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로자문드 필처의 The Shell Seekers가 최애소설로 쭈욱 남아 있었는데 드디어 새로운 왕좌의 주인이 등극했다... 쟁쟁한 후보들이 많았지만 감수성 최고 예민한 시절에 제대로 꽂혔던 소설을 밀어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그나마 제일 가까이 갔던 소설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클럽이었는데... 뒷심이 딸렸어... 그래서 그 대단한 책이 뭐냐면,



이거다!


각설하고.

이 책과의 만남을 주선했던 책은 이거였다(책이 주선한 책 치고 그렇게 나빴던 기억은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당신의 책더미를 3배 더 늘리는 게 목적이라고 공언하는 이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물론 있을 수 있다, 당연한 말을)? 그림도 글 못지않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더욱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도 열심히 읽기야 하지만 어느 순간 책등과 표지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책이다. 그렇게 책 구경하다 글 읽다 문득 77페이지에 이르면, 책 사랑하는 1인으로 한번쯤 로망을 가져봤을 북클럽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옮기면 문득 시선을 끄는 노란색 책등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 정확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만남은 후에 돌이켜봐도 아무 개연성을 찾을 수 없기도 한데 이 경험이 딱 그랬다. 도대체 무슨 연관성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소재를 다룬 글을 읽다 문득 발견한, 아마도 주인공인 것 같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책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 검색 시작. 


그리고 우리의 자랑할만한 검색엔진은 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는 정보를 전해준다. 고맙게도 '직배송 중고'로 상태좋은 중고가 한 권 등록돼 있었다. 이럴 때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 이건 사야 해!"

모든 상황이 그린라이트를 깜박이며 Go 사인을 열렬하게 보내고 있는데 차려놓은 밥상도 못 찾아먹는 바보가 될 순 없다. 그래서 굳이 먼 바다를 건너오게 해서 읽었다. 이 책도 따지고 보면 먼 바다를 건너 온 아이의 이야기가 주된 소재다.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왜 원서로 읽지 않았는가하면, 논픽션이라면 몰라도 문학 원전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없을 때도 많지만) 있는 건 그림책까지만이라서... 


나한테 되게 달라붙는 책이구나 또 실감한 건 책장을 열고 나서. 

책을 손에 들기 불과 한 시간 전에 바로 주인공 소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도시에 다녀온 참이었기 때문이지... 그 동네엔 한인타운도 있고 재팬타운도 있는데, 이 아이는 아마도 그곳에 살았었겠구나, 그러면서 완전히 실존인물로 착각하게 됐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각별했던 장소가 내게 물리적으로 가깝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발길 댈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 현실과 책 속 사건 사이의 거리감을 이렇게 순식간에 좁혀버린다. 


나오는 흔히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보다 훨씬 영민하고 섬세하다. 이런 캐릭터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읽었던 책이었어도 마지막장을 덮으면 거의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는 성능의 브레인 소유주이므로 한참을 더듬어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오래된 기억의 방에서 끄집어낸다. 여기에 등장했던 팔로마가 나오와 아주 비슷한 인상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얘 이름도 까먹어서 책 정보를 뒤져 기억해낸 거지만. 훨씬 연상의 친구와 마음을 나눈다는 설정도 비슷한 듯. 


정확히는 마음을 나눴다기보다, 여기에서는 일방적으로 맡겨둔 느낌이 더 강하긴 하다. 변덕스럽고 감정적인 또래 문화에 자기를 갈아넣지 않고 혼자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나오가 일방적으로 미움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사회가 갈수록 튀는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데, 10대들의 리그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겠다. 아무리 괴롭혀도 나오는 그대로 단단해 보였으므로, 아이들은 아예 나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갈 데까지 간 괴롭힘의 끄트머리에서도 이 아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어떤 관계, 어떤 힘, 어떤 마음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작품 속의 루스는 나오에게 무엇을 준 것일까. 


나오처럼 홀로 세상을 견디고 있는 아이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현실이 항상 소설처럼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세상이 지코 할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으면 블로그에다 할머니 얘기를 올렸겠죠. 하지만 그건 오래전에 그만뒀어요. 저기 사이버 공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생각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믿는 척하는 날 보니 슬퍼지더라고요. 사실은 아무도 관심이 없잖아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각자의 쓸쓸하고 하찮은 방에 앉아 쓸쓸하고 하찮은 페이지에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올리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글을 쓰고 올리느라 바빠서 아무도 읽지 않아요. 내 슬픈 감정에 그런 수백만의 사람들을 곱해보면 난 좀 가슴이 아파요. -41쪽


시간과 집중은 재미있는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한쪽 극단에서, 루스가 인터넷 검색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초집중하고 있었을 때 시간은 파도처럼 모이고 높아져 하루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반대편 극단에서, 집중이 느슨해지고 분열되면 시간은 마치 알갱이가 있는 것처럼, 매 순간이 정체된 물에 녹지 않고 퍼져 있는 입자처럼 느껴졌다. -131쪽


지코 할머니는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헤이와보케라고 말해요. 그걸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우리가 전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하고 부주의하다는 뜻이에요.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났고 평화 말고는 기억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일본은 평화로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좋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모두 전쟁과 과거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어요. -254쪽


사실은 내가 아는 게 꽤 많더라고요. 특히 영어는 더 그랬고. 하지만 답조차 쓰지 않은 게 태반이에요. 점수가 어찌나 낮던지 무슨 장난 같기도 하고 내게 지적 장애라도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도 난 뭐 그러거나 말거나 했어요. 이제 고등학교엔 갈 수 없겠구나, 그래서 우리 하루키 1번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배웠던 모든 것들을 배울 수 없겠구나 생각하면,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곧 죽을 사람이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고 또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끝까지 해보려는 노력엔 고결한 뭔가가 있어요. 지코 할머니의 슈퍼히어로 간노 스가코처럼요. 교수형에 처해지던 바로 그날까지도 계속 영어 공부를 했고 일기를 썼다고 하잖아요. -468쪽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당신은 알고 싶어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는 자기가 가진 슈퍼파워를 찾은 것 같았어요. 어쩌면 나도 내 슈퍼파워를 찾은 것도 같아요. 바로 당신에게 이 글을 쓰는 거요. -548쪽


자문자답.

쓰는 일이 출구가 될 수도 있겠다. 가능한 한 자세히, 옆에서 함께 지켜본 것처럼.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마치 옆에서 무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듯 쓰고, 마음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휘몰아쳤던 감정들을 뿌리부터 하나씩 갈라놓아 찬찬히 펼쳐 쓰는 일이 나오에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고 가질 수 있는 슈퍼파워가 될 수도 있다. 그냥, 말이 되든 안 되든 문장이 단정하건 소란스럽건, 일단은 쓰기 시작하면 정말로 뭔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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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느닷없이 물었다. 엄마 내가 필력이 많이 딸려? 솔직한 마음으로, 열 넷짜리가 무슨 필력 운운이니, 필력이란 말이 부끄러워서 낱자로 산산히 부서지겠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뇌내대공사중인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수습 불가능한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아 "잘 쓴다고 말하기가 힘들긴 해" 정도로 대답해 주었다. 허니 아이가 다시 엄마 그러면 나 상처받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엄마가 진짜 솔직히 생각하는대로 말해 줘, 내가 어느 정도로 써? 되물어왔다. 살면서 온갖 난감한 질문 자존심 상하는 질문, 행여 대답 잘못해서 관계 틀어질까 저어되는 질문... 나름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다 헛것이었나 싶게 대답이 궁색해져서 한참을 고민했더니 "대답할 말을 못 찾는 걸 보니까 진짜 못 쓰나보다" 한다.

 

맞아, 멘탈이 부분적으로 깨져나가도 할 수 없지만, 재보수할 수 있는 걸 뭐. 솔직히 말해줄게, 엄마 생각엔 딱 3-4학년 수준인 것 같아. 이 말에 철옹성같던 자존감에 금이라도 간 표정으로 아이는 내가 정말 그렇게 못 쓰나... 생각하더니 사실 자기가 한국 떠나오기 직전에 국어쌤하고도 그 문제로 상담을 했단다. 선생님은 필사를 권하셨다고. 무슨 책을 권하시더냐 물어봤더니 스스로의 수준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따로 메모해 오진 않았는데 김유정 작가의 작품들을 필사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단다. 김유정이라...  


한국에서 같았으면야 뭐가 문제일까, 바로 집 옆에 있는 도서관 가서 책 빌려오고 공책 하나 사 주고 자, 그럼 쌤도 권하셨겠다, 이제부터 필사를 시작해보려무나. 이러고 말았겠지. 그러나 이곳은 디 유나이티드 스테잇ㅊ... 아니었던가... 책은 중고로 구해보고, 공책은 한 권 따로 사야하려나 이러다가 문득 나는 이런 걸 발견하고야 만다.



세상 참 좋네.

출판사에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가 이렇게 격리(...)된 상황이 아니었다면 구매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이 뜻밖의 쇼핑욕구(뭐가 뜻밖이냐, 맨날 머릿속으로 카드번호를 감으며 외웠다 키보드 위에 풀어놓는 게 일상이면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리 없잖은가. 그래도 이왕이면 무료배송 받아야지, 하면서 50달러를 기어코 채운다. 이해는 하면서도 약간 억울한 게 국내판매가와 US판매가가 달라서 사실상 이게 무슨 무료배송이야 배송비 다 받으면서... 주세도 꼬박꼬박 다 떼이는데... 싶지만... 아쉬운 놈이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열심히 구입한다. 세상에 내가 여기 건너와서도 플래티넘 멤버쉽을 유지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도 몰랐는데. 

우스운 건 정확히 1주일이면 물 건너 알라딘 박스가 현관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거다. 아마존 프라임 멤버가 아닌 이상, 같은 미국 안에서 주문한 물건도 일주일이 족히 걸려야 도착할까 말까 하는데 태평양 건너 오는 택배가 더도 덜도 아닌 7일만에(사실 지난번엔 5일만에 도착해서 기함하기도 했다) 온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동시에 좀... 그 짧은 시간안에 도착하게 하려고 애를 썼을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기도 하다. 얘네는 1주일이고 2주일이고 갈 때 되면 가니까 기다려 좀, 이래서 사람을 황당하게 하더니만. 


아무튼 적지 않은 금액의 카드를 긋게 하셨으니 큰 따님, 필사 열심히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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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be Tomorrow? (a Story about Loss, Healing, and Friendship) (Hardcover)
Charlotte Agell / Scholastic Pr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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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바는 커다란 블록을 끌고 다닙니다. 그 블록이 너무 무거워서 어디를 가기도, 무엇을 하기도 너무 버거워요. 

우연히 만난 노리스는 그건 닫혀있는 블록이 아니라, 열 수 있는 상자처럼 보인다고 말해줍니다. 뭔가 슬픈 느낌이 나는 것이 갇혀 있지만, 그만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죠.


상실과 치유를 다루는 그림책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밝고 예쁜 옷을 입고 있지만, 아주 진중하고 사려깊은 책이예요. 크고 깊은 이별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환상적이야 

철학하는그림책 

가르쳐주고싶은마음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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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ry Bunny (Hardcover)
Claudia Rueda / Chronicle Books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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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하며 놀 수 있는 책이예요. 나이 어린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겠고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이, 그게 설령 가상의 체험이라 하더라도, 그 나이대엔 또 얼마나 중요한가요.


같이노는책 

이런이야기가더많아졌으면 

쪼금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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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뒤로는 초록색 나는 것을 기르기가 여의치 않아 많이 나눠주고 집에 둔 것은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나름 얼치기 가드너로 살았던 세월을 돌이켜보면 화초를 죽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이랄 것도 없는 방법은 꾸준히, 규칙적으로 관심을 두고 물을 주고, 하엽을 치워주고, 비료를 주고, 가끔씩 화분 방향을 돌려가며 볕을 고루 받게 해 주는 것이었다. 간헐적으로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조금씩 꾸준히.

그런데 이건 사람의 모든 삶의 모습에 담겨야 하는 태도다. 당연히 이상적으로 표현해서 그렇다는 뜻이지 실천 가능성은 뭐... 남말할 처지가 아닌 까닭에 말줄임표가 필요하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런데, 어느 때는 폭포수처럼 사랑을 쏟아붓다가, 몸이 지치고 힘들다고 파리 쫓듯 손 휘저어 아이를 밀어내면 아이는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뭐... 비슷한 원리로다가 책을 읽다 말다 하는 자의 머릿속이 그닥 체계적일수가 없거니와 단정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여하간 그 뭣도 아닐 것이 분명함과 같다. 되다 만 밥 같달까. 아마도.

 

도저히 '꾸준함'을 삶의 기치로 내세울 수가 없다. 그저 '잊어버릴 만 하면 가끔 생각난 듯 한번쯤' 이 어울리겠다.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읽음이 읽지 않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이민가방에 바리바리 넣어왔던 책 몇 권은 대부분 사회과학서라, 책꽂이를 보면 좀 메마른 기분이었다. 여기가 사막기후여서 그런 생각을 한 것만은 아닐 거다. 딱히 문학을 읽어야 사람이 사람같아지지... 라고 주장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이 건네는 것은 역시 딱 자르는 마침표라기보다, '그리고,' 라고 얼굴을 돌려 바라보는 쉼표다. 이건 이렇습니다! 라는 선언문도 좋지만, 가끔은 ...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말을 거는 문장을 읽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도서관에 신간이 들어와 있었다. 지난번에 얼핏 봤을 때는 이승우 작가, 김중혁 작가, 박상영 작가의 책이 보였고, 그 중 압도적으로 김금희 작가의 책이 많아서(출간됐던 책들이 다 있어서 진심 놀람) 다음번에 아직 못 본 김금희 작가 책을 빌려와야지 마음먹고 갔는데 어째 이번엔 다 대출됐는지 안 보였다.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여기서는 어렵지 않게 그 누구도 빌렸던 흔적이 없는 깨끗한 새 책을 빌렸다. 뭘 먼저 읽을까 하다가 정세랑 작가의 책을 먼저 읽었다. 이름은 익히 알고, 작품은 하나도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낯을 익혔다. 그중에서도 <보늬>가 특히 좋았다. 황망한 헤어짐 뒤에 남은 이들이 불안하게 붙잡은 손에서 어설픈 위로를 건네고 받기보다, 고통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스스로 찾아내는 이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곁이고, 그 곁에게도 그의 고통을 표현할 언어가 필요하다는 이 말은 이 책에서 배웠다.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의 참 본성이라는 아연한 사실은 마지막 텍스트에서 시선이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고 언어로 소통할 수 없으므로 곁을 지키는 사람들도 점차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가는 까닭에 함께 피폐해져간다는 비통함은 현재 내게 당면한 일이 아님에도 단단하게 마음을 조였다.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는 물음이었는데, 완벽한 답이라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지만, 이 짧은 단편이 실마리를 준다. 그러니까 언어가 필요하다, 라는 선언에서 언어를 아주 좁은 새장 안에 가둬놓고 의미를 제한할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슬픔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책 얘기로 시작해서 계속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도, 인터넷상에서 편한대로 끼적대는 잡기장이니까 가능한 얘기니까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계속 마구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면, 예술이 바로 그런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화가 난다고 아무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고함을 질러대길 계속하면 누군들 버틸 재간이 있겠냐만 캔버스에 물감을 계속 엎어버리고 치덕치덕 칠하고 또 칠해도 뭐라 그럴 사람은 없을 거다. 

벽면을 꽉 메운 유리함 안에 가늘게 찢어버린 종이쪼가리가 빽빽하게 가득 차 있다면, 더구나 거기에 어떤 감정을 환기시키는 타이틀이 붙어있다면, 나라면 압도당할 것 같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타인에게 도통 감정이입을 할 줄 모르고, 공감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물리적으로 체험시켜주고 싶다고. 이를테면 밀도라든가, 질감이라든가, 소리라든가, 그 무엇이 되었든 본인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밖에 없게끔 오감을 동원해서 타인도 나처럼 감정과 감각을 가진 인격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선명하게 깨닫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그거슨 너무나 동물적인 발상이므로 이쯤해두고

 

여하간.

그래서 급 줄이자면 한국이든 여기든 예체능계열 과목을 자꾸만 축소하고 있는 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싶다는 거.

갈수록 자기표현능력이 중요해질텐데 어째서 왜때문에 그런 스킬을 배양할 수 있는 (더불어 자기 감정조절도 배울 수 있고, 자기파괴적인 성향도 줄이고 창의성도 키우고 비판능력도 기를 수 있고, 뭐하나 빠트릴 게 없는) 과목은 자꾸 없애는가 이 말입니다...

잡담은 이쯤 접고

다시 본문으로 복귀해서,

 

사실 이 잡문을 쓰기 시작한 건 며칠 전이라 지금은 이미 세 권을 다 읽었는데, <시녀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으로 충격적이고 암울해서 책을 손에서 떠나보낸 뒤에도 며칠간을 시름시름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안타깝고 속상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 순간에는 모르고 지나간 다음에 상처를 후벼파는 쓰라림으로 복기했을 때야만 발견할 수 있는, 감정의 충돌 뒤꼍에 머무르다 느리게 걸어나오는 남은 마음들을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을까 싶다.

 

"전 그게 좋았어요. 주인공 둘이 작은 추억들을 나누는 장면이. 너무 이상주의적인이야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같이 견뎠다는 게......" -39쪽

 

나도 알아, 그 마음. 윤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94쪽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97쪽

 

진희는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걸 좋아했다. 주제와 핵심 제재를 파악하는 것이 독서의 전부인 줄 알았던 미주는 진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재미를 느꼈다. -192쪽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209쪽

 

특히,

지금 이 사람이 전적으로 내 편인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들어주고 있(는듯 보이)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를 가지고 후에 나를 상처입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지 않나... 이런 지점을 만나면, 꼭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여기저기 긁힌 기분이 된다. 그렇게, 걸려 넘어져 쉬어가는 곳이 많을수록 그 소설은 내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로 마음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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