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매일 살다시피하다보니

운 좋게 몇몇 이벤트에 당첨되었습니다.

저도 아주 소박하게 캡쳐이벤트 열어봅니다.

투데이 6666 잡아주세요.

첫번째 잡아주신 분께 행운이 돌아갑니다.

숫자가 좀 께름찍하다고 느끼시는 분은 없겠죠????

 

일주일 안에는 잡힐 것 같아요.

미리 공지합니다.

이 페이퍼에 달아주시구요,

만오천원 이하의 상품을 골라주시면 됩니다.

 

*별 호응없으면 제대로 민망하겠네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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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책이 너무 맘에 들어서 리뷰는 생략.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읽으면서 하도 키득거리니까 옆자리 선배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하다가, 비웃다가... 이토록 나를 웃긴 책. 최근 몇년간 읽은 책들 중에서 날 가장 많이 웃게 만든 책이라면 단연 이 책이다. 이름하여 ‘악마의 사도’.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이고, 책 제목은 다윈의 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이름들을 들먹이면서 ‘웃기고 재미난 책’이라고 하면 외려 날 이상하게 볼 주변인(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들도 있겠지만, 허나 어쩌랴. 사실인 것을. 정말 웃기고 재미있다. 너무 웃겨서, 통 그런 일 없는 내가 사무실에 앉아 키들키들거리다 못해 푸칼칼거렸다.

책이 너무 맘에 들어서 괜히 흥분해 리뷰를 도저히 할 수 없다, 라고 하면 될까. 이 재미난 책에 쓸데없는 나의 감상 따위를 덧붙여서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이 정말이지 황당할 정도로 맘에 들었다는 것, 도킨스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서 도킨스가 애정을 표현한 다른 저술가들의 글까지 몽땅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기나긴 제목의 SF 소설까지 읽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는 것,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한 애정마저도 더욱 깊어졌다는 것. 내 생의 책 중 하나로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핀치의 부리’ 만큼 이 책이 좋다고 하면 어쩌면 내 친한 친구들은 내가 ‘악마의 사도’에 얼마나 폭 빠졌는지를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악마의 사도’ 광분모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도킨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읽어선 안된다. 도킨스와 굴드의 다른 책들로 일단 바닥을 깔아놓고, 그 뒤에 이 책을 읽을 일이다. 굴드와 도킨스의 책을 각각 한권씩이라도 읽어본 이들이라면, 특히 굴드의 ‘풀하우스’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매력 넘치는 인간들 같으니! 나 완존히 도킨스 아저씨 때문에 미치겟또...


도킨스 아저씨의 종교비판.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로 묘사하면, 종교를 비난하거나 심하면 적대시한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둘 다이다. 나는 ‘체계를 갖춘 종교’에 왜 그렇게 적대적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종교에도 똑같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로 서두를 떼곤 한다...

체계를 갖춘 종교가 노골적인 적대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는 (버트란드 러셀이 태양 주위를 도는 중국 찻주전자라는 가상의 사례로 압축시킨 상상을 예로 들자면) 러셀의 찻주전자와 달리 종교가 강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금을 공제받으며,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입된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들은 찻주전자를 다룬 엉터리 책들을 암기하면서 인격 형성기를 보내라고 강요받지 않는다. 부모가 기이한 모양의 찻주전자를 선호한다고 해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학교가 그 부모의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없다. 찻주전자 신자들은 찻주전자 불신자, 찻주전자 배교자, 찻주전자 이단자, 찻주전자 모독자를 돌로 쳐죽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찻주전자를 믿는 비정통파 부모의 딸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는다. 찻주전자에 우유를 먼저 따르는 사람들이 찻물을 먼저 따르는 사람들의 무릎에 일부러 우유를 엎지르는 짓도 하지 않는다.

...이제 솔직해지자.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이다. 이제 ‘민족주의자’ ‘왕당원’ ‘공동체’ ‘인종집단’ ‘문화’ ‘문명’ 같은 완곡어법은 그만 써라. 당신에게 필요한 단어는 종교이다. 당신이 위선적인 행동까지 해가면서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단어는 종교이다.


이 책은 도킨스가 그동안 여기저기에 썼던 글들을 묶은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비과학적인 모든 것을 혐오한다 어쩔래”가 되겠다.

더불어 책에는 도킨스가 지인들에게 보내는 헌사와 추모사들도 들어있다. 과학소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에게 보내는 추모사의 한 토막.


과학계는 친구를 하나 잃었고, 문학계는 등불을 하나 잃었으며, 마운틴고릴라와 검은코뿔소는 용감한 수호자를 하나 잃었고 애플 컴퓨터는 가장 달변인 대변자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지적 동료이자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하나 잃었다.


과학계 동료인 윌리엄 해밀튼의 추모사에는 도킨스 특유의 유머와 애정이 넘쳐나서, 나는 추모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멍한 정신 상태는 전설적이라 할 정도였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굴드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 굴드의 ‘풀하우스’에 붙인 서평, 굴드에게 보내는 편지 등 굴드와 관련된 부분도 한 챕터가 들어가 있다. 어찌나 솔직한지. 두 학자의 학문적 갈등과 인간적인 우정은 어떤 소설보다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나는 태양이 지쳐서 하늘 저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우리는 만났을 때에는 성의를 다했지만, 우리가 가까웠다고 주장한다면 솔직하지 못한 말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뻔뻔함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가 나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킨 경우가 한 차례 있었음을 독자에게 말한다 해도 용서하기를 바란다. “리처드와 나는 진화에 관한 글을 가장 잘 쓰는 두 사람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붙어 있었음을 강조해두자.


1978년 한 유명한 과학 잡지의, 이름을 밝히기가 꺼려지는 서평 담당 편집자가 굴드의 ‘다윈 이후’에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유전자 결정론’의 반대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어느 쪽에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유전자 ‘결정론’을 선호한다고 시사한 쪽인지,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 서평을 쓸 것이라고 시사한 쪽인지 말이다.


나는 스티븐 굴드의 말이 왜곡되었다는 쪽에 돈을 걸고, 왜곡할 필요가 전혀 없는 프레드 호일 쪽에는 쥐꼬리만큼 걸었다.


빅뱅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호일은 2001년 숨졌다. 그가 이 책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굴드가 ‘산유리새의 불륜’이나 ‘개미의 노예 제도’ 같은 무해한 어구를 반대하는 설교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유감이다. 그런 무해한 의인화에 반대하면서 그가 멋들어지게 던진 질문인 ‘이것이 단지 현학적인 투덜거림일까?’에는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해야 한다.


굴드의 ‘경이로운 생명’에 대한 도킨스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이로운 생명’은 잘 쓰여진 책이자 대단히 중구난방인 책이다.


굴드의 ‘풀하우스’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흑흑 바로 이거야, 굴드는 그 훌륭한 책에서 야구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고... 도킨스 아저씨는 바로 그 점을 짚었다. 대단한 리뷰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짧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55쪽 분량을 야구 전문 용어로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나머지 세계라 불리는 어렴풋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 사는 독자들을 대신해서 가볍게 항의를 해야겠다... 굴드가 야구에 심취한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수준에서 야구 이야기를 조금만 가미했더라면 약간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장 6장에 걸쳐 시종일관 지속되는 야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읽으라는 이런 오만한 무례는 미국의 우월주의에 해당한다(그리고 나는 그것이 미국의 남성 우월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줄기차게 굴드를 비꼬고 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우정의 전류는 분명히 감지된다. 어쨌거나 진화론의 전사로서 동지를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사람은 도킨스였을테니까. 굴드가 사망한 뒤 도킨스의 글들에는 상실감이 역력히 묻어난다.


도킨스 아저씨,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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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파우스트 3부작인가?

  

 

[문화일보]

독일 역사속에 그려진 ‘파우스트’의 인간상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 / 이인웅 엮음 / 문학동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파우스트는 독일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을 통해 문학 속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를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괴테 이전에도 독일의 민담과 수많은 출판물의 주인공이었다.

이 책은 독일의 전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 장르에서 창조돼온 파우스트 인간상의 다양한 면모를 국내의 연구자들이 분석한 것이다.

30여년간 대학강단에서 파우스트를 강의한 이인웅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독일문학을 전공한 동료교수와 제자 박사 23명과 함께 3년간 준비해 내놓은 역작이다. 27편의 논문을 5부로 나눠 엮었다.

실제 인물 파우스트는 의학, 신학을 섭렵하고 유대계 신비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예언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괴테는 파우스트에 관한 기존 전설과 출판물들을 참고,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노학자의 욕망 추구, 방황과 더불어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장구한 노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괴테가 ‘파우스트’ 집필을 시작한 것은 1773년, 완성한 것은 1831년이다. 한마디로 필생의 대작인 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계약을 맺지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우스트에 관한 이전 출판물들이 주인공을 신의 저주를 받게 해 지옥으로 끌고 가지만, 괴테는 파우스트를 구원받은 자로서 하늘로 승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파우스트의 인간상이 독일의 근대 민족국가 형성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됐다는 것을 이 책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파우스트가 독일 민족의 필요에 따라 행동주의적 남성 표본으로, 제국주의 전쟁과 인간의 도구화로, 나치시대의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로, 동독의 사회주의 토지개혁으로 이념화했다는 것이다.

책을 엮은 이인웅 교수는 파우스트가 한없는 방황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상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를 통해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들이 과연 나는 누군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번에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를 번역해 같은 출판사를 통해 함께 펴냈다. 새 번역판은 대학 2학년때부터 파우스트에 심취해 온 이 교수의 번역 완결판이라는 점 이외에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석판화와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인 막스 베크만이 그린 펜 소묘가 삽화로 들어있어 눈길을 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6/05/19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6051901031930136003

이게 기사에서 언급한 새 번역본!!

 

새 번역본은 바로 이 책이구만 ... 2종의 한글 번역본이 있는데, 새로 또 사??

기사에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3월에는 [파우스트 주해]라는 책도 내셨구만(아래 사진) ...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질적인 수준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하긴 평가할 만한 능력도 없다만),

여하튼 정년 퇴직 기념으로는 상당히 알찬 작업들이군 ...

 

아, 당분간 책 안사려고 했는데, 안살 수가 없군 ...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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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헉!!!

그런데 이건 값이 이게 뭐냐??

정   가 : 56,000원
판매가 : 50,400원(10%off, 5,600원 할인)
마일리지 : 1,520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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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저 같으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황해문화 여름호 편집 막바지입니다.

믿었던 필자가 연이어 두 사람이나 믿음에 배반하여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마감 중입니다. 당신이 남긴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읽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가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 중 상당수는 올해 상반기 나를 계속해서 번민케하고 있는 고민이란 겁니다. 불행히도 그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 저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유행 담론들의 출처가 실은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담론(좌파 담론부터 포스트모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들도 이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혹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인 대처(어찌 이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러운 지경에 처한)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란 사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이 오염 상황은 자기계발이란 표제어를 갖지만 실은 Onanie이고, 安心立命(spiritual peace and enlightment)을 꿈꾸지만 주화입마하고 만 상황 같아 보입니다.

혹자는 그나마 우리의 양심에 결계 노릇을 해주던 이념의 시대가 가버린 뒤 남은 것은 몰염치한 욕망의 무한질주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와 같은 면모의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결론은 이상하게 원론이라 불리우는 삶에 대한 태도(입장)만 남기는 앙상함을 드러내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변혁이란 것도 결국 "삶을 바꾸라."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입장 혹은 "세상을 바꾸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책만 남는 것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적인 언술들도 생사입멸(生死入滅)의 과정을 거치는지 한 때 포지티브했던 말들도, 세상의 변모와 더불어 더이상 그 이전의 저항적 언술로서의 생명력을 다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한동안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말들, 혁명, 인권, 민족, 민중, 시민, 자유, 평등, 평화, 연대, 노동 등의 단어들이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한 동안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아 주변부 청년들이 외쳐대던 'Cool'의 정신이 이제는 가장 유능한 소비자본주의의 슬로건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했던 말들도 이제는 그 힘을 잃었거나 훼손된 의미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제가 했던 말, 자본주의는 젤리 같아서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어떤 반동도 튕겨내거나 흡수해버린다고 했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 듯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파스빈더가 말했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이 시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시대를 주유하는 가장 큰 정서는 아마도 이 불안일 겁니다. 민주주의(체제)란 말을 능력주의와 동일한 말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신보수주의 & 신자유주의자 담론의 가장 뛰어난 전도사들은 바로 마케팅 이론가들)들에게 사회적 위계는 곧 그 사람의 자질입니다. 그네들이 포장하고 있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력은 서태지가 보여준 것처럼 중졸 출신도 열정만 가지면, 스스로를 어떻게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노력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전도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부단한 자기계발이란 노력 끝에 계속 직장을 옮겨다니는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글로벌화된 세상,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로 대통합을 이룬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 가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수치이기도 합니다.

모든 저항을 즐겨 소비하며 무럭무럭 성장한 자본주의 체제는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대에 자본주의도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묘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런 때 믿을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습니다. 성과급, 연봉제는 블루컬러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의 분리에 더해져 이젠 노동자들 자신을 토막토막 내버립니다. 마치 드 보통의 말대로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되어 우리들 자신을 짓누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친구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얼마나 멋지게 일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마 쿨한지 만을 설명합니다. 노동의 연대는 이제 학력고사 당일까지 우리를 주눅들게 했던 연봉경쟁의식 앞에서 우리를 뿔뿔이 조각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연대하란 말인가! 모두가 나의 경쟁상대인데,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저항이 곧 자본주의를 살찌우는데, 그러다보니 결론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더없이 치열한 경쟁으로 나서거나 아니면 한 발 물러나 마치 보헤미안인 양, 철학과 예술을 음미하거나 종교적인 순수함으로 이를 초월하려 합니다. 실은 도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자본주의의 상류계급 부르주아로 승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복종으로부터 스스로를 온존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려 듭니다. 성공한 자는 성공한 자대로 성공의 꼭대기로부터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발버둥치고, 실패한 자는 실패한 대로 더이상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애시당초 달랐던 출발점을 한탄합니다. 이 시대 평전이 유행하는 까닭 중 하나는 더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는 반증 혹은 사회 이론이나 구조, 정치로부터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비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악순환의 연속이니 이를 초월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을 하류사회로 직행하게  만드는 직선코스인 셈인 것이지요.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다. 아니, 도리어 그들을 즐겁게 강화시키는 것이니 초월해버리자는 것...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나로부터 시작된 "생을 즐겨라!"는 절대 명령입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자유는 비아그라를 삼키고, 아무리 사정해도, 사정해도 흐물거리지 않는 약발 죽이는, 꼿꼿한 욕구의 대가리를 쳐들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명령합니다. 규율사회에서 지시는 외부로부터 왔으나 이제 모든 명령과 지시는 내부로부터 옵니다. "일해라!", "공부해라."란 명령은 "일을 즐겨라!", "열정으로 살아라.", "스스로를 계발해라."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공포와 불안을 담아 엄습합니다. 멈추면 도태되므로 이제 아침형 인간은 한밤중이 되어서까지 스스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불안이 세상을 좀 먹고, 나를 좀 먹지만 어디에도 함께 할 인간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가족이, 회사에선 동료가, 간만에 만난 친구는 주식형 해외펀드에 투자해서 종잣돈을 모으고, 10년만에 10억 벌기 프로젝트가 도처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웰빙과 함께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동거하는 지식 기반 정보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시대의 노동은 사라졌는가?
아니,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노동을 재현하는 권력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한 명의 인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담론은 모든 노동하는 주체를 자본가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경영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전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영화는 단순히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불어닥쳤던 구조조정은 단순히 기업만의 구조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를 민영화하고, 우리들 개개인을 구조조정시켰습니다. 내 안에 기업구조조정본부를 설치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인데, 나를 이토록 학대하며 지배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이제 당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조건, 일에서의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입니다. 서동진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 역시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는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 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존재할 뿐이므로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끊임없는 무한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조울증에 사로잡힌 (노동하는)주체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징기스칸에게서 열정을 빼면 그는 한낮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을 터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요. 그 정답을 저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번 특집 원고들을 읽고, 교정하면서 몇몇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출구를 찾고 있는 듯 합니다. 이번 특집에는 좌담 원고가 하나있습니다. 일본의 현재를 고민하고 있는 "전야"라는 계간지의 편집위원 두 사람(다카하시 데츠야, 나카니시 신타로)과 "황해문화" 쪽 두 사람(김명인, 정근식)이 모여앉아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들입니다. 일본의 일억총중류 환상으로부터 '후리터', 600만엔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그네들의 속사정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도리어 후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눈 내용입니다. 결국 문제는 일정하게 상상력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우리가 해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해방의 주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발견할 수 있는가? 혹은 발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그리고 이번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동국대 철학과의 홍윤기 교수가 천규석 선생의 책에 대해 이정우 대표가 날린 서평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든든한 연대의 표시라고 여겨주기 바랍니다.

* 참,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 자본주의도 가장 잘 나갔다고 했던 제 말의 참뜻은 자본주의가 잘 나갈 때 혁명이 잘 나가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제 인식을 역으로 표현해본 겁니다. 이 점 오해없으시길... 그리고 이 글들은 이미 읽은 것들도 있겠지만 함께 읽어도 좋을 책들입니다. 물론 시간이 되고, 돈이 된다면 톰 피터스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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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토트 > 소박한 이벤트 합니다. ^^

소박한 이벤트 합니다.

2006을 잡아주세요.

첫번째, 세번째, 마지막 분께 10000원 상당의 책 한권 씩 드립니다.

그런데, 워낙 조용한 서재라서 언제 잡히게 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몇 명이 잡아주실지도 잘 모르겠구요.

혹시 한분만 잡아주시면 한분께 드리구요, 세번째와 마지막이 겹치면 두분께 드릴께요. ^^

 

참. 그런데 제가 담주 수, 목, 금에 지방으로 출장을 갑니다.
출장 중에는 서재에 못 들어올 거 같습니다.
가기 전에 잡히면 좋겠지만 혹시 제가 출장 중에 잡히게 되면 아무말 없더라도 좀 기다려 주세요.
숫자 잡아놓게 시키고 도망갔다고 생각하지 마시구 기다려 주세요. 갔다와서 연락드릴께요. ^^ 

앗.. 추천은 하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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