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을 박살내는 끝없는 춤사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끝없는 몸짓이고 싶다. 스냅샷보다 활동사진이고 싶다. 매시간 문양이 변하는 인두가 되어 상대를 만나면 좋겠다. 글씨 위에 글씨를, 때론 흉터 위에 흉터를 쾅쾅 찍어놓고 싶기도 하다. 어쨌건 정박하기보다 계속 요동치고 싶다. 차이를 무한히 되풀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추억으로 고요히 남겨지는 것만큼은 싫다.
그러나 모든 움직임은 서로의 결이 맞을 때만 겨우 지속된다.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끊어지고 멀어진다. 추억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추억조차 되지 못하고 그저 한 무더기의 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오늘 이전에 끝난 모든 사랑이 추억과 기억 사이의 어디쯤 있다.
사랑하는 동안 내가 미소이고 싶을 때 종종 네겐 냉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웃음을 쓸 줄 몰라서였을까, 네가 웃음을 읽을 줄 몰라서였을까. 내 마음이 빨강을 칠하고 싶어 덤벼들어도 네 마음에 발린 색은 가끔씩 파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중 누가 색맹이었을까. 결국 내게 빨간 미소로 추억되는 시간이 네게 파란 냉소로 기억되고 있다면, 우리 중 누가 유죄인 걸까. 내가 네 마음에 찍힐 무늬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네가 내 마음이 칠하려 했던 빛깔을 좀 더 끈질기게 바라봐 주었더라면, 그렇다면 서로를 향한 우리의 몸짓이 아직 이어지고 있었을까?
끝나지 않은 오늘의 사랑을 오늘의 사랑으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오늘 이전에 끝난 모든 사랑을 헤집어가며 생각건대, 사랑의 자리에 객관적 진실은 없다. 사랑이 포착하는 모든 진실은 주관적 진실이다. 감정을 완전 배제한 논리적 판단이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는 듯 보여도,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착각일 뿐이다. 주관과 감정은 사랑의 공기이며 매질이다. 껴안아야 하고 고려해야 한다. 배제하면 진공만이 남는다. 자연은 진공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진공은 약하고 너무 손쉽게 무너진다. 무엇보다, 진공 속에서는 누구의 목소리도 전파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귀머거리고 벙어리일 뿐이다. 매질이 사라진 자리에서 메시지는 침묵한다. 진심은 진공관 안에서는 평행한 두 개의 선이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투과해야 굴절한다. 굴절해야 만난다.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아니 둘이 서로 무엇이 같고 다른지조차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출발점에 자리 잡고 있는 어려움이자 슬픔이다. 재현이 현실의 완벽한 복제는 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거기에 삶의 원천적 비극이 존재한다. 삶의 총체성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언어의 형식, 학문의 형식, 예술의 형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이 총체성을 결코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역설적으로 자유의 영역이 열리게 된다. 모든 재현은 현실의 불완전한 묘사라는 것, 그것은 재현의 쓸모없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_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이런 만남 속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공을 패스하고 슛을 넣는다. 우리 몸은 아주 많이 다르다. 이 몸들 사이를 흘러 다니는 다양한 감정과 행위가 우리의 사회적 건강을 이룬다.
_ 류은숙, 『아무튼, 피트니스』
사실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고 꼴불견인 게 어디 있겠습니까?
_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