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이어 계속 가겠습니다. 근데 지난번에 다 하고 지나갔어야 할 분야 얘기도 좀 해요. ㅎ
히치콕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은 최근 그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는 평론가 이상용의 영화 이야기입니다. 개별 영화에 대한 평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 미학에 대한 이론/비평서는 더더욱 아니죠. 그래서 짚고 넘어갈 필요를 강렬히 느꼈습니다 네.
목차를 볼까요. 거짓말, 웃음, 환상, 시간, 역사... 영화를 이야기할 때 필요한 요건들이죠. 영화에 사용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각각의 주제에 대해 이 책은 천천히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갑니다. 반가운 점은 이 책이 분명한 '대중' 교양서라는 점입니다. 영화의 주제와 메커니즘 모두를 다루면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광범위한 이야기지만, 다행스럽게도 들뢰즈나 라깡, 보드리야르 등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해체이론도 없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몽타주 이론의 관계 등도 나오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영화의 구성물들을 평이한 문체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가는 책을 만난다는 건 드문 일이고, 그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에 대한 여러 책들이 나왔지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총체적으로 짚어보면서도 그 난이도를 대폭 낮췄다는 측면에서 환영할만한 책이네요. 총론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으로 빠지기 쉬운 세계잖아요. 비록 총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대신에 영화 에세이 모음집이라는 구심점 없는 구성이 되었다거나, 새로운 성찰이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거나, 쉽다고 소개했지만 여전히 좀 매니악한 영화들과 함께 '약간의'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긴 하지만, 이 책의 목적 혹은 성과에 비해서는 참 억지로 뽑아낸 정도의 단점(?)입니다. 모든 괜찮은 교양서들은 이런 운명을 타고나는가봐요. 위에서는 먹을 게 없다고, 아래에서는 먹기 힘들다고 말이죠. <난이도: 중하, 영화를 좀 더 알고 싶은 초심자 막무가내 영화 팬, 혹은 영화잡지에 질려 괜찮은 칼럼집을 찾아다니던 중급 이상의 영화팬들께>
p.s: 쉽고 친절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조금은 조심하셔야 됩니다. 정말로 영화 <카운터페이터>를 홀로코스트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시죠? -_-;; 아, 하나 더. 이 책 속에는 소설 <장미의 이름>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몇몇 작품의 소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괜히 후회하시지는 마세요...
-사진-
<청춘을 찍는 뉴요커>는 좀 특이합니다. 물론 이 책 역시 우리나라의 사진 에세이들의 고질적인 단점, 즉 글이 사진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죠. 원래 저는 거기까지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글 씀씀이의 부족함이 준수한 감각의 사진과 대비되는 느낌이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살아있는 패션사진가 지망생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더군요. 동시대의 소년소녀들과 별다를 바 없는 싸이월드 풍의 글을 써내는 그녀가,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유명한 사진가의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 발랄하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소녀가 뿜어내는 감각적인 사진의 언밸런스야말로 지금을 살아가는 소년소녀들에게 주어질 뜨거운 청량제가 아닌가 싶어요. 사진 퀄리티는 왠만한 아마추어들보다 확실히 위에 있으며, 필름의 흔적이 느껴지는 색감도 반갑습니다. 물론 뉴욕의 귀여운 소녀들을 보는 재미도 좋았습니다만...(흠) <난이도: 하, 패션/스냅사진 계열에 관심있는 분, 혹은 아직 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청소년들께>
<사진의 하루>는 바로 위에서 '아마추어들'이라고 폄하된(!) 46인의 블로거들의 사진을 모아 놓았습니다. 하나로 모을 수 없는 스타일이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어요. 다소 추상적인 텍스트나 들쑥날쑥한 사진의 완성도(이는 곧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괜찮은 사진들이 들어있다는 얘기기도 합니다)가 신경쓰이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사진에 관한 여러가지 힌트나 영감을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매우 잘 추려진 사례집으로 추천될 수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면, 아마추어 사진가 여러분, 한 번에 너무 멀리 가려고 하시면 안됩니다. 다른 분야의 아마추어에 비해 사진가들이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사진가 각각의 시각적/메타포적인 발전 역시 갑자기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글렌 굴드를 금방 따라하려 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는 없지만, 브레송을 금방 따라잡으려는 아마추어 사진가는 즐비합니다... <난이도: 하, 자신의 사진을 여러모로 비교하고 연구해보고 싶은 아마추어 사진가들께>
<시선 1980>은 현재 한국 사진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구본창의 80년대 스냅 사진 모음입니다. 이 시절에 찍었던 사진으로 이미 작업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만('긴 오후의 미행'같은), 이번에는 미발표 사진들까지 이합집산해서 새로 나왔습니다. 이번에 선택된 사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요, 개발과 전통이 혼재된 80년대 한국의 아이러니한 풍경, 혹은 전통적인 사진미학에 비추어 '웰메이드된' 사진들입니다. 물론 둘 다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구요. 유럽에서 공부한 구본창의 스냅사진이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느낌을 풍기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입니다.
풍크툼(푼크툼)을 돌파하는 사진이라는 본문 해설의 격찬은 멋적은 감이 있지만, 확실히 사진을 공부했다는 느낌이 드는 잘 정리된 컷들이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사진으로 보면 영 평범해 보이지만, 사진집이라는 맥락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구요. 사진을 배우려 하는 분께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사실 동시대를 지내오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에서 80년대 한국의 푼크툼은 커녕 '스투디움'을 잡아내기조차 쉽지 않겠습니다(그런 면에서 로버트 프랭크는 '위대'합니다). 다만 하나의 주제를 사진을 통해 어떻게 소화하는가, 또한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대해 배울 만한 선례로는 충분히 '유효'합니다. <난이도: 중상, 이제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느끼는 아마추어 사진가들께>
-디자인 외..-
<디자인의 꼴>은 매우 쉬워요. 자동차, 라이터, 병 등 생활 속의 사물들의 변천사를 간단히 훑어가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살펴봅니다. 말하자면 스타벅스에서 읽기 좋은(..) 본격 고급 타임킬링 북 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골때리는 면도 있는데, 소개하는 사물들 중에 UFO도 나옵니다...... 좀 더 이쪽으로 파고들었으면 디자인의 인류학적 변용에 대한 흥미로운 논고가 될 수 있었을 듯해서 아쉽네요. 이 출판사의 차기작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외계인을 위한 지구 가이드 라고 합니다. 아니면 그 비슷한 거라고 하네요. 아참, 디자인하우스 출판사는 정상적인 곳입니다. 오해마시길. <난이도: 하, 고급 타임 킬링 책을 찾고 있는 분들, 혹은 디자인이 뭔가 싶어서 첫걸음을 내딛는 완전 초심자들께>
<최범석의 아이디어>는 보다 본격적으로 디자인 얘기에 나섭니다. 반쯤은 에세이 같은 느낌도 나는데, 책의 접근성을 높이려면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합니다. 발상과 그 발상의 현실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기에도 적당한 방식이고요. 디자이너로서의 태도와 직업적 환경에 대한 조언을 무난하게 풀어갑니다. 재미있는 발상의 디자인 컷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실용서와 디자인 철학에 대한 이론서가 양분한 가운데, 잘 짜여진 '디자이너의 인생' 이야기가 나와 반갑습니다. <난이도 하, 디자인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분들, 특히 지망생들께>
<음악 듣기와 쓰기>는 국내 최초의 청음-채보 전문서적이라는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전공자는 당연히 귀가 솔깃하실텐데, 음악을 그냥 좋아하는 분들도 관심을 가져 주세요. 특히 푸가나 대위법을 사용하는 클래식 음악은 악보를 이해하고 각 주제의 진행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굉장한 업그레이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물론 재즈나 락도 마찬가지죠. 코드 진행의 마술을 이해하는 순간 음악의 '완성도'가 눈에 들어오게 되니까요. 굳이 이론적으로 달려들지 않더라도 청음 자체가 가져다주는 '이해'의 즐거움은 대단합니다. 물론 어렵고, 저같은 단순한 팬에게는 구만리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도전해 볼 요량입니다. 여러분도 도전해 보세요. <난이도: 상(실제로 익히기가 쉽지 않음),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일단 추천합니다>
<그림책은 재미있다>는 그림책 작법입니다. 그림 연출이 이야기 진행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교육서죠. 캐릭터의 성격 묘사와 스토리의 진행을 표현하는 데 있어 글과 그림이 어느 정도에서 역할을 나누고 분담을 해야 할지에 대해 원론적인 수준의 조언들이 가득합니다. 원론적인 조언이라는 것에 대해 실망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국산이든 외산이든 간에 이 원론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책들이 양산되는 걸 보고 있으면(저도 한때 유아MD..) 이런 책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짧고, 쉽고, 중요한 조언들입니다. <난이도: 하, 그림책 작가 지망생 전원, 그리고 보다 좋은 그림책을 골라보고픈 부모님들께>
마무리는 신명나게 가죠. ^^ 출간 종수로 따지면, 드물다고 하면 제일 드문, 풍물굿의 미학입니다. 어줍잖게 풍물을 만졌던 저로써는 반갑기 그지없었는데요, 책 내용도 맛깔납니다. 요즘 대세인 클래식풍으로 말하자면 '콘체르트마스터'인 상쇠 이야기죠. 상쇠가 풍물굿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전통을 쫓아가는 내용까지는 뭐 그러려니 싶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풍물이 이 세계의 긍정을 반영하는 신명나는 굿판이며, 우리네 전통이 가졌던 미덕을 죄다 함유하고 있는 표현예술이라는 점에 다다르면 뿌듯해지기도 하고요. 잠시 잊고 지냈던 풍물의 뜻을 되새기니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풍물이란,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갑자기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평화와 번영과 공존과 신명과 노동의 즐거움을 한데 집약한 예술에 대해, 열렬히 그리고 열심히 써내린 글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복합니다.
그럼 또 다음에 언제 뵙겠습니다. 좋은 책으로 인해 조금 더 행복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