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와 비상사태


역마살의 마는 당연히 말馬이다. 임壬쌤은 사주에 역마가 들었다고 하는데, 역마 중에서도 글로발 역마가 걸려서 계절이 멀다하고 지구촌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팔자에 걸맞는 삶을 누리고 계신다고. 역마살은 그냥 역마살인줄로만 알았던 syo에게 임쌤이 다양한 층위의 말들을 소개해주었다. 날개 달고 국경과 넓은 바다를 한달음에 넘는 역페가수스나, 삼천리 강토를 무시로 호령하는 역적토마는 물론, 심지어 기껏해야 동네 안에서만 뽈뽈 싸돌아다니는 역당나귀도 있다는데. 그 당나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 그거 난데, syo는 그것이 바로 내가 물고 태어난 살煞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역마살이라 하긴 좀 소소하지만 그렇다고 역똥강아지살이라고 부르긴 또 좀 분주한, 바로 역당나귀살. 그쯤. 맞아. 나는 목적도 정처도 하염도 없이 몽유병자처럼 동네를 걸어다니는 그런 남자지. 


신도림에서 신림까지 도림천을 따라 걸었다. 덜 녹은 살얼음이 얕은 물결을 긋고 있었지만 날은 포근했다. 길은 넓었지만 다니는 사람은 적었다. 개울은 조용히 흘렀지만 물비늘에 반사된 햇빛이 다리 아래 그늘에 시끄러운 빛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가지는 마르고 잎도 떠나고 없지만 나무는 태연히 살아있었다. 너른 땅에 뭔가를 그려놓고 그 위로 또 뭔가를 던지며 왁자지껄 모여 놀던 검은 패딩 사내들의 흰머리는 늙었지만 웃음은 변함없이 젊었다. 개울은 흐르고, 나무는 흔들리고, 사람은 달렸다. 2월의 끝자락에 서둘러 온 3월의 햇살이 그 풍경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결혼은 하지만 신혼여행지가 몰디브란다. 간단한 총기류와 사용하기 편리한 방탄복을 권해 보았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미리 워킹데드 전 시즌 시청하고 가라고, 아무리 험한 세상 속에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들의 굳은 의지를 배워가라고 충심어린 농담을 했다. 친구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래도 다행히 시리아는 아니잖아. 역시 나의 친구. syo보다 더 긍정적이고 syo보다 더 미친 나의 오랜 친구여.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한 말이 우리가 할 말이었을까. 친구여. 오늘은 비록 우리 웃었으나, 이다음에 만나면 손 마주 잡고 몰디브와 시리아에 사는 사람들께 사과하자. 남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한번 되어 보자. 




이렇게 여러 날, 몇 주 동안 걸을 때 우리가 결별하는 것은 단지 직업과 이웃, 사업, 습관, 근심, 걱정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과 얼굴, 그리고 가면까지 버린다. 걷는다는 것은 오직 우리의 몸만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더 이상은 지속되지 않는다. 지식이나 독서, 그동안의 관계들 중 그 어느 것하나도 사용하지 않는다. 두 다리만 있으면, 그리고 볼 수 있는 두 눈만 있으면 충분하다. 걸어야 한다. 혼자 떠나야 한다. 산을 오르고 숲을 지나가야 한다. 사람은 없다. 오직 언덕과 짙푸른 나뭇잎만 있을 뿐이다. 걷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역할을 할 필요도 없고, 어떤 지위에 있지도 않으며, 어떤 인물조차 아니다.
_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우리가 지닌 유머와 선의의 저장고는 병에 의해 고갈되는 듯하며 우리가 스스로의 온화함으로부터 멀어질 때 느끼게 되는 비참함은 그 온화함을 되찾아오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저 자갈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어도 정신이 회복되어 마구 요동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우리는 붉은색이나 황금색의 깃발을, 명랑함과 원기를 보여주는 여러 징표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내가 아플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지만 왜 이런 나약함이 내 정서적인 삶에 스며들어올 수밖에 없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_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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