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느닷없이 물었다. 엄마 내가 필력이 많이 딸려? 솔직한 마음으로, 열 넷짜리가 무슨 필력 운운이니, 필력이란 말이 부끄러워서 낱자로 산산히 부서지겠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뇌내대공사중인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수습 불가능한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아 "잘 쓴다고 말하기가 힘들긴 해" 정도로 대답해 주었다. 허니 아이가 다시 엄마 그러면 나 상처받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엄마가 진짜 솔직히 생각하는대로 말해 줘, 내가 어느 정도로 써? 되물어왔다. 살면서 온갖 난감한 질문 자존심 상하는 질문, 행여 대답 잘못해서 관계 틀어질까 저어되는 질문... 나름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다 헛것이었나 싶게 대답이 궁색해져서 한참을 고민했더니 "대답할 말을 못 찾는 걸 보니까 진짜 못 쓰나보다" 한다.
맞아, 멘탈이 부분적으로 깨져나가도 할 수 없지만, 재보수할 수 있는 걸 뭐. 솔직히 말해줄게, 엄마 생각엔 딱 3-4학년 수준인 것 같아. 이 말에 철옹성같던 자존감에 금이라도 간 표정으로 아이는 내가 정말 그렇게 못 쓰나... 생각하더니 사실 자기가 한국 떠나오기 직전에 국어쌤하고도 그 문제로 상담을 했단다. 선생님은 필사를 권하셨다고. 무슨 책을 권하시더냐 물어봤더니 스스로의 수준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따로 메모해 오진 않았는데 김유정 작가의 작품들을 필사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단다. 김유정이라...
한국에서 같았으면야 뭐가 문제일까, 바로 집 옆에 있는 도서관 가서 책 빌려오고 공책 하나 사 주고 자, 그럼 쌤도 권하셨겠다, 이제부터 필사를 시작해보려무나. 이러고 말았겠지. 그러나 이곳은 디 유나이티드 스테잇ㅊ... 아니었던가... 책은 중고로 구해보고, 공책은 한 권 따로 사야하려나 이러다가 문득 나는 이런 걸 발견하고야 만다.
세상 참 좋네.
출판사에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가 이렇게 격리(...)된 상황이 아니었다면 구매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이 뜻밖의 쇼핑욕구(뭐가 뜻밖이냐, 맨날 머릿속으로 카드번호를 감으며 외웠다 키보드 위에 풀어놓는 게 일상이면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리 없잖은가. 그래도 이왕이면 무료배송 받아야지, 하면서 50달러를 기어코 채운다. 이해는 하면서도 약간 억울한 게 국내판매가와 US판매가가 달라서 사실상 이게 무슨 무료배송이야 배송비 다 받으면서... 주세도 꼬박꼬박 다 떼이는데... 싶지만... 아쉬운 놈이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열심히 구입한다. 세상에 내가 여기 건너와서도 플래티넘 멤버쉽을 유지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도 몰랐는데.
우스운 건 정확히 1주일이면 물 건너 알라딘 박스가 현관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거다. 아마존 프라임 멤버가 아닌 이상, 같은 미국 안에서 주문한 물건도 일주일이 족히 걸려야 도착할까 말까 하는데 태평양 건너 오는 택배가 더도 덜도 아닌 7일만에(사실 지난번엔 5일만에 도착해서 기함하기도 했다) 온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동시에 좀... 그 짧은 시간안에 도착하게 하려고 애를 썼을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기도 하다. 얘네는 1주일이고 2주일이고 갈 때 되면 가니까 기다려 좀, 이래서 사람을 황당하게 하더니만.
아무튼 적지 않은 금액의 카드를 긋게 하셨으니 큰 따님, 필사 열심히 하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