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1
자아형성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사랑이란 놈은(주로 그 성공보다는 실패가) 교묘히 잠복하고 있다가 마주치는 인간의 가치관에 치명적인 타격을 때려 넣곤 하는 깡패에 가깝다. 그놈은 항상 진심이고, 전력을 다해 타격한다. 방어기술 따위 이 세상에는 없고, 그냥 맞다보면 익숙해지거나(어 또 눈물이 나네), 덤덤해지거나(아 맞다 나 헤어졌지) 할 뿐. 그렇게 syo는 사랑에 얻어터져 가며 오늘의 syo를 만들어왔다. 내 얼굴은 내 사랑이 남긴 흉터와 많이 닮았다.
2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와 연애를 할 것인가.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기 전의 syo는 어리바리들이나 모험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내가 좋아하는 사람 쪽이었다. 100일 동안 두 손에 꼽을 만큼도 만나보지 못하고 작살난 첫 번째 연애가 그랬다. 심지어 그땐 이래저래 악조건 투성이였다. 하나, 몸으로 못 배울 거였으면 글로라도 배워 둘 것을, 20년을 주구장창 연애무관심종자로 살다가 몸뚱이에 물도 한 번 안 찍어 바르고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었으니 그 연애에 쥐가 났다. 둘, 하숙 생활하는 가난뱅이 새내기가 연애를 위한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도 구비하지 못하였으니, 하부구조인 경제적 토대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변동시키는 막강한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역사의 법칙에 따라 그 연애의 역사가 종말로 치달았다. 셋, '롱디'라는 것은 삼생의 복업을 쌓아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일종의 전생-잘살았나-테스트로 기능한다는 관점에 의하면, 500km에 달하는 내 장거리 연애가 망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내 전생도 현생처럼 칭찬받을 만한 삶은 아니었구나...... 그러나 실제로 내 첫 연애를 멸망시키는데 이 모든 악조건의 총합보다 더 강력한 폭탄 역할을 한 한 방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끝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어찌 보면 허망하리만큼 간단한 사실이었다. 딱히 날 남자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는 인간을 잃기는 또 싫었던 그녀는, 곧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거라는 희망 섞인 자기기망과 syo가 자기 마음을 움직여 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버무려 일단 걸어오는 연애를 받아주었다. 결국 좋아하는 마음이 그녀에게도 생기기는 했다. 항상 자기 옆에 있어주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명박 정부 말기쯤 전해 들은 마지막 소식에 의하면 두 분은 결혼에 골인해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아아, 당신들의 운명 같은 사랑에 조연으로 등장하여 감칠맛을 더해 주는 복업을 쌓고 말았으니 다음 생에는 나도 롱디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할 거지만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감사고 나발이고 당시에는 어마어마하게 힘들었다. 한 달 만에 얼굴 보는 자리라 잔뜩 기대하고 나갔던 syo에게 벼락처럼 이별을 고한 그녀가, 그날 전까지는 정말 어떤 낌새도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쪽에서는 열심히 티를 냈지만 syo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스무 살짜리들은 사랑에 빠지면 종종 맹인이 되기도 하니까. 그녀는 동성로의 어느 돈가스 집에 syo를 불러 앉혀, 돈가스를 시켜놓고, syo가 돈가스를 절반 정도 먹은 시점에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미안하다고, 아무래도 너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뒤에 내가 전 여친이 된 그녀의 미니홈피를 들락거리는 찌질함을 한껏 발휘하여 알아낸 사실이다. 알고 나니 다시는 들어가지 않게 되었지만. 물론 그녀를 이해할 수는 있다. 비슷한 경험도 있고.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그때 그녀의 입장에 선 게 지금의 나라면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해주었을 것 같다. 거짓말도 아니고, 그냥 니가 사랑스러워지지 않는다는 말보다 훨씬 절단면이 깔끔한데다가 상처도 덜 오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스무 살짜리들은 결코 불가능한 착한 이별을 시도하는 멍청이가 되기도 하니까. 그녀는 다시 잠깐 울었고, 화장실에 들러 화장을 조금 고치고 돌아왔고, 우리는 일어났다. 그때 남겨놓고 온 돈가스의 절반은 어디로 갔을까. syo는 결코 썰어놓은 돈가스를 남기는 인간이 아닌데. 가게에서 나온 그녀는 농협인지 대구은행인지의 현금인출기에 들러 얼마간의 현금을 인출했고, syo는 괜히 뒤에 서서 그녀를 가려주면서 이게 다 뭐하는 짓이지 싶었다. 그리고 마치 달달했던 데이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syo가 35년 인생사 가운데 가장 등신 같기로 수위를 다투는 대사, “친구로도 안 되겠지?”를 시전했는데, 아, 그녀는 단호했고, syo는 그저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사실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떠나는 그녀, 이제는 심지어 버스 창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살짝 웃기까지 했다. 스무 살짜리들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남기고 싶은 대책 없는 욕심쟁이기도 하니까. 나도 그때 손을 마주 흔들었던가, 아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은, 그녀를 보내고 난 뒤 동성로 아카데미극장 옆 우리은행 앞 희한하게 생긴 거대한 조각상 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끗거리건 말건 멍청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30분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와서 맞은 첫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방구석에 드러누워 실패한 사랑을 복기하는데 소진하였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고른 것이 패착.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는 이들을 ‘모험가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와 연애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개인의 투자성향을 체크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고백했을 때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확률 자체가 다르다. 저 질문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는 가정이 전혀 깔려 있지 않기 때문에, 저 질문만 놓고 봤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여 성공할 확률은 동성로 우리은행 조각상 아래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세고 있다가 100번째 행인에게 고백하여 당첨될 확률보다 크게 높지 않다. 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해서 연애가 시작될 확률은 한없이 투명한 100퍼센트에 가깝다. 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왜 다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고백을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syo처럼 소심하고 위험 회피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 천성에 맞게 사는 길인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사랑이 날린 펀치가 syo의 인생행로를 바꾼 최초의 사건이다.
그날 이후 syo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 정확히 말해서, 내가 판단했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 마음보다 나를 좋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더 크다고 판단되는 모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그들 모두와 연애를 했다. 늘 사람을 쉬이 좋아하고, 한번 좋아하면 눈이 멀도록 좋아하는 syo에게 사랑하는 마음의 달리기 시합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연애가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syo의 마음은 먼저 달려 나간 마음들을 쉽게 따라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 시간을 따라 그 사랑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지나가곤 했고, 그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크고 간명한 진리와 진실들을 배워가며 syo는 syo를 조각했다.
3
기본적으로 인간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체로 대체 가능하고, 꼭 저 사람이 내게 필요할 필요는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살기에 너무 버거워서 나는 내 손으로 예외를 만든다. 네가 필요해. 그 말은 마치 주문 같다.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필요를 외치는 순간에 필요가 생긴다. 필요는 필요의 어머니다. 자기를 속이는 일이거나, 허튼 최면을 거는 일이거나, 어쩌면 어이없는 말장난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부정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인간이 필요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 일을 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syo는 필요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인 쪽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인 쪽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필요치 않은 사람을 더는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다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필요를 생각해볼 시간을 가졌다면, 과연 어떤 결론이 날까.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에게 사람의 필요를 의심하는 일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저 사람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은 사랑이 이미 종료되었음을 깨닫는 순간과 같다. 반면 사랑하는 데 필요가 필요한 사람에겐 필요를 생각하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더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 그제야 그는 사랑을 조금씩 삭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의외로 내 사랑에 필요는 필요하지 않았구나, 깨달으며 자신을 보는 관점을 조절할지도. 아무튼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의 필요를 계산하다가 동시에 서로의 불필요를 깨달았다면, 그래서 두 사람이 만약 헤어진다면, 그 이별의 원인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게 내가 지금의 사랑을 하는 도중에 새롭게 업데이트한 가치관이다. 국면에 따라서는, 사랑하는데 필요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도리어 더 폭력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일 수 있다.
4
사랑에 대해서는 더 배우고 싶지 않았다. 많이 배우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였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으로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동안 나도 생각한다. 생각은 늘 생각 같지가 않고, 생각의 꼬리를 문 생각은 꼬리를 물린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경우가 있다.
당신은 필요를 생각하러 갔다. 나는 그 생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완전히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났을 때,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해놓지 않아도 정해져 있는 답일까? 당신이 필요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거기가 어디일지를 생각한다.
밤이 자꾸 쌓인다.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 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에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 읽은 ---




+ 시 읽는 법 / 김이경 : 62 ~ 205
+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숲이 있다 / 황경택: 4 ~ 205
+ 도시를 보다 / 앤 미콜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 77 ~ 143
+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김진아 : 73 ~ 161
--- 읽는 ---



- 헤겔 / 피터 싱어 : 8 ~ 78
-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 이택광 : 5 ~ 131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 11 ~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