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상 라디오
이토 세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지난달부터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가 있다. 416의 목소리라는 방송이다. 정혜윤 PD가 제작하고 김탁환 소설가·함성호 시인·오현주 작가가 진행하며, 매 회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나오신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방송의 부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야기는 끊기지 않을 거라는 절박함이 문자에 스며 있는 듯했다. 1회가 올라왔던 날, 경빈이 어머님 목소리를 듣다가, 문득 상상 라디오가 떠올랐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저녁인지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던 상상 라디오의 DJ 아크가.
맨 처음 상상 라디오의 표지를 넘기고 DJ 아크의 독백인지 방백인지 모를 '말'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이 얘기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려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두서없는 수다에 당황해 '어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니야…'라며 표지를 덮어버렸었다. 그러다 다시 저 책을 펼쳐들었던 올해 1월 초,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기 전 차례를 확인하고는 깨달았다. 아, 죽은 자란, DJ 아크를 가리키는 말이었구나…
그렇다. 이 책은 죽은 자의 목소리-귀를 기울이면-넋을 위로하며-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구원의 노래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각 챕터/장의 제목이 스포일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밴드 매니저를 하던 아쿠타가와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다음 날 후쿠시마 대지진의 희생자가 된다. 빨간 재킷을 입고 있던 그는 물살에 휩쓸려 가고, 삼나무로 덮인 산쪽으로 빠르게 밀려가, 높은 삼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남은 이들에게 목격된다.
저는 높은 나무 위에 있습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자란 삼나무의 대열 속. 하늘을 찌르는 듯한 가느다란 수목의 거의 꼭대기에 걸려서 목을 뒤로 젖힌 채 누워 마을을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길가메시 신화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높은 곳에 혼자 남아 버렸습니다. (25쪽)
재해가 일어난 지 반년 뒤, 고지대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미야기 현 해안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들고 간 내게 젖은 목재와 걸레처럼 뒤틀린 금속 덩어리, 색색의 천과 생활용품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표면에는 파리나 까마귀가 엄청나게 발생한 장소 너머로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작은 강의 상류를 가리키며 불쑥 한 말. 산을 두개 넘어간 곳에 있는 삼나무에 한동안 사람이 걸려 있는 걸 본 기억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57쪽)
어떤 '재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갖게 되는 첫 번째 마음은, 아무래도 미안함 아닐까. 왠지 모를 죄책감. 내가 죽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나 대신 저 사람이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내가 저 사람보다 뭔가를 더 잘했고 뭔가가 더 잘나서 살아남은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의 죽음과 나의 살아남음이 아무 상관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 심지어 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내 속에 있던 무언가도 같이 죽어버린 것 같다는 아주 막연한 느낌. 그런 느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미안함. 나는 살아남았으니,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그렇기에 누군가는 재해의 현장에 가서 봉사를 하고 아픔을 나눈다. 아픔이란 게 나눈다고 줄어들 리 없음을 잘 알면서도, 아픔의 공간에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살아남음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 이들의 귓가에, 아쿠타가와가 전하는 소리들이 전해진다. DJ 아크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소리가.
삼나무에 매달린 아쿠타가와는 수다쟁이 DJ 아크가 되어 방송을 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했던 말을 풀어놓는다.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서, 왜, 누구를 향해, 이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고 노래를 튼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메일이 도착하면 읽어 주고, 어떻게 연결됐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연결되면 통화를 한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던 1장에서의 아크는, 3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함께 웃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중계'하는 그들의 모습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특히 어둠 속에서 혼자 헤매던 이들이 아크의 목소리 덕분에 만나는 장면,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로 어둠 속에서 함께 버티고 있던 3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이 날 뻔했다.
저는 기둥의 맨 밑을 잡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깊은 어둠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아크 씨, 당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나는 쪽으로. 그러자 하늘하늘 흔들리는 차가운 손이 잡혔습니다. 저는 거침없이 그것을 잡았습니다. 누군가의 왼손이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우리 방송의 청취자이기 때문이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의 구석입니다. 손전등이 그 파란 화살표를 부옇게 비출 뿐입니다.
지금도 좁은 층계참에 웅크리고 앉아, 그 사람이 더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중략) 이렇게 있으니 오히려 내가 잡고 있는 가라앉아 가는 손이 나를 구원해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121쪽)
아크는 이제 그만 떠나자는 아버지와 형을 먼저 보내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깨닫는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아내를 보고 싶어서.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신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지낼지 생각하면 석쇠 위에서 몸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초조함과 무력함과 미안함이 몰려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면 부디 두 사람 마음이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잔잔해지기를, 저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가까이에 있어주기를 바란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가까이에 있고 싶고, 정토로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미사토와 소스케의 말에 달렸습니다. (195-196쪽)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하겠다는 아크를, 수많은 영혼들이 응원한다. 집중해서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아크와 같이, 아크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들에게도 남편을 칭찬하는 미사토 씨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소스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크처럼, 살아남은 누군가를 보고 싶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의 어둠 속을 맴돌고 있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리고 아크는 미련 없이, 웃으며, 떠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세월호가 떠올랐고, 여전히 아이들을 보내지 못하고 계신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 중 한 명도, 아직, 아크처럼, 웃으며, 떠나지, 못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저렸다.
…상상 라디오를 읽으며 세월호가 생각났듯이, 416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크를 떠올린다. 아무 잘못도 이유도 없이 차가운 물 속에서 구해주러 오는 이들을 기다리다가 죽어갔을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나 또다시 죄인 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다 문득, 416의 목소리에서 부모님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어쩌면 아이들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크처럼, 그 아이들도, 계속 이 차가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부모님들이 계속 아이들에 대해, 세월호에 대해, 4월 16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누군가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다면, 떠나지 못하고 어둠 속을 떠도는 아이들이 조금은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더 많이 저려온다.
416의 목소리는 현재 5회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5회가 올라왔고 다섯 분의 어머님/아버님이 출연하셨다. 수학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못했던 경빈이와, 민지와, 건우와, 승묵이와, 영만이의 어머님/아버님. 솔직히 방송을 끝까지 다 듣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방송이 더 널리 들려지고 퍼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을 떠올려 주고, 세월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삶의 구석구석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절대 잊지 않기를 약속하겠다고, 새삼 다짐해 본다.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함께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