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목현상에서



1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이 있어, 마을 사람들 섬기는 하얀 병과 검은 병이 있어, 예부터 전하는 말에 하얀 병에서 낮이 나왔고 검은 병에서 밤이 나왔다고 하여 사람들 섬기는 병이 마을에 있어, 순박한 사람들 낮에는 하얀 병을, 밤에는 검은 병을 산신당 앞전에 모시고 지나는 길마다 두 손 모아 빌었는데요. 하얀 병, 빛 머금어 더욱 더 하얀 병 앞에서 사람들 씨감자 주소서 빌면 씨감자 나오고, 호미도 낫도 괭이도 주소서 빌면 그것도 나오고, 산신님 덕분에 감자 잘 심었으니 빗님도 오소서 빌면 빗님도 나렸으니 사람들 하얀 병 앞에만 서면 그리 기껍게 웃을 수가 없었지요. 자꾸 자꾸 닦아대어 하얀 병은 날로 날로 하얘졌지요. 그리고 검은 병, 칡부엉이 날아올라 들쥐 찢어 먹는 겨울밤이면 검은 병 앞에서 사람들 우리 아이 고뿔 걷어 가소서 빌면 아이들 고뿔이 낫고, 볼거리님 마마님 걷어 가소서 빌면 앓던 이가 다음날 밭에 나오고, 무서운 범, 아이 물어가는 꼬리 긴 범 삼켜 주소서 빌면 산에 범 우는 소리가 걷혔으니 사람들 검은 병 앞에만 서면 사시나무 바람 흔들 듯 떨며 빌다 후드득 사라졌지요. 자꾸 자꾸 외로워 검은 병은 밤으로 밤으로 거메졌지요.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 있는 시골 마을에 어미는 일찍 죽고 아비는 총포 들고 산에 들어갔다 여즉 소식이 없는 아이 하나 있어, 낮에는 이웃 영감 밭에서 조나 피를 뽑다가 밤이면 귀뚜라미 소리로 눈물을 틀어막고 잠들곤 했는데요. 아이는 하얀 병, 심어도 심어도 끝없이 심을 씨감자를 내놓는 하얀 병이 미워라, 갈아도 갈아도 끝없이 갈 호미를 내놓는 하얀 병이 미워라, 어느 산, 어느 지붕 없는 땅을 헤맬 아비의 옷이 젖을까, 빗님을 자꾸 뿌려대는 하얀 병이 미웠는데요. 아비를 주소서, 어미를 돌려 주소서 빌고 빌어도 모른 체하는 하얀 병이 자꾸 자꾸 미웠는데요. 그러던 어느 밤, 아이는 귀뚜라미 소리를 밟아 검은 병 앞에 섰는데, 검은 병에 손대면 도깨비 같은 순사님 나타나 육모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어른들 말씀하셨는데, 아이는 무람도 없이 검은 병에 눈싸움을 세게 걸었지요. 우리 아비를 주소서, 검은 병은 입이 없고 부엉이만 울었지요. 우리 어미를 주소서 검은 병은 귀가 없고 바람소리만 들렸지요. 아이는 골이 잔뜩 나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꽉 소리를 치더니 검은 병을 팽개치려 집어 든 게지요. 그때 드르륵 드르륵 검은 병이 몸을 떨지 않았겠어요. 아이는 깜짝 놀라 한쪽 눈을 감고 병 주둥이에 뜬 눈을 가져다대었는데요.

 

눈을 가져다 대면 토끼도 있고, 기린도 있고, 노루도 있고, 노루 잡으러 간 아비도 있고, 별님도 있고, 달님도 있고, 돛단배도 있고, 돛단배 타고 달님 구경 가신 어미도 있고, 거북도 있고, 고래도 있고, 어미 아비 손잡고 살러 가고 싶었던 푸른 먼 바다도 있고,

 

다시 눈을 들면 감자가 있고, 호미가 있고, 뽑아야 할 조와 피가 있고, 툇마루에 누워 곰방대만 훑는 영감이 있고, 아비가 갔다는 먼 산이 있고, 그 산에 다녀는 왔는지 하염없이 울어대는 부엉이가 있고, 부엉이의 날개로 몇 날을 날아도 갈 수 없다는 어미 사는 별나라가 있고, 눈처럼 겨울처럼 시리게 빛나는 하얀 병이 있고, 고뿔이 나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의 아비 어미가 있고,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이 있어 순박한 마을 사람들 낮이면 하얀 병을 밤이면 검은 병을 섬겼는데요. 어느 겨울 새벽, 부엉이 조는 산신당 산신나무 아래 하얀 병을 조심히 받쳐 들고 온 영감이 있어, 하얀 병을 모셔 놓고 검은 병을 모셔 가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볼거리님 마마님 도깨비 같은 순사님 육모 방망이 내려칠까 차마 고개 숙이고 검은 병 모셔 가는데, 그날따라 어쩐지 묵직하여 흔들, 어쩐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흔들, 잠깐 흔들어 보았지만 그래도 차마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영감은 얼른 검은 병 모시고 마을로 내려가는데요. 툇마루에 걸쳐 누워 곰방대를 물고는 아비 어미 없는 아이, 밭 갈고 귀뚜라미 소리 듣는 아이 이름을 길게 불러보았는데요.




이런 이상한 이야기는 일단 의심하게 되지만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는 뭔가 교훈이 있다그것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믿음과 같았다입 밖에 내뱉은 말에는 아무튼 간에 뭔가 힘이 있긴 있다는 것이다그 말은 항상은 아니겠지만 어떤 순간에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솔뫼사랑하는 개


 그런 날이 있다낮에 쇼핑을 하며 밖에 나와 있는 낯선 이들을 보는 것이 정말 외롭게 느껴지는 날그러니까 내가 입을 떼어내버리고 싶어 발작을 일으키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오늘 같은 날선명한 색 옷을 입은반짝거리는 머릿결을 한색색의 니트 스웨터를 가리키며 웃음 짓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쉽지 않은 날.

 저 모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또한 저 모두를 원했으니나는 그들을 지워버릴 수 없고 동시에 그들이 되고 싶어 할 수도 없었다.

에이미 벤더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각도가 생겼어 모서리가 됐어 너 때문에 부피가 생겼어 사람들이 들고나올 만한 너 때문에 무게가 생겼어 사람들이 치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겼어 너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어 뒤통수에 혹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앞이마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림자가 거대해졌어

 

 그것을 묵묵히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백육십 개가 넘는 얼굴을 등에 지고 삼백육십 일이 넘는 날을 넘는 사람이 있었다 곱절이 제곱이 되는 삶이 있었다

 

 영영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상상하게 됐어 굽는 것은 얼마나 뜨거울까 쌓아 올리는 것은 얼마나 지겨울까 찍어 누르는 것은 얼마나 잔인할까 찍어 눌리는 것은 또 얼마나 쓰라릴까

 

 그것을 밟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뭉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피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었다

 

 돌이 벽을 만나던 순간이 있었다

 벽돌이 돌벽이 되던 순간이 있었다

오은벽돌부분

 

 

2



고백하자면 나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보지 않았다그런데 이 싸움은 자체가 수단이고 목적인 순수하고 절대적인 싸움이다.

김진영아침의 피아노

 

건다는 단어가 품고 있는 위태로움을 생각한다. 그것은 최선을 다 한다는 말과 호환되지 않는 진술이다. 최선을 다했더라도 실패로 잃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걸고 싸워 이겨내 크게 얻었더라도 그 싸움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것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는 일은 노력이나 계산의 문제고, 모든 것을 거는 일은 판돈의 문제다. 그 두 가지 과업의 차이와, 그 각각에 적절한 시기를 판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의외로 간과되기 쉬우니,

 

아마도 내 인생의 무수한 실패들을 도마 위에 늘어놓고 갈라 보면, 뜻밖의 사인死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싸움에 맞서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최선을 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할 싸움 앞에서 모든 것을 걸었으되 정작 있는 힘껏 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3



우리는 보통 아마추어를 전문가에 미치지 못한 자혹은 아직 전문가가 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한다아마추어를 전문가로 이어지는 발전의 회로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하지만 아마추어는 전문가의 기준에서 평가될 수 없다아마추어와 전문가이 둘은 대상을 다루고앎을 생산하는 데 있어 완전히 다른 지평다른 관점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전문가들이 대상에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려 한다면아마추어는 사랑연대감이라는 지평 속에서 대상과 만나고그 속에서 앎을 생산해 낸다그들은 무언가를 사랑함으로써 앎의 장 속에 들어선다그들에게 대상과의 거리감은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앎을 구성하는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다.

정철현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사랑하고, 아는 것을 사랑할 수 있지만, ‘아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나는 믿는다. 사물에 관한 것이건 사람에 관한 것이건, 얼마만큼 알고 나서부터는 더 많이 아는 일이 곧바로 더 큰 사랑을 담보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그 앎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앎을 두껍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는 애정이 좀처럼 약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 내가 아직 이 사람에 대해 잘 몰랐구나,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식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종종 사랑의 확장을 경험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결코 그 대상에 대해서 객관적일 수 없다. 뒤집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고,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모르는 길을 고른다. 이국, 바다, 우주, 가보지 않은 곳을 끝없이 동경하고, 읽다보니 알겠다 싶은 책은 두 번 읽지 않으며,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분야에서 의미를 찾고 매력을 느낀다. 나는 내 일을 잘 하고 사랑한다는 말만큼 모순되거나 기만하는 말이 있을까. 그냥 나는 내 일을 잘하고, 일을 잘 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읽다가 모르는 것이 없어질까 봐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더 남아 있는 빈 공간을 탐구할 생각, 그러니까 사랑이 사라질까봐 겁이 난다. 그만 알아도 되겠다는 마음은 아는 것이 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줄어서 생긴다. 알고 싶은 것이 줄어드는 증상은 사랑을 잃어가는 병의 초기 증세다.

 

 

 

 

-- 읽은 --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갈로아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읽는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김경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차병직, 단어의 발견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정철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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