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주미힌 > 새로운 파시즘 - 김규항

새로운 파시즘
 
 
“모든 인간적 관계를 상업적 관계로 바꾸어 버린”이라는 말이 알듯 모를듯하다는 독자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쓴 글.

자본주의가 끔찍한 체제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인간적 관계를 상업적 관계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아이들이 밥을 함부로 남기면 “고생한 농부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적 관계지요. 다른 이의 노동이 나를 위하고 내 노동이 다른 이들을 위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선 그게 바뀌죠. 아이들이 이렇게 반문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농부들은 자기 돈 벌려고 하는 거잖아.” 이게 바로 상업적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거대한 기계속의 부품이죠. 모든 노동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일 뿐 아무런 자부나 보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게 자본주의인데, 기억할 건 자본주의라고 늘 같았던 건 아닙니다. 초기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유방임’이었지만 노동자들이 그 야만성에 반발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고 자본주의체제가 자기 위기에 빠지면서 1930년 즈음부터는 일정하게 보완된 자본주의(수정자본주의, 케인즈주의라고도 하는)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무렵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위기를 맞게 되자 자본주의는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초기자본주의의 모습(보완이나 수정이 없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으로 회귀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새로운 자유주의, 두 번째 자유주의라는 말이지요. 신자유주의라는 말엔 세계화라는 말이 꼭 붙어다니는데, 신자유주의가 초국적금융독점자본(전지구를 상대로 하는 투기자본)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참 어이없게도 오랜 싸움으로 이룬 민주화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귀결되어버립니다. 한국인들은 수십년 동안 파시즘만 물리치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서 새로운 파시즘, 더 무서운 자본의 파시즘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80년대의 좌파들은 동구사회주의의 몰락과 제 관념성으로 지리멸렬하던 상태구요. 그래서 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아무런 제한 없이 신자유주의로 달리게 되는 거죠. 민주화와 개혁은 서글프게도 곧 자본화, 신자유주의화였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화로 인한 문제들은 흔히 말하는 사회복지와 경제적 공공성의 후퇴, 투기자본화로 인한 경기침체, 노동자 계급의 약화 등이 있지만 더 심각한 건 개개 사회성원들의 인격의 변화, 정신의 변화입니다. 인간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돈을 신처럼 모시는 인간이야 어느 시대나 늘 있기 마련이지만 모든 사회성원이 그렇게 된다면 그 사회는 끝장인 것이죠. 그런데 9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딱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신자유주의가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한국에선 유일한 살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건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등 개혁우파들의 공로입니다. 다들 인심이 각박해졌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들 하지요. 갈수록 민주화하고 개혁하는데 왜 그럴까요? 바로 자본화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적 관계가 상업적 관계로 변하니 각박해지는 건 당연한 것이지요. 아이들을 인간으로 키우는 걸 포기하고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키우기 위해 혈안인 판에 무슨 놈의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군사 파시즘이나 그 잔재들(수구세력이라 불리는)이 아닙니다. 개혁우파들은 여전히 조선일보나 박근혜 따위 파시스트의 잔재들을 가리키면서 금세라도 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처럼 요란을 떨어대지만(탄핵사태 때 유시민 씨의 발광 연기 기억하시죠?) 그건 그저 군사파시즘의 자리를 자본에게 넘겨주는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려는 수작입니다. 물론 다음 대선에서 파시스트의 잔재들 중 하나가 당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한국사회가 87년 이전으로 회귀하는 건 아닙니다. 한국 사회가 87년 이전의 사회로 회귀하려면 87년 이전 수준의 한국인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젠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박근혜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현재의 정치, 경제정책의 기조는 크게 달라질 게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민주화세력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동성을 대중들에게 부각시키기엔 좋은 점도 있지요. 거듭 말하지만, 지금 우리의 적은 군사파시즘이나 그 잔재들이 아니라 새로운 파시즘, 자본의 파시즘입니다. 개혁정권과 개혁우파 세력은 새로운 파시즘의 하수인들입니다. 새로운 파시즘은 우리를 고문하지도 잡아가두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에 스며들어, 우리를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스스로 꿇게 합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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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張 第十九

此篇皆1)記弟子之言. 而子夏爲多2), 子貢次之3). 蓋孔門自顔子以下, 穎悟莫若子貢4), 自曾子以下, 篤實無若子夏. 故特記之詳焉5). 凡二十五章.


번역 - 이 편에는 모두 제자들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자하(의 말)이 가장 많고 그다음은 자공(의 말)이다. 대체로 공자의 문하에서 안자이래로 총명하기가 자공만한 이가 없고, 증자이래로 독실하기가 자하만한 이가 없다. 그래서 특별히 (그들에 대하여) 기록함이 상세한 것이다. 모두 25장이다.

1) )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皆의 번역이다. 皆는 부사로서 동사인 記앞에 위치하였지만, 우리말로는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겠다. <이 편에 기록한 것은 모두 제자들의 말이다>라고.

2) 而은 허사이니 별로 신경쓸게 없고 '子夏爲多'가 문제인데 이것을 '以子夏爲多'로 보면 무난하리라고 본다. 한문에서 以~爲 용법은 以나 爲가 생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하은 子夏之言을 말한다고 보아 직역하면 좀 어색하지만 <자하의 말을 많음으로 삼았다>이다. 다시 多를 술어처럼 보아 번역하면 <자하의 말이 많다>이다.

3) '子貢'는 마찬가지로 子貢之言일 것이고 次之에서 之는 子夏(之言)으로 보면 된다. 또한 次가 동사로 '잇다'라는 의미이므로 번역하면 <자공의 말이 자하의 말을 잇는다>. 다시 말해 다음으로 많다는 말이다.

4) 穎悟에서 穎(영)은 '밝다'란 말이니 穎悟는 총명하다라고 보면 되겠다.

5) 故特記之詳焉에서 之는 인칭대사로 자하와 자공(의 말)을 받는다고 보면 무난하다.

19-01-1 子張曰: 士見危致命1),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2).


번역 - 자장이 말하기를, 선비는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생각하고, 상사에는 슬픔을 생각한다면 可히 선비라 할만하다.

1) 논어주소에는 士見(君有)危致命로 보아 '선비는 임금이 위란을 만나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다해 그를 구한다'라고 풀고 있다. 참고할 만하다.

2) 其可已矣에서 '可'는 논어주소에서는 조동사로 뒤에 본동사와 목적어가 생략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其可(以爲士)已矣로 보아 <선비라고 여길 수 있다>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集註 - 致命, 謂委致其命, 猶言授命也. 四者立身之大節, 一有不至, 則餘無足觀. 故言士能如此, 則庶乎1)其可矣.

집주 번역 - 致命이란 그의 목숨을 바친다는 말로 授命과 같은 말이다. 이 4가지는 몸을 세우는 大節(번역하기가 뭐하네요)이니 하나라도 이르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 나머지는 볼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선비가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거의 선비라 할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1) 김원중이 편저한 허사사전에는 庶乎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부사로서 추측의 어기를 나타내고, 통상 동사의 앞에 쓰이며 '대개','어쩌면'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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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식민지 / 삼인 / 2001

 

 

 

 

2001년에 밑줄을 하나 하나 그어가며 완독한 책이다.  다시 읽어 본다. 미국을 더 알고 싶다.

20060210 : 이제 겨우 반 정도 읽고 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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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설 연휴가 끼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끔씩 하는 생각이지만, 거의 하루에 한 번씩 리뷰를 쓰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거의 유일한 휴식시간인 출퇴근 시간을 다 잡아 먹어도 이렇게 진도가 느린데... 하지만, 박노자의 글은 그런대로 잘 읽힌다.  하지만 아직도 <우승 열패의 신화>는 읽지 못하고 있다.  에이 가장 비싼 돈을 주고 산 책인데.

늘 느끼는 것이지만 박노자가 하얀 피부를 가진 한국인이기에 우리가 체화되어 전혀 문제로 삼지 않는 부분에 아프리만큼 예리하게 파고든다.  아무래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하고 느끼는 것은 '골수' 한국인보다는 장점이 있으리라.

이를테면, 친일파에 대한 청산문제에 대해서 박노자는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가 식민지 백성이 아닌 일본식 부국강병의 노선으로 질주하고 있는 '친 일본적인 개도국 대한민국'의 군인 신분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다면, 그가 과연 1930~40년대 일본식 파시즘을 덜 철저하게 배워 조금더 민주적이고 인권적인 인물이 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제시하고는 곧장 그와 같은 경우의 장개석(蔣介石 - 이 책에서는 장제스라고 표기한다. 여기서 나는 주제와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과연 우리는 기를 쓰고 장개석을 장제스라고 표기하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재미있는 일이지만, 만약 어떤 한국 사람의 이름이 김한국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는 중국인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워 찌아오 진한구어(我叫金韓國)"라고 할 것이다. 당연히 이 중국인은 김한국이 아닌 진한구어라고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며 향후 그를 부를 때 진시엔셩(金先生)이라고 부를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김상이라고 하지 않고 긴상이라고 한다.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기를 쓰고 원음을 중요시하여 그대로 발음 못해서 안달이고, 다른 나라의 인간들은 전혀 한국어로 뭐라고 읽히던 상관없이 자기식대로 읽고 그걸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고...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또오 히로부미보다는 이등박문으로 쓰는 게 낫다고 본다. 괄호로 한자를 병기하면 더욱 더 좋을 것이고. 어차피 학문적으로나 다른 이유에서 원어로 발음한 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고 빌어도 다 알고 쓴다. 굳이 엉성한 표기로 원어민이 들어도 전혀 못 알아 듣고 외우기도 힘든 원음 표기를 고집해야 할 것인가? 한류가 한창 난리일 때 그 선봉에 있던 안재욱도 중국에서는 아무도 안재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안짜이위"-아마도- 라고 부른다.  그래도 안재욱은 그게 자기인 줄 안다. 아 답답하다. ) 을 예로 들며 굳이 정치적으로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일본식 권위주의적 리더가 얼마든지 될 수 있다며, 같은 지역 안에서 일본보다 더 후발 주자였던 한국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구한말 근대 지향적 개화파의 성향으로 봐서는 일본적 '압축적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길을 배워서 따랐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친일파가 보여준 폭력성이나 전근대성은 어차피 나타났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친일이 아닌 지배계급 그자체와 조선에서의 종속적 형태든 일본에서의 패권적 형태든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친일 청산과정에서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흘러갈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한다.

저번에 우연히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 우리집은 오로지 공중파만 나온다 - 우연히 EBS에서 박노자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리 유창한 발음은 아니지만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말에도 노리가 정연한 게 '정말 이 사람은 천재로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승호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대로 박노자는 별 취미도 없이 연구하고 글 쓰고 강연하는 것만 한다고 한다.  지승호의 말대로 한국인 중에서 -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중이 아닌 - 가장 공부를 많이 하는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천재적인 머리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근면성을 갖추었으니 박노자의 그런 부분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박노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강의에 참석하고 싶었는데 번번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언젠가는 다시 한국에 와서 강의를 하면 - 그러기 위해서는 '수유+너머'의 홈피를 자주 기웃거리는 정도의 노력은 해야겠지만 - 꼭 한 번 듣고 싶다.  박노자에게는 이상하리만큼의 사람의 냄새가 난다.  그래서 난 그가 좋은 가 보다.

그 밖에도 병영 내의 폭력, 이주 노동자, 민족주의, 북한, 진보주의  대한 그 나름의 혜안으로 진단한다.  박노자를 읽으면서 나도 나름의 정리를 하게 된다.  이 놈의 세상에선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여기 저기에서 무방비 상태로 세뇌를 당하게 된다.  '차리고 있기 위해서'는 이런 책은 아주 도움이 된다.  두 말이 필요없다.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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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시비돌이 > (펌) 어느 여대생의 프로포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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