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1

 

이제 새로이 만나야 할 사람들, 가야 할 곳들, 통과해야 할 일들이 있을 거라면, 되도록 시작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2

 

금요일 술자리에서, syo는 지난 시절의 열정을, 친구는 초심을 이야기했다. 나는 알라딘 마을에 사는 syo라는 녀석의 현주소를 생각한다. 아직 오늘이 아니던 때, 그 녀석이 오늘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달려왔고 그 길에서 어떤 이쁨을 받아왔는지를 생각한다.

 

역시 금요일 스타벅스에서, syo는 친구의 특별함을, 친구는 syo의 평범함을 말했다. 나는 알라딘 마을에 사는 syo라는 녀석과, syo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syo라고 부르는 나 사이에 엎어진 어떤 간격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간격들은 항상 점검되어야 한다. 멀수록 좋은 간격도, 가까울수록 좋은 간격도, 그리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야 적당한 대부분의 간격들은 더더욱, 꾸준한 점검이 필요하다. 그저 감각만을 믿고 안심할 수 있을까? 제 몸 하나 스스로 간지럽힐 줄 모르는 동물의 자기감각 따위를?

 

 

 

3



나는 지금 슬프고맥이 풀리고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네. [그 이유를 모르겠네하지만 슬픔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네이것이 지속되고메마르고신랄해졌네옛날엔 이것이 '다른기쁨이나 다른 희망을 먹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네하지만 지금은 이 슬픔이 더 사실적이네.

브누아 페터스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1,069쪽짜리 데리다 평전을 1할쯤 읽었다. 구속받는 일상과 그런 일상을 견디기 어렵도록 타고난 성향 사이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며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미친 듯이 공부하기를 3, 이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그 자리는 일단 그에게 자유와 희열을 동시에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마도, 역시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명성 높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평전을 읽노라면, 그들이 고등사범학교 입학 반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가 망했다가를 반복하거나, 약까지 빨아가며 아등바등 공부하는 대목은 반드시 등장한다. 그런 위상의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입장이라 그저 떨떠름하게 읽게 된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평전들이 주인공들의 유년 시절에 대한 짧은 서술을 마치고 나면, 거의 복붙해도 상관없을 정도로(그들이 잘했던, 혹은 약했던 과목의 이름만 바꾸면 될 것 같다) 비슷한 내용과 분량의 입시 지옥 탈출기를 과하다 싶을 만치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보니, 이 과정이 저들 나라의 독자들에게 우리는 알기 어려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긴 하나보다. 사실 엘리트 새싹들이 엘리트 학교 가기 위해 아등바등 공부하여 엘리트 거목이 되는 스토리는 조금은 짜증스럽고 크게는 질투도 난다. 저들은 저렇게 자란 다음, 저렇게 자라지 않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망막으로는 읽어도 뇌세포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들을 써낼 것이다. 그리고 저들끼리 칭찬하거나 비난하면서 멋있어 보일 것이다.

 

문제는 가끔씩 그게 진짜 멋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싶은 그것들이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그 이유만으로…….

 

수련과정만 놓고 보면 syo같은 범부에게는 아무래도 스피노자 쪽이 좋았다. 독고다이에 약간 사마외도邪魔外道 냄새도 나고.

 

 

 

4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포르노를 본 적이 없었다노랑머리같은 성인영화는 봤지만거기엔 남녀 성기의 결합 장면이 적나라하게 비춰지지 않았다처음으로 남자의 성기를 자세히 봤을 때 갸우뚱했다이상한 점이 있었다망설이다가 얼마 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그와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나는 한쪽 팔을 뻗어 그의 고환을 가볍게 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이게 원래 하나인 건가?"

  "뭐가?"

  "아니이게 원래 두 개가 달린 거 아냐?"

  "하나 맞는데?"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나는 당혹스러웠다.

  "이상하네불알 두 쪽이라는 표현이 있잖아……."

  그는 몇 초간 어리둥절해 하다가 잠시 뒤 무슨 뜻인지 깨닫고 이마가 붉게 변할 정도로 웃어 댔다나는 의혹을 해소하고 싶었다.

  "책에서 그런 말을 읽었던 것 같은데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나온 말이었나."

  "잘 만져 봐그 안에 두 개가 들어 있잖아."

  그러자 정말 흐늘흐늘한 알맹이 두 개가 만져졌다혹시나 그가 불구가 아닐까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닐까 내심 염려했던 나는 안도함과 동시에 내가 안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모르고 있을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불알 두 쪽이라는 표현이 날 속였네…….“

김세희항구의 사랑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두운 작품 가운데 홀로 이질적일 정도로.

 

이야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야기만으로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여기 있다. 여기에.

 

쓰는 이의 선택과 읽는 이의 취향 사이에서 문체라는 요소는 이리저리 치이며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이건 또 쌍방이 서로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부분이라, 서로 맞지 않으면 답이 없다. 그 얇은 수요-공급 곡선이 품고 있는 매서운 현실을 고려해보자면, 결말은 선명해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깔끔하고 건조한 문체는 모든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만능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집 대문을 만능 키로 여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는 공공재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결국은 익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돌려 말하려니 어지럽다. 요지는 이렇다.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왔다면 우리는, , 이 문장들 김세희랑 정말 똑같네- 할 수 있을까? 이야기로서도, , 이런 이야기는 김세희가 잘 하는 건데- 할 수 있을까

 

 

 

--- 읽은 ---

+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 다나카 야스히로 : 203 ~ 397

+ 옥스포드 중국사 수업 / 폴 로프 : 140 ~ 447

+ 모든 사람은 혼자다 / 시몬 드 보부아르 : ~ 174

+ 항구의 사랑 / 김세희 : ~ 171

+ 딩씨 마을의 꿈 / 옌롄커 : 497 ~ 629

+ 내가 화가다 / 정일영 : 153 ~ 335

+ 나는 열정보다 센스로 일한다 / 최용진 : 177 ~ 320

 

 

--- 읽는 ---

= 묵묵 / 고병권 : ~ 132

= 미친 사랑의 서 / 섀넌 매케나 슈미트, 조니 렌던 : ~ 185

=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 브누아 페터스 : ~ 114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롄커 : ~ 210

= 화서의 꿈 / 오노 후유미 : ~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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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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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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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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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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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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