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일야 夢一夜

 

 

1 


빛 속에 빛나는 것이 없는 줄 모르고 빛을 헤집다 끝내 빛을 망쳐놓는 손. 그 쓸쓸한 손을 오래 달고 사느라 사는 게 퍽 쓸쓸할 때가 많았다.


존재한다는 것은 목이 마르지 않아도 마시는 것

아니 에르노세월 

 

 


2

 

새벽에는 꿈을 꾸었는데 오랜만에 그 사람이 나왔다. 하세월 만나지 못하고도 그의 얼굴을 잊지 않는 이유가 이렇다. 꿈 안에서,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던 그 시절처럼 그 사람을 사랑했다. 끝단과 끝단이 맞게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우리의 시간도 끝과 끝이 접붙어 있었다. 개켜진 시간이 사랑을 침범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고였다. 잘 지냈어? 어젯밤 같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나는 잘 지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지냈든 그렇지 못했든 잘 지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만난 곳은 내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쪽 큰 바다 어느 이국의 작은 섬이었다. 물었다. 여기에 어떻게 왔어? 대답했다. 너 만나러 온 거지. 대답했다. 난 여기가 처음인데. 대답했다. 나 만나러 온 거지. 그는 나를 만나러 아직 내가 없는 이 섬에 도착했고, 내가 이 섬에 도착하기 전부터 나는 이 섬에서 그를 기다렸다고. 이 말도 안 되는 시간의 실뭉치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우리의 사랑을 옮겨 심은 흔적인지도 몰라.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미쳐 있게 마련이지만 내 사랑은 유독 더 많이 미쳤으므로 기어이 이 미친 섬나라를 만든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이 나를 만졌다. 나는 힘없이 붉어졌다. 봄인지 가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속눈썹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는 부지런히 나를 만졌다. 이 섬이 봄인지 가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어? 나는 물었다. 속눈썹이 대답했다. 노을을 봐야 해. 노을을 오래 보고 있으면, 노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끝난 노을이 어둠을 밀고 우주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도착할 때까지, 이 파도에 몸을 적시며 가만히 앉아 오래 보고 있는 거지. 그러면 알 수 있어. 언젠간 알 수 있어. 너는 노을을 잘 아는구나. 나는 놀랐다. 그가 웃었다. 나는 오래 보았거든. 여기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네가 나를 기다리기를 기다리면서, 매일 매일, 너보다 먼저 시작해서 너보다 늦게까지, 나는 참 많은 노을을 보고 있었거든. 나는 조금 울었다. 그리고 묻지 못했다. 왜 네가 나보다 먼저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너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왜 나는 너를 바라보느라 우리가 봄인지 가을인지도 알지 못했던 걸까. 어째서 너는 나보다 먼저 노을을 볼 줄 알게 되었을까. 그게 내 탓일까, 네 탓일까. 그가 다시 나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손을 무엇보다 좋아했었는데, 그 손을 좋아하던 그 시절처럼 그 손이 좋았다. 동시에 그 시절의 끝처럼 슬펐다. 그때쯤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눈을 떴는데 여전히 새벽이었다. 두 시간도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나는 데, 게다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 사람 꿈을 꾸지 않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억새는 바람의 풀이다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뿐이다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빛을 품고 있다가을 억새는 날마다 말라가면서 이 꽃씨들을 바람에 맡긴다꽃씨들이 모두 흩어지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가을은 다 간 것이다.

김훈연필로 쓰기

 

  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버렸다곧바로내 손을 꽉 잡는손가락들태양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그의 따뜻한 손바닥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활짝 열리는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손을 놓았다얼마나 바랐던가바로 그때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에이미 벤더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3

 

당신을 기다리는 일은 긴 기다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오래 바라보아도 다른 것이 되지 않는 식탁 위에서

제철 음식들이 놓쳐버린 계절

지금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

 

문은 계속 바라보아도 문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슬픔이다

유계영횡단」 부분 

 


 

--- 읽은 ---

+ 헤겔 / 피터 싱어 : 78 ~ 200

+ 아무튼 식물 / 임이랑 : 7 ~ 146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이택광 : 131 ~ 263

 


--- 읽는 ---

- 철학의 슬픔 / 문성원 : 5 ~ 94

- 정신현상학 / 헤겔, 김은주 : 5 ~ 40

- 세월 / 아니 에르노 : 7 ~ 39

- 연필로 쓰기 / 김훈 : 5 ~ 66

-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이승우 : 7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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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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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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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15: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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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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