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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짐승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85
에도가와 란포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일본의 추리소설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에도가와 란포의 중단편집. 이름이 미국의 에드가 앨런 포우-포보다는 포우가 운율상 좋다.-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는 이제 구차하고...에도가와 란포 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일본)추리문학사의 위상과 가치를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은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고 꺼려지는 일이다. 마치 <시민 케인>의 감상문을 쓰는 기분이랄까. 칭찬을 하자니 이미 남들이 다 하는 말을 하는 것 같고, 신랄하게 쏘아붙이자니 억지로 몰아붙이는 것 같고. 게다가 이 구식 작품을 읽기에는 더 매끈한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다보니 이제는 구매순위에서조차 밀리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어찌되었건 몇 마디 적어본다.
oldhand 형님이 언급하신 대로 이 작품은 포우를 비롯한 초기 본격의 요소들을 당대 일본에 적절히 이식했다.(oldhand 형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아마튜어 탐정과 화자인 나, 논리적인 추리 기법, 의외의 범인, 독자와의 페어플레이
해당 요소들을 충실히 구현했다는 점에서도 이 중단편집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 단편집에서는 란포가 좋아했으리라 짐작되는 작가들의 모습도 여럿 보인다. 포우나 도일은 기본으로 깔고, 나는 란포의 성향이 은근히 반 다인에게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D언덕의 살인사건에서 추리소설가인 '나'에게 아케찌 고고로가 "당신 추리는 너무나 외면적이고 그리고 물질적이군요."라고 일갈하고는 "가장 좋은 추리법은 심리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을 궤뚫는 일이지요."라고 외치는 장면이나 <심리시험>의 후끼야와 고고로의 박력넘치는 대화는 반 다인의 <카나리아 살인사건>의 포커를 연상케 했다. <심리시험>의 구조는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유시한 부분도 있고. 내 소양이 부족해서 내 느낌은 이정도고, 다른 분들은 더 많은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란포의 위대한 점은 서구의 유명작가들의 흔적을 일본에 맞게 충실히 계승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발간된지 거의 100년에 근접하는 작품이라는 시차를 생각하면 놀랍기도 하다. 해당 요소들을 충실히 구현했다는 점에서도 이 중단편집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러나 란포는 이것도 부족한지, 한 가지 양념을 첨가한다.
이상심리
이 작품은 FBI 심리분석관 류의 법의학 서적에 실제사례로 기록해도 별 문제없을 듯한 이상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 변태들이 득시글거린다. SM은 기본이고, 관음증, 순수하게 살인을 욕망하는 사람. 살인 이외에 어떠한 자극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 좋아하는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 기괴한 신체와 성욕의 불협화음.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살인과 욕망의 이중주를 보고 있자니, 내가 비교적 정상적인-이상심리를 드러내지 못하는 소심한-사람들 주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안도감마져 든다. 초반 작품들은 그래도 추리소설과 이상심리가 어느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후반부의 <거울지옥>이나 <배추벌레>를 읽고 있으면 단편 자체, 그 단편을 쓴 란포,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삼위일체 변태 세트가 되는 느낌이다.
이렇게까지 쓰고 나면 의문이 든다. 과연 란포는 우울한 망상에서 자유로웠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음울한 짐승>이나 의 주인공이 추리소설가이며 1인칭 시점이라는 점. <음울한 짐승>에서 '오데 슌데이'가 발표한 작품들의 제목은 란포의 단편를 묘사한 작품의 제목과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오데 슌데이의 묘사가 지나치게 강렬하다는 점은 적어도 이 단편집만 놓고 보면 란포 역시 이상심리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게다가 그런 것들이 변태성욕과 이어진다는 점도 그렇고...<음울한 짐승>에서 주인공이 사건을 설명하는 후반부에서의 사건의 설명보다도 설명 중간중간에 이어지는 주인공의 행동묘사만 봐도 란포는 보통이 아니다.
예전에, <망량의 상자>를 읽으며, 망량이 담긴 상자는 추리소설과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의 욕망을 일부분 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 적이 있다. 몇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고, 그 과정을 풀어헤치는 과정에 호기심을 가지는 추리독자의 무의식의 심연에는 어두운 이상심리가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던 간에. 일례로 아이리시처럼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숨어있을 수도 있고...추리독자가 모두 이상심리를 가진 변태라는 게 아니라, 조금은 그런 성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해볼 수는 있지 않냐는 것이다. 나도 내가 변태취급 당하기는 싫지만, <음울한 짐승>은 작가와 독자가 공범일 수도 있는 사례라고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란포는 지적 노출증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지식인들의 특성이 과도한 솔직함이라고 한다면, 란포 역시 지식인이다.) 란포의 작품들은 종종 1인칭 관찰자 시점인지 주인공 시점인지 오락가락할 정도로 인물간의 경계가 모호하다. 명찰만 다를 뿐. 10여년 전의 풍월로 프로이드를 빌어 설명한다면, 추리소설가로 등장하는 '나'는 에고,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은 '리비도' 그리고 탐정-특히 범인과 게임을 즐기며, 범인을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아케찌 고고로는-은 슈퍼 에고가 아닐까? 그냥 멋대로의 해석이다. 결국 란포는 자신의 일부분들을 추리소설이라는 공간 속에서 풀어놓고 조종하는 것을 욕망했던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란포는 독자들마져 조종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것이 아닐까? 이 단편집의 결말이 에필로그를 통한 불유쾌함으로 끝나는 이유는 란포가 본격 추리소설의 비현실성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 것 같기도 하지만, 독자마저도 자신의 단편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욕망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음울한 짐승>, <빨강 방>, <2전 동화>와 같은 작품의 후반부는 특히 란포의 욕구가 직설적으로 드러나 있다.
여기까지 써놓고 나니 마치 모든 단편을 '란포의 지적 자위행위'처럼 묘사해서 란포 선생에게 상당히 죄송스러운데, 그래도 결과물의 수준이 워낙 좋다. 모든 단편이 기괴하고 독특하지만, <음울한 짐승>, D언덕의 살인사건 , <인간의자>는 추리단편으로 추천할만 하며, 번역상태가 좋았으면 아쉬움을 가진 <거울지옥>, 그리고 이상심리의 극치를 달리는 <배추벌레>도 좋다. 모파상의 단편을 연상케 하는 <두 폐인>도 좋았고.
점점 더워지고 있는 여름에, 읽고나면 상당히 시원한 느낌이 들 것이다. 단 상당히 불쾌하겠지만...
추신) 이 작품은 절대 뒷표지를 봐서는 안된다! 가장 재미있는 <음울한 짐승>의 트릭이 노출되어 있다. OTL 난 낚였다. ㅠㅠ
추신2) 란포의 문체도 번역을 불구하고 기이하다.
"박물관 안은 인기를 잃은 스타처럼 퇴물스러운 정적만이 가득했다."
"그러한 것들은 바깥채의 일본식 고유 주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황금 만능의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것들은 필립 말로인데...더 인용하려다가 단편들이 많은 관계로 생략 ^^)
추신3) 아케찌 고고로의 활약을 보고 싶으시다면, 이것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소년탐정단 1~2 세트
에도가와 란포 지음 / 북박스
나의 점수 : ★★★★
추신4) 결국 써놓고 보니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밖에 없군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