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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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신기한 제목이다. 천하무적인데 왜 불량하다는 걸까. 감독이 포악한가. 선수들이 사고를 많이 치나. 상식적인 선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정도였기에, 궁금했다. 이것이 이 책을 집어든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의 작가가 주원규라는 것이었다. 혁명이나 변혁 같은 거대 담론이 낡아빠진 이야기가 된 시대라 그런지, 아직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는 작가를 만나면 반가움이 먼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의 전작 <열외인종 잔혹사>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이었고, 혁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주원규가 만들어낸 야구 이야기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이야기는 꽤 전형적인 '야구 소설'의 흐름을 따라갔다.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을 열심히 훈련시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는, 가난한 구단 삼호 맥시멈즈의 감독 김인석을 중심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진행된다. 코리안시리즈에서 상대하게 될 팀은 가난한 모구단을 인수할까 말까 하고 있는 부자그룹 미성의 프로야구단 스틸러스. 최소한의 스포츠맨십마저도 자본과 생존의 논리에 따라 버리고 마는 맥시멈즈의 구단주와 주전 선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승리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는 '괴팍한 감독'과 뭣도 모르고 그 감독의 일생을 건 승부에 말려 버린 과거의 4번타자 장석준, 철부지 파이어볼러 강태환, 어리바리 2군 선수들 다섯 명.

스포츠 소설이니까 당연히 주인공이 이길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봐도 맥시멈즈에게 너무 상황이 불리해 보여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이러다 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러워서, 결국 맥시멈즈가 우승했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힘이 좀 빠지기도 했다. 하, 결국 전형적인 야구 소설이구만. 온갖 난관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쥔 영웅들의 이야기...뭐 이런 거 아냐? 라는 생각에 조금의 배신감도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길 수 없을 만한 상황을 초인적인 의지로 헤쳐가는 주인공의 승리를 확인한 후의 안도감이 지나가고 나면 '에이 소설이니까 이기지, 현실이라면 이길 수 없었어'라는 생각에 쌩하니 고개 돌리게 되는 것이 스포츠 소설을 읽고 나서 보통 느끼는 감정이다보니.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맥시멈즈의 승리는 정말 승리였을까. 맥시멈즈가 승리를 한 후, 구단의 패배를 확신(하다못해 소망하기까지)하고 있었던 프런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구장을 가득 채운 스틸러스 팬들의 반응이 말도 못하게 싸늘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공중분해되기 직전의 모그룹이 우승한 구단에게 특별한 보너스를 주었을 것 같지도 않고. 원래부터 인기팀도 아니었던데다가 한국시리즈가 진행되는 내내 중계진으로부터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들어먹었으니 언론의 보도도 호의적이지 않았을 테고. 감독은 그만둬, 승리의 주역들은 '콩고물'도 얻어먹지 못한 채 흩어져, 팀은 공중분해돼, 이게 뭔 승리야, 이런 걸 승리라고 할 수 있어? 

맥시멈즈는 분명 한국시리즈를 이겼지만, 현실에서도 승자가 될 순 없었다. 김인석도, 장석준도, 강태환도, 2군 5총사도 우승을 통해 승리자다운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거둔 승리는 야구장 안에서의 승리였을 뿐이다. 장석준의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야 감동스러웠다만, 장석준의 현실은 병원에서 쫓겨난 아들을 위해 병원 앞에 서서 1인시위를 하는 아버지인 것이다. 아, 슬프고 씁쓸하다...하면서 책을 덮기 직전,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읽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조차 기회와 역전의 가능성이 주어진 각본대로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패배가 결정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 판을 아예 둘러엎고 우리들만의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님 그 판에 주어진 각본대로 적당히 순응하는 착한 선수가 되는 게 옳을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님 그 판에 머물러서 주어진 각본과 역할을 걷어치우고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버텨내는 '불량주전'으로 살아남는 게 좋을까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 p.431,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다. 어려운 문제다. '그 판'을 좌지우지하거나 또다른 '판'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능력 따위 조금도 없는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어진 것이 매우 제한적이고 그 주어진 것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제한적임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을 만든 그 자들은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그러니 너는 그 기회를 잡아 노력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따라서 실패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남들만큼 애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사람이니 동정할 것 없다고 말한다. 또는 연민에 찬 눈빛으로 '지금 네 상황에선 어렵겠지만, 네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아니, 내 뒤를 따라올 수 있어'라며 은혜를 베푼다. 역겹기 짝이 없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매일 고민한다.

어쩌면 작가는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비현실적인 야구 소설을 쓴 게 아닐까.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움으로써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킨 현실의 패배자들에게 불끈 쥔 두 주먹을 흔들어 보여주는 건 아닐까. 비록 그 싸움을 통해 '정말로 내가 얻은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싸워 보자고. 지지 말자고. 버텨 보자고. 그래서 살아 내자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났더니, 이 이긴 것 같지도 않고 진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왠지 고마워졌다. 쑥스럽게도.


+ 사족
이 책의 또다른 재미는 역시 야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무사에 일부러 만루를 채우게 하는 것을 비롯, 온갖 기상천외한 김인석의 작전들, 초단기 2천스윙 특훈, 전형적인 캐스터와 해설자의 멘트 등등을 통해 작가가 야구를 꽤 많이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선수들과 구단을 연상케 하는 부분들이 요소요소 숨어 있었다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맥시멈즈를 볼 때는 넥센이, 스틸러스를 볼 때는 엘지+삼성이 생각났다.  김인석은 김인식과 김성근을 적절히 합쳐 좀더 괴팍하게 만든 인물 같다. 강태환은 김광현+류현진+돌아이인가 싶었는데 묘하게 김진우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석준은 장종훈+양준혁에 좀더 극적인 요소를 섞은 인물 같고. 그 외에도 강선동, 유현종, 고형민, 박철수, 장민혁, (타자) 윤길현, 이동수 등등의 이름이 보일 때마다 킬킬거리며 몇몇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전 메이저리거의 이름이 정지훈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ㅋㅋ 야구팬이라면 깨알같은 유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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