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라디오
이토 세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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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달부터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가 있다. 416의 목소리라는 방송이다. 정혜윤 PD가 제작하고 김탁환 소설가·함성호 시인·오현주 작가가 진행하며, 매 회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나오신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방송의 부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야기는 끊기지 않을 거라는 절박함이 문자에 스며 있는 듯했다. 1회가 올라왔던 날, 경빈이 어머님 목소리를 듣다가, 문득 상상 라디오가 떠올랐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저녁인지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던 상상 라디오의 DJ 아크가.



맨 처음 상상 라디오의 표지를 넘기고 DJ 아크의 독백인지 방백인지 모를 '말'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이 얘기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려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두서없는 수다에 당황해 '어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니야…'라며 표지를 덮어버렸었다. 그러다 다시 저 책을 펼쳐들었던 올해 1월 초,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기 전 차례를 확인하고는 깨달았다. 아, 죽은 자란, DJ 아크를 가리키는 말이었구나…


그렇다. 이 책은 죽은 자의 목소리-귀를 기울이면-넋을 위로하며-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구원의 노래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각 챕터/장의 제목이 스포일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밴드 매니저를 하던 아쿠타가와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다음 날 후쿠시마 대지진의 희생자가 된다. 빨간 재킷을 입고 있던 그는 물살에 휩쓸려 가고, 삼나무로 덮인 산쪽으로 빠르게 밀려가, 높은 삼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남은 이들에게 목격된다. 


저는 높은 나무 위에 있습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자란 삼나무의 대열 속. 하늘을 찌르는 듯한 가느다란 수목의 거의 꼭대기에 걸려서 목을 뒤로 젖힌 채 누워 마을을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길가메시 신화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높은 곳에 혼자 남아 버렸습니다. (25쪽)


재해가 일어난 지 반년 뒤, 고지대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미야기 현 해안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들고 간 내게 젖은 목재와 걸레처럼 뒤틀린 금속 덩어리, 색색의 천과 생활용품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표면에는 파리나 까마귀가 엄청나게 발생한 장소 너머로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작은 강의 상류를 가리키며 불쑥 한 말. 산을 두개 넘어간 곳에 있는 삼나무에 한동안 사람이 걸려 있는 걸 본 기억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57쪽)



어떤 '재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갖게 되는 첫 번째 마음은, 아무래도 미안함 아닐까. 왠지 모를 죄책감. 내가 죽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나 대신 저 사람이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내가 저 사람보다 뭔가를 더 잘했고 뭔가가 더 잘나서 살아남은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의 죽음과 나의 살아남음이 아무 상관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 심지어 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내 속에 있던 무언가도 같이 죽어버린 것 같다는 아주 막연한 느낌. 그런 느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미안함. 나는 살아남았으니,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그렇기에 누군가는 재해의 현장에 가서 봉사를 하고 아픔을 나눈다. 아픔이란 게 나눈다고 줄어들 리 없음을 잘 알면서도, 아픔의 공간에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살아남음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 이들의 귓가에, 아쿠타가와가 전하는 소리들이 전해진다. DJ 아크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소리가.



삼나무에 매달린 아쿠타가와는 수다쟁이 DJ 아크가 되어 방송을 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했던 말을 풀어놓는다.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서, 왜, 누구를 향해, 이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고 노래를 튼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메일이 도착하면 읽어 주고, 어떻게 연결됐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연결되면 통화를 한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던 1장에서의 아크는, 3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함께 웃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중계'하는 그들의 모습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특히 어둠 속에서 혼자 헤매던 이들이 아크의 목소리 덕분에 만나는 장면,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로 어둠 속에서 함께 버티고 있던 3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이 날 뻔했다.


저는 기둥의 맨 밑을 잡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깊은 어둠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아크 씨, 당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나는 쪽으로. 그러자 하늘하늘 흔들리는 차가운 손이 잡혔습니다. 저는 거침없이 그것을 잡았습니다. 누군가의 왼손이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우리 방송의 청취자이기 때문이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의 구석입니다. 손전등이 그 파란 화살표를 부옇게 비출 뿐입니다.

지금도 좁은 층계참에 웅크리고 앉아, 그 사람이 더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중략) 이렇게 있으니 오히려 내가 잡고 있는 가라앉아 가는 손이 나를 구원해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121쪽)



아크는 이제 그만 떠나자는 아버지와 형을 먼저 보내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깨닫는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아내를 보고 싶어서.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신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지낼지 생각하면 석쇠 위에서 몸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초조함과 무력함과 미안함이 몰려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면 부디 두 사람 마음이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잔잔해지기를, 저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가까이에 있어주기를 바란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가까이에 있고 싶고, 정토로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미사토와 소스케의 말에 달렸습니다. (195-196쪽)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하겠다는 아크를, 수많은 영혼들이 응원한다. 집중해서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아크와 같이, 아크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들에게도 남편을 칭찬하는 미사토 씨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소스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크처럼, 살아남은 누군가를 보고 싶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의 어둠 속을 맴돌고 있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리고 아크는 미련 없이, 웃으며, 떠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세월호가 떠올랐고, 여전히 아이들을 보내지 못하고 계신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 중 한 명도, 아직, 아크처럼, 웃으며, 떠나지, 못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저렸다.




상상 라디오를 읽으며 세월호가 생각났듯이, 416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크를 떠올린다. 아무 잘못도 이유도 없이 차가운 물 속에서 구해주러 오는 이들을 기다리다가 죽어갔을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나 또다시 죄인 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다 문득, 416의 목소리에서 부모님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어쩌면 아이들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크처럼, 그 아이들도, 계속 이 차가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부모님들이 계속 아이들에 대해, 세월호에 대해, 4월 16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누군가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다면, 떠나지 못하고 어둠 속을 떠도는 아이들이 조금은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더 많이 저려온다.


416의 목소리는 현재 5회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5회가 올라왔고 다섯 분의 어머님/아버님이 출연하셨다. 수학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못했던 경빈이와, 민지와, 건우와, 승묵이와, 영만이의 어머님/아버님. 솔직히 방송을 끝까지 다 듣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방송이 더 널리 들려지고 퍼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을 떠올려 주고, 세월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삶의 구석구석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절대 잊지 않기를 약속하겠다고, 새삼 다짐해 본다.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함께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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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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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신기한 제목이다. 천하무적인데 왜 불량하다는 걸까. 감독이 포악한가. 선수들이 사고를 많이 치나. 상식적인 선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정도였기에, 궁금했다. 이것이 이 책을 집어든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의 작가가 주원규라는 것이었다. 혁명이나 변혁 같은 거대 담론이 낡아빠진 이야기가 된 시대라 그런지, 아직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는 작가를 만나면 반가움이 먼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의 전작 <열외인종 잔혹사>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이었고, 혁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주원규가 만들어낸 야구 이야기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이야기는 꽤 전형적인 '야구 소설'의 흐름을 따라갔다.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을 열심히 훈련시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는, 가난한 구단 삼호 맥시멈즈의 감독 김인석을 중심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진행된다. 코리안시리즈에서 상대하게 될 팀은 가난한 모구단을 인수할까 말까 하고 있는 부자그룹 미성의 프로야구단 스틸러스. 최소한의 스포츠맨십마저도 자본과 생존의 논리에 따라 버리고 마는 맥시멈즈의 구단주와 주전 선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승리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는 '괴팍한 감독'과 뭣도 모르고 그 감독의 일생을 건 승부에 말려 버린 과거의 4번타자 장석준, 철부지 파이어볼러 강태환, 어리바리 2군 선수들 다섯 명.

스포츠 소설이니까 당연히 주인공이 이길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봐도 맥시멈즈에게 너무 상황이 불리해 보여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이러다 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러워서, 결국 맥시멈즈가 우승했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힘이 좀 빠지기도 했다. 하, 결국 전형적인 야구 소설이구만. 온갖 난관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쥔 영웅들의 이야기...뭐 이런 거 아냐? 라는 생각에 조금의 배신감도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길 수 없을 만한 상황을 초인적인 의지로 헤쳐가는 주인공의 승리를 확인한 후의 안도감이 지나가고 나면 '에이 소설이니까 이기지, 현실이라면 이길 수 없었어'라는 생각에 쌩하니 고개 돌리게 되는 것이 스포츠 소설을 읽고 나서 보통 느끼는 감정이다보니.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맥시멈즈의 승리는 정말 승리였을까. 맥시멈즈가 승리를 한 후, 구단의 패배를 확신(하다못해 소망하기까지)하고 있었던 프런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구장을 가득 채운 스틸러스 팬들의 반응이 말도 못하게 싸늘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공중분해되기 직전의 모그룹이 우승한 구단에게 특별한 보너스를 주었을 것 같지도 않고. 원래부터 인기팀도 아니었던데다가 한국시리즈가 진행되는 내내 중계진으로부터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들어먹었으니 언론의 보도도 호의적이지 않았을 테고. 감독은 그만둬, 승리의 주역들은 '콩고물'도 얻어먹지 못한 채 흩어져, 팀은 공중분해돼, 이게 뭔 승리야, 이런 걸 승리라고 할 수 있어? 

맥시멈즈는 분명 한국시리즈를 이겼지만, 현실에서도 승자가 될 순 없었다. 김인석도, 장석준도, 강태환도, 2군 5총사도 우승을 통해 승리자다운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거둔 승리는 야구장 안에서의 승리였을 뿐이다. 장석준의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야 감동스러웠다만, 장석준의 현실은 병원에서 쫓겨난 아들을 위해 병원 앞에 서서 1인시위를 하는 아버지인 것이다. 아, 슬프고 씁쓸하다...하면서 책을 덮기 직전,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읽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조차 기회와 역전의 가능성이 주어진 각본대로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패배가 결정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 판을 아예 둘러엎고 우리들만의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님 그 판에 주어진 각본대로 적당히 순응하는 착한 선수가 되는 게 옳을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님 그 판에 머물러서 주어진 각본과 역할을 걷어치우고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버텨내는 '불량주전'으로 살아남는 게 좋을까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 p.431,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다. 어려운 문제다. '그 판'을 좌지우지하거나 또다른 '판'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능력 따위 조금도 없는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어진 것이 매우 제한적이고 그 주어진 것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제한적임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을 만든 그 자들은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그러니 너는 그 기회를 잡아 노력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따라서 실패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남들만큼 애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사람이니 동정할 것 없다고 말한다. 또는 연민에 찬 눈빛으로 '지금 네 상황에선 어렵겠지만, 네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아니, 내 뒤를 따라올 수 있어'라며 은혜를 베푼다. 역겹기 짝이 없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매일 고민한다.

어쩌면 작가는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비현실적인 야구 소설을 쓴 게 아닐까.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움으로써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킨 현실의 패배자들에게 불끈 쥔 두 주먹을 흔들어 보여주는 건 아닐까. 비록 그 싸움을 통해 '정말로 내가 얻은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싸워 보자고. 지지 말자고. 버텨 보자고. 그래서 살아 내자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났더니, 이 이긴 것 같지도 않고 진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왠지 고마워졌다. 쑥스럽게도.


+ 사족
이 책의 또다른 재미는 역시 야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무사에 일부러 만루를 채우게 하는 것을 비롯, 온갖 기상천외한 김인석의 작전들, 초단기 2천스윙 특훈, 전형적인 캐스터와 해설자의 멘트 등등을 통해 작가가 야구를 꽤 많이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선수들과 구단을 연상케 하는 부분들이 요소요소 숨어 있었다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맥시멈즈를 볼 때는 넥센이, 스틸러스를 볼 때는 엘지+삼성이 생각났다.  김인석은 김인식과 김성근을 적절히 합쳐 좀더 괴팍하게 만든 인물 같다. 강태환은 김광현+류현진+돌아이인가 싶었는데 묘하게 김진우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석준은 장종훈+양준혁에 좀더 극적인 요소를 섞은 인물 같고. 그 외에도 강선동, 유현종, 고형민, 박철수, 장민혁, (타자) 윤길현, 이동수 등등의 이름이 보일 때마다 킬킬거리며 몇몇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전 메이저리거의 이름이 정지훈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ㅋㅋ 야구팬이라면 깨알같은 유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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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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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한국이 언제는 좋았나 싶다. 한국인이라 좋았던 순간,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던 순간, 한국에 태어난 게 축복이라 여겨졌던 순간을 기억 속에서 아무리 찾아내려 해도 찾아지지가 않는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며 한국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를 같은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응원하지도 않는다.


그래, 나한테는 애국심 같은 거 없다. 있다 해도 아마 엄청 조그마할 거다. 평소에 잘 인지되지 않는 걸 보면. 이 나라에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었으니, 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감사하면서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할 의무 따위도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저 생존의 조건 혹은 환경으로 받아들이며 나라가 내게 요구하는 의무만을 이행할 뿐이다. 나라와의 관계에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으려고는 한다. 좋은 감정이 나쁜 감정보다 훨씬 적으니까.


한국이 왜 싫냐고? 오래 고민해 대답할 것도 없다. 크롬의 주소창에 포털사이트의 이름을 넣는 것만으로도 수십개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은 7월 26일 일요일,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포털사이트의 메인에는 뻘과 녹조, 큰빗이끼벌레로 뒤덮여 썩어가는 낙동강에 관한 기사와 새누리당이 법인세 증대는 포퓰리즘이라며 악악댔다는 기사가 함께 떠 있다.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학부모가 여성 교사를 폭행했다는 뉴스와 공군 준위가 회식 도중 20대 여성 하사의 턱을 잡고 강제로 술을 먹였다는 뉴스가 보인다. 슬슬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혈압을 좀 낮춰볼까 하고 연예 섹션을 클릭했다가 바로 후회한다. 언제나처럼 나열되어 있는 '누군가의 몸매' '누군가의 미모' '누군가의 뒷태' '누군가의 다리' '누군가의 가슴' '누군가의 엉덩이' 사진들…하아. 어린애부터 노인네까지 누구나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이런 사진들로 장식되어 있는 게 당연한 일인 이 나라, 정말이지 싫다, 싫다, 싫다.


언제부터 그렇게 싫었냐고? 글쎄다, 생각이란 걸 하고 살게 된 이후로부터는 쭉 그랬던 것 같은데.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 써야 하는 시험에 '우리나라 만세'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따위를 줄줄 적어내고 100점을 맞던 어린이 시절이 지난 후, 나라가 국민을 위해 한다는 수많은 일들 중 나를 위한 건 거의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면서부터 쭉 이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당연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 "야, 아프리카 같은 데 안 태어난 게 어디냐." "너 인도에서 수드라 같은 걸로 태어났으면 어쩌려고 그래." "조선 시대 같은 때 태어나서 죽어라 고생해 봐야 그런 말을 안 하지." "북한에서만 태어났어도 이미 굶어 죽었어!" 운운. 아오, 내가 내 나라 싫다는데 왜이렇게 꼰대질이세요. 다른 나라나 사회나 시대에서 태어났으면 여기서 태어난 것보다 백퍼센트 불행하게 살았을 거라는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 건가요. 존나 짜증나니까 그만 닥쳐주세요.


그러고 보면 계나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꽤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10-11쪽)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61쪽)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103쪽)


게다가 애국가 얘기까지 한다. 계나 역시 어렸을 때 애국가 가사를 외워 적으며, '대한으로 길이 보전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라고 고민해봤나 보다. 나이를 좀 먹은 후엔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아 무슨 노래로 충성을 요구해-_-'라고 투덜대봤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171쪽)



하지만 나는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 떠나려는 생각도 안 한다. 외국 시민권을 딴다고? 외국에서 직업을 구해 먹고 산다고? 꿈도 꿔 본 적 없다. 그래서 꼰대들의 참견질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렇게 이 나라가 싫으면 딴 데 가서 살아. 누가 너 붙잡냐?" "딴 나라 갈 거 아니면 좋게 좋게 생각하고 살아. 어차피 살 나라인데 좋아하고 살아야지, 싫어해서 좋을 게 뭐 있어?" 남의 삶에 자신의 오지랖을 한 번이라도 펼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걸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리하여 귀를 막고 생각해 본다. 왜 나는 이곳을 못 떠나는가. 1차적으로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겠고-_- 2차적으로는 한국어 이외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가진 것들을 버릴 수 없어서인가-비록 엄청나게 대단한 걸 갖고 있진 않지만, 어쨌든간 내가 쓰는 책상이 놓여져 있는 직장과 부양해야 할 가족,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어떤 의미로든 만족하고 있는 건가. 비록 이런 나라에서의 삶일지언정, 긍정하고 있는 걸까. 흠.


힌트는, 이번에도 계나의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내가 뭘 하겠다고 나서건 그게 성공할지 성공 안 할지는 몰라. (중략)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151쪽)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중략)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중략)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실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야.(153쪽)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 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그런데, 그 근성 못 고치면 어딜 가도 똑같아. 호주에 와서 교민이 유학생 무시하고 유학생이 워홀러 무시하는 식으로 이어져. 그 근성 고치려면 자산성 행복을 좀 버리고, 현금 흐름성 행복을 창출해야 해. (186-187쪽)


나도 계나처럼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다. 내가 뭘 하고 있는가보다 뭘 하고 싶으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뭘 하고 싶으냐의 '뭘'은 직업이 아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빠짐없이 가고, 좋아하는 음악 듣고 싶을 때 듣고 싶다. 많이 읽고, 많이 걷고, 많이 웃고,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눈치 덜 보면서 최대한 당당하게 하고 싶다. 그 정도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갖고 사는가'가 '장래희망'과 동일어로 여겨지는 이 나라가 싫다. 직업은 직업이고 미래는 미래고 삶은 삶이고 희망은 희망이니까. 그 넷이 다 같은 게 절대로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 나라를 떠난다고 내가 행복해지나? 이 나라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언어라고는 한국어 하나 뿐인 내가 외국에 가면 뭘 해서 먹고 살겠는가? 덩치도 작고 물리적 힘도 세지 않은데다가 아시안이고 여자인데, 범죄(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강간이나 절도)의 표적이 되기 딱 좋지 않나? 인종 차별은 또 얼마나 당하겠는가? 여기서의 삶이 녹록치 않은 내게, 그 어디에서의 삶이 녹록하겠는가? 더 힘들면 더 힘들지, 안 힘들 리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야!'라는 말은 대통령이 바뀌면/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면/재벌이 해체되면 나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정치가 갑자기 깨끗해지고 경제가 확 살아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만큼이나 대책 없는 소리다. 나를 괴롭히는 환경적 요인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특성에서 기인함은 사실이지만, 내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한국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계나만큼이나 현금 흐름성 행복을 충분히 누리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거다. 계나처럼 나 역시 자산성 행복보다 현금 흐름성 행복을 중시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삶이란 원래 고통이라 여기는 인간이다보니 '이 나라에서 얻는 현금 흐름성 행복'으로도 삶을 지속하는 데 (아직까지는) 지독한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나는, 한국 때문에 시시때때로 불행해져도, 너로 인해 내 행복을 저당잡히지는 않겠다고 의지를 다지며! 네가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나는 별일 없이, 별다른 걱정 없이, 이렇다 할 걱정 없이 산다고 장기하처럼 목청을 높여 신나게 노래하는 수밖에 없다. 네가 싫어도 나는 꿋꿋이 잘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신나게 웃으며 탕탕탕 배를 두드리는 수밖에 없다. 사람대접 안 해 주는 이 나라를 저주하며 떠나는 대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사람대접을 해 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SKY 나왔다고 인서울, 수도권, 지방대 애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벌레에 불과하다면 어느 나라를 가서 어느 직업을 갖든 간에 남을 무시하는 것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 벌레일 뿐이니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계나의 말이 자꾸 생각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 내 현재가 조금은 가엾고 안쓰럽지만, 지금은 여기에서 벌레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아직은 이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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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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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고, 사전에서 nemesis의 뜻을 찾아본 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멍해지고 말았다. 응당 받아야 할 벌, 피할 수 없는 천벌이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해도, 여기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려고 해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닐 천형(天刑). 목숨이 끊어지기 이전에는 버릴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운명. 문득 청산별곡의 '돌'이 떠올랐다. 더불어 어디다 던지는지 누가 맞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돌을 계속 맞으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울고 있는 '나'도.

캔터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었을까.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어깨에 짊어진 채 끊어지지 않는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는 인간.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고도 바꾸려고도 하지 않고, 비참함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끌어안은 존재.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 왠지 서글퍼졌다.


캔터 선생님, 아널드 메스니코프예요. 챈슬러 놀이터에서 놀던. (245쪽)
책의 40쪽 정도가 남았을 때, 그러니까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2차 대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미국에 남아 있던 버키 캔터가 놀이터 감독으로 일하다가 자신이 지도하던 아이들이 폴리오로 하나둘씩 목숨을 잃자 애인인 마샤가 일하고 있는 인디언힐로 떠나 자신만 안전한 피난처로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캠프에 폴리오가 퍼져나가자 자신이 건강한 감염 보균자인지 검사를 받으러 떠나던 때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던 궁금증은 '정말 캔터가 폴리오를 퍼뜨린 걸까?'가 아니었다. 왜 이 소설의 서술자는 캔터를 '캔터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을까 하는 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마샤는 마샤고, 도널드는 도널드고, 호러스는 호러스고, 할머니는 할머니인데, 왜 캔터는 캔터가 아닌 '캔터 선생님'이지? 이 호명이 의미하는 건 도대체 뭐지? 자꾸 거슬렸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무릎을 쳤다. 이 소설이 작품 밖 전지적 서술자의 시점으로 쓰인 게 아니었음을-이것이 필립 로스의 서술에 나타나는 대표적 특징임을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바로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마치 작가인 듯 시치미를 떼고 캔터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뒤엎어 놓았던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던 서술자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챈슬러 애비뉴 놀이터에서 놀던 소년들 중 한 명이었던 아널드로서 전면에 등장한다. 자기 역시 1944년 폴리오에 걸려 오랜 시간 고생했으며, 세월이 한참 흐른 1971년에야 캔터를 다시 만났다며.

캔터는 아널드와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점심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빠뜨리는 것 없이, 자기반성적인 태도로,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모든 것을, 전반적으로 뿌리 깊은 좌절의 분위기로.

그는 미국에서 폴리오 피해자의 가장 위대한 모범인 FDR와는 정반대로 병에 걸리면서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이르렀다. 마비와 그뒤에 온 모든 것으로 인해 그는 사나이라는 자신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삶의 그쪽 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중략) 그는 마비된 뒤로는 결혼은커녕 누구와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시든 팔과 시든 다리를 의사,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할머니 외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246-267쪽)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야. 내가 한 짓은 한 짓이야. (249쪽)
캔터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도둑인 아버지, 출산 중에 죽은 어머니, 폴리오로 인해 잃어버린 건강과 자신감, 놓아버린 연인,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이 폴리오로 죽은 아이들…왜 신은 이런 운명을 캔터에게 주었을까? 숨이 붙어있는 동안 내내 자신의 불행을 강화하고 확대하면서 삶의 순간 순간을 끝없이 망치는 삶을, 왜,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걸까? 캔터의 말처럼 모든 일은 그의 죄에서 비롯해 벌어진 것이고,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으니, 아주 작은 구원도 위안도 그에게는 불가능한 걸까? 그게 당연한 걸까?

내가 얼마나 억울해해야 하는 걸까? (264쪽)

어쩌면 캔터의 말이 맞다. 이 일은 억울한 일이다.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밝히려 들어 봤자 끝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결과는 엄청난 파멸이니까. 그렇기에 캔터는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좆같은 새끼와 사악한 천재가 합쳐진 하느님이 자신을 악한 존재로 형상화했다고 믿으며,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한다; 나는 절대 과거의 내가 될 수 없을 거다. 대신 평생 이런 존재로 살 거다. 나는 다시는 기쁨을 알지 못할 거다…라고.

문득 이승열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난다. WHY WE FAIL WE DON'T KNOW…그리고 현명한 마샤의 말이.

너는 늘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끔찍한 하느님이 책임을 지거나 끔찍한 버키 캔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책임은 둘 중 누구에게도 있지 않아. (261쪽)




어쩌면 그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을지도 모른다...그렇다 해도, (275-276쪽)

캔터가 모든 악의 근원일지도 모르고 모든 파괴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해도, 캔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죽어나갔으므로 캔터와 함께 있었다면 마샤 역시 불행 속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한때, 캔터가 아이들에게 무적의 존재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를 통해 소년들은 남성을 배웠고, 그와 같은 남성이 되고자 꿈꾸었다. 비록 그 찬란한 시간이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해도, 빛이 사라진 후 남은 건 그보다 훨씬 길고 지독한 암흑 뿐이었다 해도, 스물 세 살의 캔터는 분명 느긋하고, 친절하고, 공정하고, 사려 깊고, 안정적이고, 상냥하고, 정력적이고, 늠름하고, 확신에 찬 젊은 남자이자 동지이자 지도자였다-1944년 이전까지.


그 찬란한 순간이 있었으므로 캔터의 삶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 찬란한 영광을 경험한 이후의 절망은 더더욱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그 찬란한 순간을 떠올리며 캔터가 남은 삶을 극복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캔터의 고통은 캔터에게 절대적인 것인데, 내가 뭐라고 캔터에게 의지를 요구한단 말인가. 의지를 가장 필요로 했던 건, 당연히 캔터였을 텐데.


그래서 결국, 나는, 모르겠다. 왜 캔터가 이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캔터가 구원받지 못한 게 당연한 건지, 평생토록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떠올리고 또 떠올리는 게 폴리오 이후의 여생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나는 모르겠다.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소설을 쓴 필립 로스마저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해도 나는 마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삶을 누리려 했던, 순간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려 했던, 마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그녀는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꾸짖던 캔터와 달리 사랑하는 이를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루해진 자신이 부끄러워 스스로를 버리라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밀쳐내던 캔터를 향해 진짜 기형이 된 건 캔터의 몸이 아닌 마음이라고 외쳤다. 그 용기가, 노력이, 삶에 대한 애정이, 아름답고 부러워서, 마샤와 함께 했다면 캔터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믿어보고 싶다. 가족이 있었기에 제 운명을 비난하는 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아널드처럼, 캔터 역시 그럴 수 있었더라면 책을 덮는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지 않았을까.



대학 마지막 해에 아내를 만난 겁니다. 그러자 서서히 폴리오가 유일한 드라마가 아니게 되고 젖을 떼듯 제 운명을 비난하는 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저는 1944년 그곳 위퀘이크에서 한 여름에 걸쳐 벌어진 사회적 비극을 겪었지만 그것이 평생에 걸친 개인적 비극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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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대학 시절 근현대 문학을 공부할 때, 창조니 폐허니 백조니 시문학파니 카프 등등을 나열하는 교수님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삼아 나는 종종 공상에 빠지곤 했다(확실히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다). 함께 글을 쓰고 나누며 세계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문학과 자신의 문학을 만들어갔을 그들. 그 곁에 관찰자로서 그들과 함께 경험과 감정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분명 있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그 관찰자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특히 내게 흥미로웠던 존재는 9인회였고 관심 깊게 들었던 건 이상과 그 친구들의 뒷이야기였다. 이상과 김기림과 이태준과 정지용과 김유정과 박태원 등등이 함께 다방에서 MJB의 미각을 향유하는 모습이나 명동 거리를 함께 걷는 모습, 농담을 툭툭 건네고 있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으면서 그런 상상을 오랜만에 다시 했다. 저쪽에서는 사르트르가 담배를 피워대며 글을 쓰고, 이쪽에서는 전직 소련 의사와 전직 소련 공군 조종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체스를 두고, 전직 헝가리 유명 배우는 전직 자신의 매니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그 사이를 전직 체코 외교관과 현직 경찰관이 지나가는 가운데, 소년 하나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는 장면이라…왠지, 그 시절 공상의 순간처럼,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살아 있고 우리는 자유롭다. (1권, 124쪽)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페이지마다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는, 백화점 같은 책이다. 서술자인 미셸은 물론이고 미셸의 가족들, 친구들(사실 니콜라 말고는 또래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진 않지만, '발토'의 이고르와 파벨과 블라디미르와 임레와 레오니트 등등도 나는 미셸의 '친구들'이라고 생각한다. 왜 아니겠는가?)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 나 이거랑 비슷한 사람 어디선가 봤는데…'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어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개성이 지나쳐서 너무 이상하거나, 현실감이 전혀 없거나, 누가 봐도 '헛 이거 지어낸 티 너무 남-_-'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게다가 재미있다. 특히 재미있는 장면은 역시 싸움 장면인데(이게 참 어쩔 수 없는 거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멤버들끼리 흥분해서 모국어를 주고받으며 싸우는 장면이라든지 미셸네 가족이 소리소리 질러가며 싸우는 장면이라든지 프랑크와 세실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는 장면은 대부분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책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던 것도 혈연의 기적, 이를테면 다른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화, 절대적인 신뢰, 본능적인 융합 따위 전혀 없는(!!!!!) 미셸의 생일 잔치 장면에서부터였다. 오, 이 작가, 유머를 아는 사람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으니까. 예를 들면 이런 느낌.

그들이 함께 어울리는 시간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었다. 어중간한 것은 없었다. 자기들이 떠나온 체제를 혐오하는 사람들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느닷없이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두세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게 신호탄이었다. 그들이 이고르가 세운 규칙을 어기고 프랑스어 대신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말싸움에 끼어들었다. 무엇 때문에 언쟁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여러 언어가 뒤섞이는 그 바벨탑의 혼란은 대개 십 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굵직한 성인 남성들의 목소리가 쨍쨍 부딪치며 난장판을 되어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움찔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모른 척하는-물론 소년 시절의 미셸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을지 모르겠지만-미셸의 목소리가 어찌나 의뭉스럽게 느껴지던지!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겪었는지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알겠니? (1권, 423쪽)

하지만 당연히도, 그리고 조금은 서글프게도 이 이야기가 마냥 재미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클럽의 멤버들은, 미셸의 설명을 빌리자면 대부분 비극적이거나 기괴한 상황에서, 대개는 외교를 위한 여행 도중에 서방으로 넘어옴으로써 고국으로 도망 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난민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별 생각 없이 믿어 왔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난민으로 인정받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아니었던 아니었던 거시다-_-(아무래도 이 편견의 근본 원인은 홍세화씨인듯…으잉?).


공산주의자였거나 여전히 공산주의자인 그들이 여전히 공산주의에 대해 얘기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부딪히고 부딪치는 모습이,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상이 용도폐기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나, 고난을 감수해야만 그 사상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나, 현실이 녹록치 않은 건 마찬가지이니까.


자신들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짙은 비애가 묻어 있었다. "사람들은 멍청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걸."이라고 투덜거리는 임레의 목소리에조차. 클럽 멤버들에게 배척당하고 형인 이고르에게 욕을 얻어 먹으며 죽는 순간까지 용서란, 화해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사샤의 존재는 이러한 비애감을 더욱 강화한다. 사샤가 했던 일이 존재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음은 특정한 세력의 조직적인 조작이 국가를 위한 일로 정당화되고 당연시되었던 어두운 시대의 모습을 그림처럼 담아내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존재했던 것의 순간을 아름답게 담아내려던 미셸과 사샤가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사진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만남이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행인 건, 그들이 과거로 인한 고통을 되새김질하듯이 씹고 씹고 또 씹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無)로 화하고 말 것이라는 것 역시 잊지 않고 지낼 만큼의 현명함을 함께 갖춘, 낙천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고르의 이 말처럼 : "우리가 낙천주의들이 아니라면, 누가 낙천주의자이겠소?" 물론 여전히 외롭게 떠나야 했던 사샤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사샤의 장례식에서 그들은 증오와 잘못을 마음속에 두지 말자고 다짐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야겠지.



미셸,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1권, 27쪽)

아쉬운 점은,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그 이후에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이 계속 남아, 뭔가 이야기가 더 이어져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크와 세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크가 세실에게 한 말은 정말이었을까? 세실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게끔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후로 영영 갈라져 버린 걸까? 쥘리에트는 계속 말 많은 여자 어른이 되어 남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을까(사실 나에게는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쥘리에트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소녀라니, 얼마나 외로울까ㅠ). 사샤를 보낸 후 이고르는 어떻게 살았을까? 레오니트와 밀렌은? 마들렌은? 자키는? 빅토르는? 그 외 클럽의 또다른 인물들은? 이거 진짜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 거 아냐? 외전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 나는 어디선가 새카맣게 탄 얼굴로 뙤약볕 아래에 앉아 있을 프랑크를 상상해 보고, 이고르와 레오니트와 파벨과 블라디미르와 임레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택시 운전석에서 또다시 사기를 치고 있을ㅋㅋ 빅토르를 상상해 보고, 엔조 할아버지 옆에서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있는 미셸의 아버지를 상상해 보고, 카미유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가는 미셸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어쩄든간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모두 낙천주의자이며, 우리가 낙천주의자라는 사실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임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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