노동운동에 얽혀 한국에서 취업길이 막힌 막내남동생이 둘째남동생이 있던 하와이로 이민갔지만 결국 적응 못 하고 자살한 일은 처음 알았다.

 

작가가 책 위주로 공부를 했고 그간 만났던 원어민도 거의 지식인이라서 속어이자 일상어인 poop이라는 낱말의 뜻을 안 건 이른바 영어권에 Korean dog poop girl로 소개된 '개똥녀 사건'이 일어난 뒤라는 걸 보면 경험이 지식을 얼마나 제약하는지를 알게 된다.

 

베트남전 때 스스로 죽을 뻔한 경험과 알던 주위 사람들 죽음 때문에 전쟁의 넓게는 삶의 부조리성과 광기를 얘기하는 대목도 좋았고 <하얀전쟁>과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영어로 쓰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우여곡절도 참 재밌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때론 우습기도 했다.

 

번역가로 이미 명성을 쌓은 뒤라 학원사가 주최한 소설공모전에 응모할 때 1)새로움이 모자라단 얘기를 들을까 2)학원사에서 번역서를 몇 권 냈기에 의리로 뽑아준 거라는 소리 듣기 두려워 어머니 이름으로 <하얀전쟁>을 응모한 일도 재미나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인지 지지난해인지 '씨네21'에서 영화평론 뽑을 때도 뽑아 놓고 봤더니 이미 씨네21에 아마추어 평을 올리던 사람들이여서 편집부도 놀랐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참고로 그 해 소설공모전에 당선작 없음으로 결정났단다. 그 까닭이 재밌는데 심사위원인 이호철과 이문구는 <하얀전쟁>이 단연 좋다고 했는데 80년대 중반이어서 학원사 쪽이 국군이 북한공산군에게 지는 대목이 있어서 뽑으면 정부가 우릴 괴롭힐 거라고 다른 작품 뽑아달라고 했고 두 심사위원은 그럼 차라리 당선작 없음으로 하자고 해서 당선작 없게 됐단다. 그 뒤 이호철과 이문구는 '실천문학'에 <하얀전쟁>이 뛰어나단 얘기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실천문학에서 <전쟁과 도시>란 제목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게 인연을 쌓은 실천문학과의 약간의 애증관계도 적어놨는데 그 대목도 참 읽을 만 하다. 실천문학은 작가가 너무 쁘띠부르주아적인 모습을 보여 실망했다고.

 

그 밖에도 작가의 중고대학 동창 이야기, 베트남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과 우리 장병과 베트남전 취재하러 온 종군기자 얘기, 한국 문단,정계,학계,언론계,문화계 사람들과 얽힌 여러 이야기들 덕분에-몇 명만 이름을 대자면 이어령,김열규,서화숙,황석영,송기원-  글자도 작고 쪽수도 500쪽 넘어가는 책이지만 다음엔 또 뭔 얘기가 나올지 궁금해 빠르게 읽었다. 훌륭한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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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2-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마지막 가까이에서 작가의 소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야기 소재는 어디서 얻었는지 밝히는데 그 대목은 소설작법 실용서로도 읽을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