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일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만 누구나 가끔 이러고 싶잖아요 아닌가 나만 그런가
기어이 사람/사랑으로 인해 무너져야 한다면, 잔해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바깥에서부터 성대하게 무너져 내렸으면 싶다. 전시된 불행은 연민을 끌어내고, 대체로 연민은 아픔의 대용품이 되곤 하니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조용히 안으로부터 허물어지는 일은 지나치게 가혹하므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욕심. 이 욕심은 본능이다. 본능적으로 적게 울고 덜 아프고 짧게 사무치고 싶다. 하지만 사랑에도 방정식 같은 게 있어서, 계산에 따르면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의 사랑에서 더 적게 사랑한 사람의 사랑을 뺀 나머지만큼,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꼭 그만큼은 도리 없이 안쪽부터 무너져야만 한다. 이 계산은 운명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순간 짊어질 수밖에 없는 불편한 형틀이다.
비비와 함께 있어주고, 고통을 위로해주고, 종종 주시하는 것 말고는 우리가 그녀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구도 그와 같은 황폐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_ 줌파 라히리, 「비비 할다르의 치료」, 『축복 받은 집』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금 누가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 가늠하려 한다. ‘우리 중 누가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을까?’ 하는 중립적인 질문은 사실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한다. 그 질문의 현실계 버전은 이렇다. ‘어쩐지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은 ‘어쩐지 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다! 실제로 그렇다! 의심하는 사람, 당신이 바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도 너만큼 아파.”라는 말은 항상 거짓말과 변명 사이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딱 그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상황은 기적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다. 앞서 떨어뜨려 땅에 꽂힌 바늘의 머리 위에 다음 바늘이 가서 꽂히는 일이다.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할 뿐이다. 그러나 사랑을 재는 저울은 사랑의 도중에는 웬만하면 기능하지 않다가, 이별을 하고 나면 어떻게 알고 나타나 가차 없는 판결을 내린다. 그러므로 더 아프거나 덜 아플 뿐이다. ‘왜 내가 더 아픈가’ 하는 질문은 역류하여 ‘왜 내가 더 사랑했던가’에 도달한다. 보통은 거기서 멈춰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궁금증이 사라질 때까지 아플 뿐이다.
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나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_ 문태준, 『가재미』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사람은 시장에서도 듣지 못하고 광장에서도 갇혀 있다. 망막의 안쪽에 스크린을 치고 하루 종일 기억을 상영한다. 지나간 장면 속에서 했던, 혹은 해야 했던 대사들을 빈 벽을 마주한 채 읊고 또 읊는다. 그러다보면 결코 소진되지 않을 것처럼 활활 타오르기만 하던 기억도 잉걸불이 되어, 이제는 계기가 있어야 슬퍼지는 시기가 온다. 은은하게 아픈 가운데 잿더미를 뒤적이다 보면 간혹 소소하게 행복했던 추억들을 줍기도 한다. 할 만큼 했고 미련 없이 줬다는 판단이 서면 뿌듯하기도 하다. 그쯤 되면 이제 완치다. 둘러쳤던 사방의 벽을 걷어내고, 잿더미를 뒤엎어 새로운 씨앗을 뿌릴 의욕이 생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겠으나, 일단 사랑이었다면 아픔에 비례하여 비옥해진다. 그리하여 사랑의 모든 국면에서 저주받은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딱 한 곳, 이 지점, 다음 사랑을 준비하는 자리에서만 유익을 거둔다.


사랑에 빠지면 무언가가 가슴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을까? 아니면 채워지는 것 같을까?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반드시 패자가 된다. 사랑 앞에 자존심이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무언가가 빠져나갈 것이고 빠져나간 자리에는 보기 싫은 흉터가 생길 것이다. 그 흉터는 세월이 지날수록 옅어질 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 우리 몸에는 여러 개의 흉터들이 생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흉터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다.
_ 한수희,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영화나 연속극이라도 되는 양 타인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보상받으리라 상상한다. 내 상처가 이만큼 크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오해받고 있고 너희들이 내게 하는 지적은 모두 그르다, 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결국 응답받지 못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_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