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화제의 책
우선 이 책으로 시작할까요? 인터넷 서점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 무려 1997년에 발간된 <웬디 베켓 수녀의 명화 이야기>입니다. 나름 오래된 책이지요. 저때 질풍노도의 고교생이었던 저는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_-;; 한마디로 말하자면 (좀 진부하지만) 상당히 탁월한 서양 미술사 입문서입니다. 난이도와 흥미 사이에서 상당히 탁월한 균형감각을 보여줍니다. 늘 그렇듯 웬디 수녀님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굳이 특장점을 조금만 꼽아 보자면,
1. 미술의 사회/역사적 위치를 놓치지 않는 훌륭한 텍스트
<무서운 그림>에 드가 이야기가 언급된 바 있습니다. 발레리나들에 대한 계급적 착취의 공포를 얘기하는 다소 특이한 꼭지였지요. 하지만 원래 드가를 언급할 때는 파리의 신윤복급으로 당대의 데카당스한 시대상을 잡아내는 능력을 빼놓아서는 안됩니다. 많은 미술사 책들은 시각적 화풍의 특색을 설명하는 데 급급해서 이런 부분을 상당수 놓치고 있습니다. 미술사조가 역사나 사회의 흐름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간과할 경우, 그야말로 미술은 고급 유희 수준에서 머물게 됩니다. 입문서의 단순한 맹점이라기에는 너무 위험한, 그러나 너무 널리 퍼져 있는 고정관념이죠.
그러나 이 책은 드가의 이러한 사회적 관찰력을 놓치지 않습니다.
드가의 대표작 <폴리베르제르의 바>를 볼까요. 웬디 수녀는 화면 왼쪽 상단 구석에 삐져나온 '여자 다리'를 지적하며 파리의 사창가를 언급하고, 미녀와 함께 늘 등장하는 '배경 속의 관찰자'를 확인하면서 비현실적인 원근감과 관객들의 자각(저 관찰자의 자리가 그림을 보는 관람객의 자리다)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인상주의 화가이면서 동시에 지독히 도시를 사랑했던 한 낭만주의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시절의 호기롭던 파리도 함께요. 저는 이런 '뉘앙스'야말로 드가를 말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참 좋은 건, 이 모든 설명이 원본과 함께 등장하는 확대 그림을 통해 친절히 부분별로 설명이 된다는 거죠)
물론 이 책은 내내 이렇습니다.
2. 만족스러운 퀄리티의 인쇄
비록 10여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와서는 다소 촌스러운 명조체가 신선(?)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컬러가 좋으니까요. 이 책의 컬러 인쇄는 현재 출간되는 책들에 비추어도 상당한 수준이며 (겨우 10년이 지난 지금) 세월의 흐름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특히 4도 인쇄의 최대 난관이라 할 수 있는 검은색 묘사에 있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종이가 잉크를 받아내지 못해 번들거리는 검은색, 조명의 위치에 따라 역전(negative) 현상을 보이는 암부, 원본 소스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색 왜곡, 출판사의 의도적인 콘트라스트 강화 등은 이 책에서는 거의 만나실 수 없습니다. 색은 차분한 편이며, 색 균형도 준수합니다. 미술사는 뭐니뭐니해도 그림 보는 맛이 좋아야죠. ^^
p.s: 물론.. 수입산 화보와 비교하기는 약간 무립니다. 황색이나 녹색이 도는 경우도 종종(빈도는 매우 낮지만) 있고요. 그 정도는 감안해 주시길. ^^;
대세는 '네 마음대로'
A. 우선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입니다. 조윤범 씨의 입담은 유명하죠. 곡을 해설하는 센스도 좋고, 재미있는 비유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책의 포지션이 약간 애매한 것은 아닌가, 즉 완전 초보용도, 매니아들을 위한 책도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그게 이 책만의 매력이죠. 이 책의 목적은 어쩌면 완전 초보의 입문 단계를 지나면서 클래식 팬들이 겪게 되는 이런저런 고민들에 대한 멘토링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고정관념에 빠지지 말고 그대로 즐길 것, 남들의 말은 참고로만 듣고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을 것.
천재 작곡가들의 에피소드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특별히 파격적인 전개는 아닙니다. 코른골트 같은 근/현대 작곡가들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죠.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재기넘치는 입담과 패기입니다. 마음껏 온 몸으로 내 맘대로 즐기는 음악이 클래식일 거라고 강변하는 조윤범 씨 그 자신이 이 책에서 제일가는 미덕이지요. 바야흐로 강마에의 시대니까요.
B. <네 멋대로 찍어라>는 제목부터 느낌이 옵니다. 장비에 구애받지 말 것(이 책의 추천 카메라 목록에는 DSLR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말 것, 충고와 조언은 충고와 조언 수준으로만 담아둘 것. 마치 <월든>의 유명한 문구, 자기 마음 속의 북소리에 맞추어 걸어가라는 문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사진 초심자들이 명심해야 할 거의 유일한 덕목이죠. 실패도 괜찮으니까 멋대로 찍으라는 것 말입니다.
사진계의 매우 유명한 석학이나 학식으로 명망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선희 씨의 이 책은 중수 이상의 아마추어쯤 되는 분들은 별로 땡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안에 별 게 있겠나 싶을 수도 있겠고요. 물론 조선희 씨는 수잔 손탁이나 존 버거나 필립 퍼키스와 같은 인물은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다고 고백할께요. 그렇지만 의외로 간단한 사진의 핵심이 거기 있었고, 그 미덕을 수없이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 가치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사진을 시작하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이 책을 잡겠지만, 결국엔 누가 봐도 괜찮습니다. 가끔 잊어버릴 법한 진리를 끝없이 되새겨주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니까요.
-화제, 클래식 바이러스
클래식 음악이 이렇게 뜰 수도 있을까요!!! 베토벤 바이러스가 대세입니다. 클래식 팬으로써 마냥 반갑습니다.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니까요. 좋은 게 좋은 거지요. ^^ 보시다시피 클래식 관련 책들도 예년에 비해 잘 나옵니다. 이전 글의 두 권에 이어 이번에도 또 소개드리게 되어 기쁘네요.
우선 눈에 띄는 책은 <음악가의 탄생>입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음악에 종사하는 직업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변모했는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음악 사회학 책인데요,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현재 클래식 음악의 대세인 원전연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시라면 작곡 당시의 사회상에도 관심이 많으시리라 생각되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 쓴 좋은 책이 (뒤늦게나마) 나온 것이죠.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키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보다 높일 수 있는, 드문, 좋은 기회입니다. <음악학> 역시 주목할만한 책이죠. 사람을 느끼고 세상을 듣는이라는 부제에 걸맞습니다. 화성 분석이나 존재론적인 탐구와 같은 어려운 주제가 아니더라도 음악학이 충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기회이기도 하죠. 입문서 수준의 쉬운 책은 아닙니다만, 기초적인 인문 지식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음악과 세계화에 대한 부분에서는 최근의 화제적 괴작 <굿바이 클래식>에 대한 우아한 대답이 될 수 있겠네요. 참고도서로 추천해 드립니다.
이번에는 연주가들입니다. 현재 BPO의 상임인 사이먼 푸들래틀 경과 피아니스트 랑랑이네요. 래틀의 경우에는 대담집 형식으로 구성되어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지휘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두드러집니다. 곡에 대한 느낌, 지휘의 포인트, 음반 판매고의 딜레마, 콘서트 프로그램을 짜는 과정 등등 '지휘자'의 삶에 대한 수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BPO의 팬, 혹은 래틀의 팬, 혹은 지휘와 음악에 대해 월드클래스 지휘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은 분께 추천해 드립니다. 대담집이지만 가독성도 좋은 편입니다.<랑랑>은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의 성장기인데요, 꼭 영화 같습니다. 하긴 모든 천재들의 이야기는 다 드라마틱하죠. 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 왜 녹음 연주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얘기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건 기대하지 마시구요.
다른 건축을 기대한다
정기용 선생님의 새 책입니다. 등나무 그늘로 가득찬 공설 운동장이라는 놀라운(?) 아이디어로 매스컴을 장식하기도 했던, 바로 그 '무주 프로젝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죠. 건축이 인간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단순 명확한 진리를 지키고자 노력한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실제로 무주 주민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어서, 주민들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이 필요했는가를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건축이야말로 공학과 예술과 인류애가 만나야 하는 인간 정신 발현의 최전선이다! 라고 누가 말하더라도 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꽤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결코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 즉, 좋은 책이라는 얘깁니다.
아참, 근래 주목할만한 건축 책은 더 있죠. 세 권 나갑니다.
<딸과 떠나는 국보 건축 기행>은 그야말로 신나는 책입니다. 말빨이 대단하세요! 남대문이 불탄 걸 보고 '남은 국보들도 불타기 전에 얼른 구경하러 다녀오자'라는 얘기부터가, 눙치는 맛이 일품입니다. 딸과 아버지가 여행을 다니며 건축 국보를 답사하는 테마도 좋거니와, 말빨이 살아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건축 전공자이자 나름 다작(!)한 이용재 씨의 내공도 물이 올랐네요. 이 책을 읽은 분들은 어디 놀러가서 '이게 이래서 좋은 건물이야'라고 자랑하실 수 있습니다. 농담이 절반이나 섞여 있어서 마치 자기 것처럼 얘기할 수도 있어요! -_-;;; 다른 건축은 아니고, 다른 건축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저자의 책이 두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소신있는 건축학자로 알려진 임석제 씨입니다. <교양으로 읽는 건축>의 경우에는 대학 교양 수준의 입문서로써, 건축이 인간 및 환경과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 경제와 건축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 자본친화적 건축이 가져 온 여러 폐해 등등, 내실 있는 분석이 뒤따릅니다. <역사, 기술, 인간>은 북하우스에서 근성으로 발간하고 있는 서양 건축사 시리즈의 제 5권이죠. 저자가 직접 촬영한 유럽의 유명 건축물들과 그 도면, 각종 양식의 분석과 설계의 비결을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5권에서는 18~19세기의 건축물들을 따라가며, 특히 이 시대가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대단히 중요한 한 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안돼, 아직 소개할 책이 많은데..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에드바르 뭉크>입니다. 정말 갓 나온 신간이라 오자마자 허겁지겁 읽어 보았는데요. 을유 예술의 거장 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책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전기물의 기본을 지키는 무덤덤한 서술이 뭉크의 어두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뭉크도 뭉크려니와, 이런 느낌이 바로 전기물의 맛이죠.
한길사의 <성서 미술을 만나다>입니다. 미술작품을 통해 성서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들은 많습니다만, 주로 입문의 관점에서 그린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본격적인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어서 흥미진진합니다. 표지에도 나와 있는 파울 클레를 비롯, 몬드리안이나 그 이후 현대 미술의 성서적 측면까지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강력 추천.
휴머니스트의 <시각문화교육 관점에서 쓴 미술교과서>입니다. 이게 진짜 대안 교과서죠. 행동하는 미술교육의 사례를 밝히고 있는데, 대가들의 걸작보다 동시대 또래들의 결과물이 가득 들어 있다는 점은 상당한 '학습적' 효과가 있을 걸로 생각됩니다. 유효!
시공사로부터 날아온 사진 에세이. <탈북자,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스케치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 종종 범상치 않은 사진과 맞딱드릴 수 있습니다.
-안녕히, 혹은 기습 사설
<명랑한 고통> by 홍인숙
-대미;; 를 장식하는 책이네요. 국내 작가의 작품집이 단행본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참 드물고, 그 퀄리티가 일정 이상인 경우는 더더욱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저는 키치류의 감수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그렇지만 이 책을 2주간 나온 수많은 예술 책 가운데 주목할만한 한 권으로 꼽으렵니다.
예술가들에게 '깊이에의 강요'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냅다 싸질러놓고 텍스트를 거기에 짜맞추는 식의 예술 작업은 이제 좀 그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세계를 불러 와서 수습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기가 안쓰럽고요. 프리스타일이라고 하면서 어디서 많이 본(이 경우 특히 일본꺼) 것들을 갖다놓는 것도 더 안 봤으면 해요. 차라리 다 깨놓고 맘대로 하는 걸 봤으면 좋겠습니다. (과정이든 결과든) 즐기거나 무너지거나, 결국 이 둘 사이에서 결판이 나는 게 아닐까요. 예술 작업이라는 것이요.
보드리야르의 사진전이 그의 책만큼 와닿지 않는 이유는 책만큼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하던 얘기를 사진으로 그냥 다시 만났죠. 설마 일부러 예술을 철학 개념의 하위에 두려고 계획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냥저냥 심심한 복제품을 구경한 기분이었으니까요. 이것도 '무너진 작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명랑한 고통>은 괜찮습니다. 어린 시절의 낙서같은 인물화가 나오다가, 어느새 동양화가 그 안에 편입되고 한시가 편입됩니다. 어린애가 쓴 듯 삐뚤빼뚤한 한시가 여자아이 전용의 공주님 그림체와 동화하고, 정밀하게 묘사된 산수화가 애들 수준(?)의 그림 속에서 오브제가 되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성인과 유아의 경계, 고전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생겨나는 독특한 느낌은 꽤 맛이 좋아요. 간만에 작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반짝반짝하면서 '작품집'을 봤습니다. 재밌었어요. 그러니까 추천.
좀 뜬금없지만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