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어제 자라섬 포크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나의 메인ㅋ인 승열오라버니의 순서를 기다리며 앞 공연들을 보던 중 문득 이 책 생각이 났다. 동물원 아저씨들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듣던 중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소리 없이 내 맘 말해볼까

울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비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즈막히

말없이 그대를 보면 소리 없이 걸었던 날처럼 아직은 날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난 한없이 서 있소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바람 속에 서성이고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비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즈막히

내 노래는 허공에 퍼지고 내 노래는 끝나지만 내 맘은 언제나 하나뿐


내 머릿속에는 김광석씨 목소리로 기억되어 있는 저 노래를 유준열씨 목소리로 듣는데, 나도 모르게 '사랑'과 '노래'가 '마음'으로 들렸다. 문득 경애의 마음의 경애와 상수가 떠올랐다. 책상 위에 엎드려 유령 같이 있었을 때도 강하게 움직이던 경애의 마음이,쏟아지는 악플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면서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상수의 마음이, 저 노래와 함께 느껴졌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풀어보지 못한 마음은,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듯 느껴지는 마음은, 그래서 허공에 퍼지고 끝나버린 것 같은 마음은, 어디도 가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한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애가 산주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풀어보지 못해 '언니'에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듯이. 경애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그녀임을 알고 난 후의 상수가 경애의 곁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듯이.



2. 너무 한낮의 연애를 작년에서야 읽었다. 젊은작가(라는 말 참 늘 마음에 안 든다…) 정확히는 등단한지 얼마 안 된 작가의 신간을 남들(정확히는 '비평가들')이 하도 좋다고 좋다고 하면 금방 읽고 싶지가 않아진다. 좀더 기다렸다가 좋다는 사람들(정확히는 '독자들')도 있고 안좋다는 사람들도 있을 때 읽고 싶어진다. 참 이상한 반항심이다ㅋㅋㅋㅋ 그러다 보니 1년이 지났고 이쯤이면 괜찮겠다 싶을 때 읽었다. 


기대보다 훨씬 좋았고, 표제작 아닌 소설들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제목으로선 표제작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을 꼭 읽고 싶었는데 우연히 김금희소설가의 신간, 그것도 장편소설!!!!!!이 창비에서 곧 출간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출간 전 가제본을 읽을 수 있는 서평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도.


책을 읽고 후기를 쓴 지가 워낙 오래 되었고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일도 자주 못하고 있는지라 과연 뽑힐까 반신반의하면서 응모했는데, 운이 좋게도 선정되어서 가제본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 경애의 마음을.



경애라는 우리말 옆에 굳이 병기된 敬愛를 보고 '아하 이건 사람의 이름 같지만 실제로는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그 경애인가보구나'하고 확신했다. 첫장을 넘기자마자 상수라는 등장인물이 주인공 느낌을 풍기며 등장하는 걸 보고 그럼 그렇지, 상수가 누군가에게 갖거나 상수에게 누군가가 갖는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로구나! 라고 한번 더 확신했다. 그래서 경애라는 사람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조금 실망했지만ㅋ 이 경애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왜이렇게 공감이 되는지. 빠른 속도로 경애에게 빠져들었다. 경애의 마음을 더듬는 듯한 기분으로.


동시에 상수의 이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속 편할 것 같은 상수의 삶에 대해서도. 변수가 없이,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아야만 했을 것 같은 상수에 대해서도. 그 때문에 더욱 자신의 삶에 변수를 만들고 싶어했을 상수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러고 보면 김금희소설가는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많은 공을 들이나보다. 조중균씨나 필용이나 세실리아의 이름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처럼 상수와 경애 역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으니까.



3. 마음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경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도 한때 그랬다.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는 게 강한 거라 생각했고 강해지려면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단단해지겠다는 생각으로 딱딱해졌다. 감정을 주고받지 않으려 애써 숨겼고 숨겼던 감정이 비어져나올 때면 냉소로 급히 마음의 틈을 가렸다. 힘들었으니까. 더 힘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주고받는 순간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이 팍팍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는 걸. 아무리 경애가 어둠을 만들고 싶어했어도 완벽한 어둠이란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경애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리는 마음은 종종 기도하는 마음이 됐고, 그 마음은 너무 강하게 움직였듯이.



간절히 기도하듯이 정지해 있던 경애의 마음에 누군가의 마음이 닿았다면, 그때의 경애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 갑자기 울컥했다. 



4. 등장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묵직하다. 호프집 화재 사건, 부당해고, 노조 내 성폭력, 사측의 일방적인 전보, 해외 지사에서의 부패와 비리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술값을 못 받을까봐 문을 잠가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호프집 사장이나 성폭력 사건을 문제삼는 경애를 배신자 취급하는 노조원들, 경애와 헤어지고 결혼한 후에도 자기가 필요할 때면 남의 사정 따위 생각하지 않고 찾아와 징징대는 옛 애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매매에 몰두하는 한국 남자들 모두 너무나 익숙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놈의 나라는 왜 이모양이지 도대체…하며 계속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0인위 사건도 생각나고 씨랜드도 생각나고 세월호도 생각나고 밀양도 생각나고 MBC도 생각나고 코피노 문제도 생각나고…자꾸 속이 쓰렸다. 


하지만 저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배경이거나 소재일 뿐이다. 최근 30여년 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을 사건들을 툭툭 건드려 가면서 도달하는 곳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을 주고받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자기의 마음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누군가를 할퀴고 울리고 죽이고 무기력에 빠뜨리는 곳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누려 노력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은근하면서도 따뜻한 말투로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래서 나는 페이지를 술술 넘기다가도 자주 멈췄고, 누군가를 떠올렸고, 눈물을 글썽였다.



5. 누군가는 이 소설을 연애 소설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은총과 경애의, 경애와 산주의, 경애와 상수의 연애 소설이라고. 


나는 잘 모르겠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커플의 이야기로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애와 상수의 연애 이야기 같은 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냥 경애와 상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상수의 말처럼, 마음을 폐기하지 말고 파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들에게 은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그들이 함께 기억하는 친구의 이름이 은총인 건, 은총의 기억으로 이어진 그들이 서로에게 은총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6. 함께 살아낸 같은 시대의 기억을 유려한 글로 그려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이것은 내가 받은 은총이고, 김금희소설가께 감사하다. 많이 읽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