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 안에서 태어난 새벽 등 푸른 생선
‘늦게까지’가 ‘일찍부터’로 변할 때까지 깨어 있었다. 창틀에 앉았던 새벽이 툭툭 털고 일어나 아직 채 달궈지지 않은 햇살을 올라타고 내일로 돌아갔다. 하루는 서서히, 그러니 세심히 밝아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거대한 손이 매일 어둠을 만져 빛으로 윤색하는 이 신기한 이치를 넘겨다보면서, 여기부터 밝았다, 고 말할 수 있을 가상의 한 꼭짓점을 짚어내겠다고 눈에 잔뜩 힘을 주는 중이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겠다고 오래 바라보는 동안 새벽은 조금씩 촉촉해졌고, 작은 방 안의 나는 결국 눈을 비비며 눈 안의 새벽을 비볐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훔치겠노라 온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기회만 엿보는 이의 눈에 언제나 젖은 새벽은 다녀간다. 갈망을 내려놓고 그저 하루하루를 건지자고, 마음의 곳간에 이미 수천 개는 축적해 놓은 비슷한 말들의 더미 위로 갓 잡아 올린 시퍼런 생선 같은 다짐 한 마리를 다시 한 번 던져 넣는다. 그러나 이제 돌아서면 만나야 할 잠이 있다. 잠이 기다린다. 언제나 그랬듯, 이 잠을 거치고 나면 모든 선명한 것들이 흐려질 것이다. 마음의 윤곽이 허물어질 것이다. 생선의 눈알이 투명함을 잃고, 그 푸른 등에서 내 욕망인 척하는 타인의 욕망이 곰팡이처럼 피어날 것이다. 다시 갈망할 테고, 그것은 거대할 것이다. 내일 돌아올 새벽처럼 끝내 피할 수 없는 적수로 다시 만날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경쟁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사람들은 정작 경쟁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기형적일 정도로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사회에서조차 경쟁을 고정적인 상수로 전제한다. 그 다음에 남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따라가며 대중적 유대감을 형성하면, 잠시 경쟁에서 벗어난 듯한 착각을 느낀다.
_ 박홍순, 『일인분 인문학』
나는 오늘날 누구도 더 이상 행복을 찬양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낭만주의자들이 행복을 구석에 처박는 대신 불평을 고양했기에 페르난데스 모레노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이나 단조로운 시를 흥얼거리는 시인들, 즉 운율에 맞춰 우울하게 노래하거나 자유분방한 재기(才氣)만 뽐내는 시인들이 각 행에 여백을 주기 위해 지나치게 유희를 즐기면서 오늘날 행복을 무시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행복이 불행보다 시적이며, 재기보다 더 존중받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_ J. L. 보르헤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대학 때문에, 군대 때문에. 직장 때문에, 삶의 여러 이유로 나는 고향에서 멀어져 있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주말마다 꾸역꾸역 서울을 오갔지만 그것이 곧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었고, 나중에는 명절과 부모님 생신에나 들러보게 됐다. 대학원 시절에는 논문을 쓴다고, 시간강사 하던 때는 강의 준비를 한다고, 아예 1년에 두어 번만 정해놓고 집을 찾았다. 그러면서 '잠시'라고 생각했다. 곧 고향에 돌아갈 것이고, 그때도 여전히 나는 젊을 것이라고. 나를 기다리는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덧 나는 서른 중반이 되었고, 부모님은 환갑을 맞았다. 시간은 멈추지도 기다려주지도 않고, 내가 넘어져 있을 때도 쉼 없이 흘렀다.
_ 김민섭, 『아무튼,망원동』
모름지기 행복은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찾을 때 더 멀리멀리 달아난다고. 행복을 찾아 방황하지 말라고. 과연 인생은 오색찬란한 베일로 둘러싸여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토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_ 조안나,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