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책의 810페이지, R.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을 소개하는 글 중 일부입니다. 작곡가가 직접 악보와 함께 인용해 놓았다는 괴테의 싯구라지요. 저는 이 난해하고 음울한 작품에 대해 이토록 알맞은 소개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드레스덴 대폭격이 남긴 참사에 대한 파괴적 추모곡인 <메타모르포젠>의 파괴적/혼란적 측면은 어디서 오는가, 이 책은 작곡가의 인용구를 실음으로써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심지어 그의 세계관이 이후의 20세기 음악과 어떻게 이어지는가의 단초까지 제공하고 있죠. 이 책,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은 그 삐까번쩍한 이름과는 달리, 볼수록 깊고 특이하고 인상깊은 책입니다.

이상한 책, 색다른 음악 가이드이자 동시에 색다른 서양 음악사

그렇습니다. 1001곡에 달하는 클래식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책인 동시에 서양 음악사의 흐름을 잡아내는 게 가능한 책입니다. 기존의 책들처럼 단순히 색인별이나 작곡자별 소개가 아니라, 개별 곡들의 발표 연대순을 통해 정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성은 음악사의 보다 세밀한 흐름을 잡아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작곡가들이 다른 작곡가와, 혹은 당시의 세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여기 소개된 곡들의 음악을 실제로 들으면서 독파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야말로 서양 음악사의 궤적을 따라 걸어가는 경험이 될 겁니다.

이는 또한 중요한 유연함, 즉 작곡가 별로 취향이 굳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유연함을 제공합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베토벤의 각 교향곡 사이에 등장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 도전할 수 있으며, 모짜르트로 도배된 시대에 굳건히 껴 있는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에 궁금증을 가지게 될 겁니다.

 가이드북은 무덤덤하다, 그러나 역사 역시 그렇다

그래서 때로 묘한 상황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짜르트가 그렇지요. 그의 시대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 거의 다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지면은 그의 <레퀴엠>을 마지막으로 하이든의 곡들로, 그리고 거대한 신예 베토벤의 것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모짜르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음악 가이드 북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가이드 북'을 기본으로 하는 이 책의 무덤덤함은, 역사와 시간의 특징을 거의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시대는 끝없이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는 데 바쁘니까요. 모짜르트는 음악만을 남기고 그렇게 스러진 것이지요. 다만 중요 곡마다 들어있는 인용구가 <레퀴엠>을 쓰던 모짜르트의 마지막을 비춰주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이 레퀴엠은 나를 위해 쓰고 있다고..."    - 죽기 전 병중의 모짜르트 (p.186 중에서)

 업데이트 컴플리트 and 특전!

그런데 사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게 제일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측 이야기로는 이 책의 원서가 매년, 혹은 격년 간격으로 업데이트 될 것이며, 그렇게 개정된 원서를 속속 한글 개정판으로도 내겠다는 것이죠. 언제 구입하든, 가능한 최신의 음반 데이터가 녹아있을 거라는 얘깁니다. 펭귄 가이드를 부러워할 이유는 점점 줄어듭니다.

(사실 <죽기 전..> 시리즈는 개정판을 통해 조금씩 수정한 버전들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만 예외는 아니겠지요. ㅎ)

아참, 혹시나 저작권에 걸릴까 싶어서 사진은 못 올리지만, 멋진 풀 페이지 사진들도 시원시원하고 좋습니다. 턱의 땀을 닦는 미켈란젤리의 무표정한 흑백사진은 '바로 저게 저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한 컷. 멋져요!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책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양장본이라면 꼭 해 주었으면 하는 사철 제본 대신에 접착식 제본을 선택했다거나, 음악가들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옮긴 사례가 보인다거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요 곡들의 '차선 추천' 음반들이 (짧긴 하지만) 죄다 영어로 소개가 돼 있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누가 제게 '그렇다면 소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에 손을 번쩍 들겠습니다. 하긴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군요.;;

애호가로서 놓치기 싫은 책이 나온 셈입니다. 혹시 고민만 깊어지는 분이 계시다면, 망설이지 말기를 권해 드립니다. ^^ 아참, 혹시 가이드북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는 분이 계시죠? 제가 왈가왈부 하는 대신에, 첼로계의 철학자 스티븐 이설리스의 서문 일부를 옮기며 이만 물러납지요.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을 통해 많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 예를 들어 글리에르의 교향곡 제3번이나 플로렌트 슈미트의 <살로메>같은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사람마다 좋아하는 곡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왜 이 작품을 실었어? 하필이면 왜 이 공연이야?'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또는 갑론을박을 하던 중에 우정이 돈독해지거나 흔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 스티븐 이설리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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