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로자문드 필처의 The Shell Seekers가 최애소설로 쭈욱 남아 있었는데 드디어 새로운 왕좌의 주인이 등극했다... 쟁쟁한 후보들이 많았지만 감수성 최고 예민한 시절에 제대로 꽂혔던 소설을 밀어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그나마 제일 가까이 갔던 소설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클럽이었는데... 뒷심이 딸렸어... 그래서 그 대단한 책이 뭐냐면,



이거다!


각설하고.

이 책과의 만남을 주선했던 책은 이거였다(책이 주선한 책 치고 그렇게 나빴던 기억은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당신의 책더미를 3배 더 늘리는 게 목적이라고 공언하는 이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물론 있을 수 있다, 당연한 말을)? 그림도 글 못지않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더욱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도 열심히 읽기야 하지만 어느 순간 책등과 표지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책이다. 그렇게 책 구경하다 글 읽다 문득 77페이지에 이르면, 책 사랑하는 1인으로 한번쯤 로망을 가져봤을 북클럽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옮기면 문득 시선을 끄는 노란색 책등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 정확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만남은 후에 돌이켜봐도 아무 개연성을 찾을 수 없기도 한데 이 경험이 딱 그랬다. 도대체 무슨 연관성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소재를 다룬 글을 읽다 문득 발견한, 아마도 주인공인 것 같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책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 검색 시작. 


그리고 우리의 자랑할만한 검색엔진은 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는 정보를 전해준다. 고맙게도 '직배송 중고'로 상태좋은 중고가 한 권 등록돼 있었다. 이럴 때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 이건 사야 해!"

모든 상황이 그린라이트를 깜박이며 Go 사인을 열렬하게 보내고 있는데 차려놓은 밥상도 못 찾아먹는 바보가 될 순 없다. 그래서 굳이 먼 바다를 건너오게 해서 읽었다. 이 책도 따지고 보면 먼 바다를 건너 온 아이의 이야기가 주된 소재다.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왜 원서로 읽지 않았는가하면, 논픽션이라면 몰라도 문학 원전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없을 때도 많지만) 있는 건 그림책까지만이라서... 


나한테 되게 달라붙는 책이구나 또 실감한 건 책장을 열고 나서. 

책을 손에 들기 불과 한 시간 전에 바로 주인공 소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도시에 다녀온 참이었기 때문이지... 그 동네엔 한인타운도 있고 재팬타운도 있는데, 이 아이는 아마도 그곳에 살았었겠구나, 그러면서 완전히 실존인물로 착각하게 됐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각별했던 장소가 내게 물리적으로 가깝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발길 댈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 현실과 책 속 사건 사이의 거리감을 이렇게 순식간에 좁혀버린다. 


나오는 흔히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보다 훨씬 영민하고 섬세하다. 이런 캐릭터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읽었던 책이었어도 마지막장을 덮으면 거의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는 성능의 브레인 소유주이므로 한참을 더듬어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오래된 기억의 방에서 끄집어낸다. 여기에 등장했던 팔로마가 나오와 아주 비슷한 인상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얘 이름도 까먹어서 책 정보를 뒤져 기억해낸 거지만. 훨씬 연상의 친구와 마음을 나눈다는 설정도 비슷한 듯. 


정확히는 마음을 나눴다기보다, 여기에서는 일방적으로 맡겨둔 느낌이 더 강하긴 하다. 변덕스럽고 감정적인 또래 문화에 자기를 갈아넣지 않고 혼자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나오가 일방적으로 미움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사회가 갈수록 튀는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데, 10대들의 리그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겠다. 아무리 괴롭혀도 나오는 그대로 단단해 보였으므로, 아이들은 아예 나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갈 데까지 간 괴롭힘의 끄트머리에서도 이 아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어떤 관계, 어떤 힘, 어떤 마음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작품 속의 루스는 나오에게 무엇을 준 것일까. 


나오처럼 홀로 세상을 견디고 있는 아이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현실이 항상 소설처럼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세상이 지코 할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으면 블로그에다 할머니 얘기를 올렸겠죠. 하지만 그건 오래전에 그만뒀어요. 저기 사이버 공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생각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믿는 척하는 날 보니 슬퍼지더라고요. 사실은 아무도 관심이 없잖아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각자의 쓸쓸하고 하찮은 방에 앉아 쓸쓸하고 하찮은 페이지에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올리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글을 쓰고 올리느라 바빠서 아무도 읽지 않아요. 내 슬픈 감정에 그런 수백만의 사람들을 곱해보면 난 좀 가슴이 아파요. -41쪽


시간과 집중은 재미있는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한쪽 극단에서, 루스가 인터넷 검색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초집중하고 있었을 때 시간은 파도처럼 모이고 높아져 하루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반대편 극단에서, 집중이 느슨해지고 분열되면 시간은 마치 알갱이가 있는 것처럼, 매 순간이 정체된 물에 녹지 않고 퍼져 있는 입자처럼 느껴졌다. -131쪽


지코 할머니는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헤이와보케라고 말해요. 그걸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우리가 전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하고 부주의하다는 뜻이에요.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났고 평화 말고는 기억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일본은 평화로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좋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모두 전쟁과 과거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어요. -254쪽


사실은 내가 아는 게 꽤 많더라고요. 특히 영어는 더 그랬고. 하지만 답조차 쓰지 않은 게 태반이에요. 점수가 어찌나 낮던지 무슨 장난 같기도 하고 내게 지적 장애라도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도 난 뭐 그러거나 말거나 했어요. 이제 고등학교엔 갈 수 없겠구나, 그래서 우리 하루키 1번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배웠던 모든 것들을 배울 수 없겠구나 생각하면,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곧 죽을 사람이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고 또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끝까지 해보려는 노력엔 고결한 뭔가가 있어요. 지코 할머니의 슈퍼히어로 간노 스가코처럼요. 교수형에 처해지던 바로 그날까지도 계속 영어 공부를 했고 일기를 썼다고 하잖아요. -468쪽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당신은 알고 싶어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는 자기가 가진 슈퍼파워를 찾은 것 같았어요. 어쩌면 나도 내 슈퍼파워를 찾은 것도 같아요. 바로 당신에게 이 글을 쓰는 거요. -548쪽


자문자답.

쓰는 일이 출구가 될 수도 있겠다. 가능한 한 자세히, 옆에서 함께 지켜본 것처럼.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마치 옆에서 무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듯 쓰고, 마음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휘몰아쳤던 감정들을 뿌리부터 하나씩 갈라놓아 찬찬히 펼쳐 쓰는 일이 나오에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고 가질 수 있는 슈퍼파워가 될 수도 있다. 그냥, 말이 되든 안 되든 문장이 단정하건 소란스럽건, 일단은 쓰기 시작하면 정말로 뭔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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