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황진이' 150번 고쳐 썼다">
[연합뉴스 2006-02-23 11:13]
北작가 홍석중

작가 홍석중이 말하는 창작 '비화'

(서울=연합뉴스) 조계창 기자 = "도입 부분을 쓰는 데만 150번을 고쳐 썼던 것 같아…."

소설가 황석영이 `우리 문학의 승리'로까지 극찬했던 북한 소설 `황진이'의 작가 홍석중(65)이 작품 탄생까지의 비화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조국' 3월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전 소설의 첫머리를 뗄 때가 제일 힘이 듭니다. 공포감이 든다고 해야 할지…, 황진이를 쓸 때는 150번은 고쳐 썼던 것 같다"고 창작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탁월한 문장가답게 소설의 첫머리를 떼기까지의 심경을 "모내기 때 논에 들어서는 심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으쓱한 날씨에 찬물에 발을 담그는 게 끔찍해서 논두렁만 왔다갔다하는 심경 그대로지요"라고 묘사했다.

그는 왜 북한에서는 봉건제도의 산물로 여기던 기생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게 됐을까.

이에 대해 홍석중은 "저는 작품에서 기생과 종, 천민들의 사랑 문제를 놓고 비인간적인 지배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진정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전까지 황진이를 주인공을 내세웠던 소설들이 화담 서경덕(1489-1546)과 관계나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한 지족선사와 관계에 초점을 맞췄던 것과는 다른 접근 방법이었다.

그는 "독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오늘을 보게 하고 인간 자체의 운명을 놓고 돌이켜 보게 하는 것이 역사소설의 임무"라고 설명했다. 이런 그의 문학관이 소설에서 `인간적인 지배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드러난 셈이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1888-1968) 선생의 손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문학 입문 배경을 할아버지와 연계시키는 시각에 대해 에둘러 반감을 나타냈다.

"우리 할아버지한테 아들은 둘이었지만 삼촌이나 우리 아버지가 각 7남매들 두었으니 손자만도 얼마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그 중에서 저는 별로 할아버지의 안중에도 들지 못하는 손자였지요"

오히려 그는 25년 창립된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멤버로 활동했고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사회과학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역임한 아버지 홍기문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역사소설 창작을 시작한 계기는 박태원 선생이 지은 `갑오농민전쟁'을 읽은 김일성 주석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이 적냐"는 탄식을 전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준비 중인 작품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 민족의 정통성 문제를 다룬 작품을 하나 생각하고 있는 데 눈이 올 때쯤 해서 시작해볼까 합니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가 이뤄진 시점이 작년 10월21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으쓱한 날씨에 논에 발을 담그는 끔찍한 고통'을 지나 지금쯤 한창 새 작품 창작에 몰두해 있지 않을까?

phillif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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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급진적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 성공회대학교 NGO총서 9
조희연 지음 / 아르케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달은 진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밥벌이의 어려움이란 이렇듯 가끔씩 광풍처럼 몰아치는 일들을 허겁지겁 해결하며 또 내일을 걱정해야하는 일 일것이다. 그나마 장기 실업상태에 계신 분들에 비하면 쌓여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고민일지 모른다. '새벽별 보기 운동' 을 시작한지 한 달 쯤 지나면서 나름대로 여력이 생긴다. 뭐든 첫단추 끼우기가 가장 어렵고 수고로운 법이다.그 자당한 명제의 체험적인 경험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밥벌이의 수고로움은 자연스럽게 책읽는 사적 시간을 앗아갔다.넘기다만 책장이 마치 강건너 버려 두고온 자식처럼 눈에 밟혔다.하지만 어쩔소냐? 책장에 수면제를 발라 놓은 듯 한두장을 넘기면 졸음이 먼저 나를 당기는 것을. 책 첫장에 오픈기념일을 써놓은 시점으로 부터 무려 한달을 넘겨버렸다. 비질비질 거리면서도 어제 이책을 다 읽고 앓든 이 빠진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조희연 교수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5-6년전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이란 책을 나름대로 즐겁게 보았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한국정치의 성격과 사회운동의 향방을 짚어준 책으로 기억한다. 우리 정치를 바로보는 시점에 개인적 정리가 필요한 시점에서 시의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자평한다.  이후 한국 정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판도변화를 겪었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에 응전하고 자극이 되어준 사회운동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긴 책제목을 가진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이 책은 참여정부의 출범을 기점으로 해방이후 우리 사회의 성격과 각 단계별 사회운동의 성격, 그리고 저자가 제2단계 민주화 시기로 규정한 참여정부 이후 시민운동/민중운동의 과제를 살펴본다.

저자는 87년 6월 항쟁을 우리 정치,사회 변화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파악한다. 반독재 투쟁의 3가지 큰 줄기였던 자유주의적 정당정치와 자유주의적 사회운동, 민중운동이 거대한 적에 맞서 연합투쟁에 돌입한다. 6월 항쟁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시민사회운동은 87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이후 우리사회의 정치지체 현상은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과잉대표성을 부여한다. 초기 시민단체들의 중산층 지향의식과 보수언론의 지지는 민중운동을 국지적이고 주변적인 상황으로 몰고갔다. 이후 시민단체들은 분화와 다양성을 확보하며 2000년 총선의 '낙천낙선운동'이라는 세계시민운동사에 남을 거대한 역량을 과시한다.하지만 '낙천낙선운동'에서도 드러났던 민중운동과의 대립구도는 여전히 존재했다.이후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저자는 시민운동이 정부의 파트너가 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시민운동 차원에서의 변화를 요구하고있다. 시민운동이 개량주의적 개혁에서 침체해서는 다양하게 부각되는 문제에 기민한 대처를 할 수 없고 정치권의 '변형주의'적 전략에 인적 배급원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시민운동이 현단계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이념노선을 조희연교수는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문화적,생활적 체계에서의 보수화를 극복하고 진보성을 확보해야함을 주장한다.또 민주화이후 확산된 '평등성'의 급진적으로 확보를 위한 노력을 요구한다. 책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풀란차스의 말을 인용한 그는 '비정상성'에 대한 형식적인 '정상성'확보는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파악하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우리사회가 완전한 정상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바는 아니다.진보의 깃발이 현재 이루어온 '정상성'  영역에 도전하고 또 그 그림자가 되는 부분까지 드리워져야한다는 것이다.개인적으로도 '근대성을 완성하지도 못했는데 어쩌구..' 하는 논란은 다분히 단계론적이며 발전의  다층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본다.

조희연 교수의 90년대 시민운동의 한계에 대한 가장 큰 지적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분이다. 책의 두번째 장은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쟁점들과 시민운동,민중운동 영역의 대응에  대해 할애한다.이를 위해 세계화의 성격과 세계화에 반대하는 반 세계화운동의 이념적 논거를 정리한다. 반세계화의 움직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간단하게 알기를 원한다면 이 장은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민주정부들이 상황논리 또는 내재적 개혁원리를 내세우며 저항없이 따라가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이부분에 대해서는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현재 신자유주의에 대한 현상황의 수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저자는  범지구적인 반세계화 컨센서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여러면에서 산만해지기 쉬운 정치,시민사회의 변화과정와 성격을 쉽게 정리해 놓았다.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변화를 요구하고 또 세계화의 문제와 쟁점들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3장에서는 중복되는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정치개혁과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평가,그리고 언론개혁에 대한 전술적인 제안- 안티조선의 도발적 문제 제기의 부분을 인정하면서 향후 대중성을 얻기 위한 전술변화요구-등도 다루고 있다.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87년 이후를 정리하고 문제를 제기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하지만 그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이란것은 좀 피상적인 수준이다.물론 한 저자에게 모든 대안을 제시하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고 꼭 욿은일은 아니다.하지만 조희연교수가 말하고 있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상호협력,또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개념등은 모호하다. 반세계화를 위한 반워싱턴컨센서스라는 것도 말그대로 '의식개혁과 계몽'이라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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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퍼온글] 정희진, "발바리?"

발바리?
한겨레
▲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불편하거나 ‘흥미진진’하다. 성폭력을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문제 제기하거나 남성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 “여성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해서 성폭력당해야 한다면, 살의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나?”, “여성은 왜 웃통 벗은 단정치 못한 남성을 강간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성폭력 가해자도 무서워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여성운동가도 무서워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성차별에 대해 말할 때,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강박적으로 사용한다. 성폭력을 고발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은, 남녀 모두에게 ‘불쾌감’을 주기 쉽다. 한국 사회의 성폭력 신고율은 발생 건수의 2~6%에 불과하며, 성폭력 가해자의 70%는 아는 사람이며(어린이 성폭력의 경우 80%가 넘는다), 그 중 15% 내외는 가족 내 성폭행이라는 진실을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는가? 반면, 피해 여성을 비난하거나 피해 상황을 선정적으로 ‘즐기는’ 기사들은 조회 수 폭발이다.

최근 검거된, 100차례 이상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일명 ‘발바리’ 사건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가해자를 어떻게 보호하는지 잘 보여준다. 예전에도 상습 성폭력범이 ‘관악산 다람쥐’로 불린 적이 있다. 범죄 용의자를 익명 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인권 보호 방침이지만, 성폭력 피해 여성이 사건 이후 겪는 사회적 배제와 고통을 생각하면 인권 개념의 보편성에서 여성은 분명 제외된 것 같다. 살인, 방화, 강간은 강력 범죄다. 살인이나 방화를 100번 저지른 용의자에게 ‘발바리’나 ‘다람쥐’같은 귀여운 호칭을 붙이는가? 연쇄 살인범은 ‘살인마’라고 하지만, 연쇄 강간범은 ‘강간마’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를 100번 이상 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권력이다.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며칠 전 30대 여성이 기지를 발휘해 성폭력을 모면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여성은 “지금은 몸이 아프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 설득하면서 가해자에게 약속의 의미로 휴대 전화번호를 남기게 했고, 가해자는 검거되었다. 이 여성의 지혜는 감탄할 만하지만, 이 사건은 성폭력의 구조와 원인을 요약하고 있다. 어떤 범죄자가 범죄 현장에 기꺼이 자기 전화번호를 남긴단 말인가? 이런 사건이 가능한 것은, 가해남성이 성폭력과 섹스 또는 데이트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에 관한 한, 남성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모든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성은 남성 고유의 특권이기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없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X양 비디오’가 없다고 “장사 똑바로 하라”고 호통 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성 판매 여성에게 2만원 주고 원하는 체위대로 안 해 준다고 여성을 경찰에 신고한 남성도 있다. 이 남성들은 자신의 행위가 ‘현행법상 불법’인 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성 구매자는 스스로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

‘발바리’ 사건과 관련해, “여성이 문을 잠그지 않고 자거나 낯선 사람을 집안에 들여 범행 기회를 제공했다”고 보도한 언론사가 있었다. 여성이 조심하라는 얘기다. ‘남의 집에 찾아간 낯선 남자’가 모두 강간범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남성이 성폭력 가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성폭력의 공포에 떤다. 그렇다면, 성폭력 예방을 위해서 모든 여성이 조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남성들 중 극소수인 가해자를 신속하게 검거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기사등록 : 2006-02-19 오후 06:25:50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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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1
(준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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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 7,35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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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가는 길
E. M. 포스터 지음, 민승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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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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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가 자기 OK Cashbag에 2만원이 있다고 했다. 잽싸게 알라딘의 OK cashbag 설정을 하고는 며칠동안 X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 부절하다가 겨우 주문한 것이다.  나는 그런 공돈(?)이 있으면 왜 지긋이 참지 못하는 걸일까?

  결국은 1,000원 할인할 때 사지 못하고 지금 사고 말았다.  보급판이라고 나온 것을 오늘 동화서적에서 보긴 했는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양장본을 좋아한다.  가격도 얼마 차이나지 않고..

 

 

 

   워낙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고 2만원 맞추려고 산다.

 

 

 

 

 

  아무도 리뷰를 쓰지 않아 Thanks to 마일리지를 못받아 좀 섭섭하다.  내 마음의 고향인 인도를 소재로 쓴 외국 작가의 소설이니까 구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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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불만있는 자여, 외로운 자여, 방황하는 자여, 여길보라.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03년 10월 15일. 난 책을 구입하고 나면 책 맨 뒷장에 도장을 찍고 밑에 구입한 날짜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2003년 10월 15일은 내가 이 책을 구입한 날짜이고, 부대에 있던 시절이라 읽기는 읽었지만 전혀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쩜 그렇게도 처음 읽는 것처럼 완전히 다 까먹어 버릴 수 있을까. 겨우 끝에가서야 주인공 홀든이 동생과 나누는 대화만이 기억 어딘가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아 읽었었구나, 하고 스스로 인정해본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1919년에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설마 지금도 살아있나, 이 작가의 단 한권의 책이 막나온 따끈따끈한 신간 베스트셀러처럼 널리 읽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흔히 말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 책, 샐린저는 이 책 말고도 다른 몇권의 책을 더 썼지만 다른 책들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가와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만 듣고는, 호밀밭을 지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가보다 라고 쉽게 생각한다. 처음 읽는 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겠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원하는 주인공 홀든은 지독한 반항아다. 그러나 쉽게 떠올리는 반항아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는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이 세상은 별 볼일 없는 것들로 가득찼다고 생각하는 불평불만자다. 그러나 대놓고 개기거나 시비를 걸거나 못된 짓을 하며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단지 그냥 모든 것에 불평불만을 느끼고 못마땅할 뿐이다. 입만 열면 내내 툴툴 거리며 욕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그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 낙제. 머리가 안좋아서가 아니다. 공부할 의지가 없다.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이딴 것들을 해서 뭘 하자는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가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는 일들에 대한 독백으로 가득차 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맞춰서 살기는 싫다. 못마땅한 걸 어쩌랴.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세상의 질서에 그럭저럭 잘 맞춰가며 생활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거지?

  그는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인사 조차도 하기 싫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p120-121) 반갑지도 않은데 왜 만나서 반갑다고 하는거지, 아주 사소한 일상의 언어들과 행동들에도 딴지를 거는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홀든처럼 심하게는 아니지만 나 역시 내 안에 홀든의 반항심이 잠재하고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나름 사회의 반항자이고, 아웃사이더가이고, 이단아라고 생각한다. 쉽게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어가며 타협하게 되는 인간 중의 하나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 그때는 각 중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 시험을 봐서 성적순으로 반배정을 하곤 했다. 그런데 난 그 시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보니 자연 공부도 하지 않았다. 시험도 대충 봤다. 그리곤 반에 5등인가로 들어갔던걸로 기억. 하지만 첫시험에서 반 2등을 했고, 내내 2등만 하다가 중학교땐 전교 1등까지 올라가며 한번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연합고사라는걸 보는데 이 시험 역시 성적순으로 학교 배정을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별 필요성을 못느꼈다. 당시 친구들은 수능시험처럼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난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내 책만 봤다. 삼국지를 탐독했던 기억이. 결국 고등학교에 반에서 13등인가 9등인가로 들어갔다가 첫시험에서 전교 4등, 2학년엔 전교1등으로 올라갔다. 공부를 잘했다는 걸 자랑하는게 아니라 내가 반항아였다는 예를 말해주는 것이다.

  내 딴에는 '필요의 논리'라는 것이 있다. 필요치 않으면 안한다는 입장. 그리하여 난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꽤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영어 문맹이 되어있으며 여전히 난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영어를 좋아했다면 계속 공부를 했겠지만 - 이때 사용되는 논리는 '좋아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필요성의 논리'다 - 좋아하지도 않았고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했던 것이므로 졸업과 동시에 종쳤다. 그리고 이후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했다. 드럼치고, 공연하고,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하며 대학 2학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다. 앞으로 어찌 바뀔지는 모르지만 난 지금의 내 취향에서 바뀔  필요를 못느낀다.

  군대의 억압적 권위주의와 권력, 위계질서 따위가 싫어 한참을 고민했고, 공군에 입대해서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진주로 갔으나 그곳 훈련장에서 5일 후 나와 서울로 향했다. 일부러 인성검사에서 싸이코 짓을 하고 나왔다. 장교들 앞에서 면접 보며 환청이 들린다는 등 이상한 소리도 지껄여댔다. 얼마나 재밌던지. 나름 내 딴에는 군대를 조롱한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이후 일년 뒤 육군에 갔으나 그 사이에는 반전평화주의에 입각한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등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위 친구들과 선배 후배,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 군대를 옹호하는 선배와 논쟁을 벌이다 홧병으로 왼쪽 얼굴이 마비되는 증세도 겪었다. 안면마비. 한달동안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한 끝에 제대로 돌아왔지만 얼마나 놀랬던지. 그런 오랜 시간의 사회과 국가에 대한 불평불만들, 나름대로의 알아주지 않는 독자적인 선언와 행위, 그것은 정말 말그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나를 키워내는 과정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홀든에게서 난 과거의 나를 느꼈고, 사회와 조금 타협한 지금의 내 안에 잠재하고 있어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반항아를 본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는 것은 홀든은 누구에게나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시작하고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고민들, 그리고 툴툴 거리며 불만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너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이고, 내 친구의 모습이고, 우리 부모님의 모습, 내 자녀의 모습이다. 홀든은 어디에나 있다. 홀든은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매우 솔직하다. 솔직하지 못한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보다 반항심을 표출하는 홀든은 더 정상적이다. 홀든의 불평불만은 우리가 방과 후 엄마에게 털어놓는 불평불만이고, 우리가 친구를 만나 못마땅한 친구를 뒷다마까는 불평불만이다. 그는 전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작가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통해 자신을 반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유한 유태계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홀든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와 컬럼비아대에서도 공부를 했지만, 은둔형의 작가로도 알려져있다.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다 마쳤지만 샐린저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홀든을 항상 느끼고 있던 것은 아닐까. 감명깊게 봤던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에는 한 늙은 작가가 조그만 아파트에 살며 바깥 외출을 삼간 채 심부름꾼이 사다주는 식료품을 냉장고에 넣어둔 채 꺼내다 먹으며 삶을 연명한다. 집 밖을 나가길 꺼리는 그 노인네는 수첩에 항상 뭔가를 메모하고 다니는 흑인 학생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글쓰기 훈련을 시키게 되며 세상과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갑자기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은둔형의 노인이 '샐린저'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샐린저는 내면 세계에 심취해있던 사람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밖에 나와 빛을 보는 것을,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다. 그는 두번 결혼을 했고 두번 이혼을 했으며 80년대 말에 세번째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언론에 공개되기를 극도로 꺼렸다. 그 자신이 홀든이었던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247-248)

 모든 것에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거부하는 홀든의 현재 상황을 잘 찝어낸 말이다. 또한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치관이 확립된 뒤에도 사회와 타협하지 않고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단념해버린다는 말. 지금 이런 사회환경에선 내가 뜻하는 바를 펼칠 수 없어, 난 시대를 잘못 태어났어, 라고 불평하는 이들은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이기도 전에 단념해버린다. 그리곤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 상태가 유지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과 자신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과의 소통조차 거부한 이들이다. 

  학교교육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불평, 학교에선 아무것도 배울게 없어, 도대체 학교를 왜 가는지 모르겠어, 라고 불평하는 학생들 많다. 학교에서 내가 해야할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도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도 쓸모가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하면 더 좋겠는걸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햐 하는지를 생각해볼 순 있다. 앤톨리니 선생은 학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자퇴당한 홀든에게 이런 말들 한다.

"교육받고 학식이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히도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그냥 재능 있고,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불행히도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이들은 보다 분명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걸 들 수 있어."(p250)

"그 밖에도 학교 교육이란 건 많은 도움을 주지. 학교 교육이란건, 어느 정도까지 받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지. 자기의 사고에 맞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돼. 나중에는 자기 사고의 일정한 크기에 어떤 종류의 사상을 이용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될거야. 게다가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상들을 하나하나 시험해 보는 데 드는 시간도 절약해 주고 말이지. 결국 학교 교육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알게 해주고, 거기에 맞게 이용하게 해주는 거야."(p251)

  이러저런 고민으로 방황하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여, 내 안의 홀든을 위해 이 책을 읽을지어다. 홀로 고민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홀든과 대화를 시도하자. 자꾸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지 말고 숨지말고 홀든과 대화하자. 그리고 훌훌 털어버리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실망하지 말자. 나의 꿈을 펼칠 수 없다고 미리부터 좌절하지 말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먼저 홀든을 만나보자.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자. 방황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이 책을 접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을 스물 여덟 먹은 해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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