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드라마화한 동명의 드라마를 이틀을 쪼개어 보았다. 고바야시 사토미와 모타이 마사코가 출연했던 일련의 영화들의 목록을 떠올려 보면 금세 추측할 수 있듯, 역시나 잔잔하기 짝이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다룬 4회짜리 드라마다. 언제부터인가, 교과서적인 기승전-(가끔은 막장)-결로 이어지는 플롯이 견디기가 참 힘들었다.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문자 그대로 견디기가 힘든 거다. 문제는 모조리 나의 지나친 공감능력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주인공들의 감정선에 따라 희노애락이 왔다갔다 하는 것 정도는 양반이지, 심지어는 지나가는 행인 1 정도 비중의 등장인물의 짤막한 사연에도 감정적 동요가 막... 막막 일어나... 아,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른다. 너무 괴로워.
그래서 나는 30대 중반의 어느 시점부터 거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정말 마음이 조여들고 불안하고 어떤 때는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다가 ㅋㅋ 어쩌라는 거냐구... 어떻게 된 게 난 나이를 거꾸로 먹었는지(껍데기는 충실하게 나이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마음을 둘러싼 외피가 얇아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특히 주인공이 불행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소설이라도 한 권 읽고 나면 후폭풍은 어마무시해서 거의 일 주일 가까이 인생은 허무하도다- 라는 기분에 휩싸이고 마는, 줏대없는 사람인 거다, 나는.
여하간...
그래서 일견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기나 한 건가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심지어는 지루해 보이기까지하는 이야기가 좋다. 특히 사람들이 느끼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법한 행복한 순간들의(엄... 주로 맛있는 것 먹고 깊이 만족하는 거? ㅎㅎ) 스틸을 보는 게 좋다. 한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치유받는 그 느낌이 좋다. 내가 삶에서 느꼈던 그 긍정적이고 따뜻한 감정들이, 천천히 슬라이드쇼처럼 펼쳐지고 있는 그 안정감이 빳빳하게 경직돼 있는 경추부터 요추까지 쭈욱 타고 흐르며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샌드위치 가게의 그 주방은 또 얼마나 단정하고 예쁜지!
가게 외관도 정~ 말 심플하면서도 딱 있을 것만 있다. 정신 사납지 않고 딱 좋아.
늘 나를 홀리는 이런 장면들 ㅎㅎㅎ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음식을 만드는 정성스런 손놀림을 보는 건, 그게 영화에서든 실제상황이든 굉장히 감동스러운 일이다. 고바야시 사토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영화 속에서 음식을 만드는 그녀는 참 깔끔하고 섬세한- 음식하는 손의 움직임을 보여줘서, 무슨 초일류 셰프의 시연을 보는 듯이 몹시 황송한 기분으로 봤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난 소설이 하나 있다.
역시나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지만 그래도 역시나 소시민들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작고도 힘든 일들이 고루 섞여있고, 왜 이렇게 괜찮은 소설을 몰라줄까 생각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제목의 작품이다.
위에서 언급한 무레 요코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아키코와 성격도 가치관도 너무나 닮은 여주인이 운영하는 커피하우스에서, 주인공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여주인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배운다.
잡다하고 부질없는 질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슬픔은 건드리지 않아야 터지지 않는다. 슬픔을 치유해 준답시고 무의식을 건드리고 뿌리내린 아픔을 깨우는, 프로이트 식 치료법은 서구의 구식 원론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론을 먼저 정의하고 사례를 찾아낸다. 이렇게 두드려 맞추고, 저렇게 끼워 넣으면, 하나의 학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작은 아픔들이 다치고 부서진다. 나는 타인이 내 고통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아무 변명도 필요없는 침묵의 위안에 더 목마르다. 주인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이런 건 간단하게 사먹어도 되지 않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뭘. 난 작은 것도 일일이 만들어 팔고 싶어. 번거로운 일을 하면 할수록 음식이 맛있어지니까. 그 맛을 알면 좀처럼 포기하지 못하게 돼. 한 번 먹어 볼래?˝
˝저 말이지, 인간은 슬프고 불행한 순간에도 선택적으로 좋은 것만을 취하는 능력이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정성껏 만든 맛있는 음식을 그리워하는 건, 인간의 행복과 자유에 대한 갈망과 같은, 뭐랄까, 귀소본능 같은 것이야.˝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으면, 인간 관계란 어느 순간 변질되고 만다. 사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속에 있는 말을 한답시고 여러 말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생각에 맞추게 되고, 관계 자체가 하나의 족쇄가 된다. 주인은 그 오묘한 거리를 기막힐 정도로 잘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학교에 간 적이 없어. 아버지가 학교는 갈 필요가 없는 곳이라고 했거든. 나는 다른 애들이 학교에 다니는 시간에 아버지를 따라 돌아다니고, 책을 읽고, 글을 썼어. 아버지는 책을 한 권씩 골라 주시고 반드시 독후감을 쓰라고 하셨어. 그런 식으로 지식을 넓혀 갔지. 아버지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은 엄청나게 많은데, 학교에는 그 많은 것들 중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말씀하셨어.˝
˝그 애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막상 나처럼 살기를 원하지는 않았어. 겁이 났기 때문이야.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건 불안한 일이거든.˝
˝나 역시 네가 겪는 경험의 일부야. 어쩌면 지금이 네게 모르던 세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시간이 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을지도 몰라. 모든 건 너한테 달려있는 거야.˝
˝결국 그 사람은 나무가 안겨준 실망 때문에 나무를 증오하게 될 거야. 사랑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 한 순간이라도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어떤 일이 생겨도 증오를 키우지 않아. 인생도 나무와 똑같아. 인생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증오도 없지.˝
먹을 것만 줄창 나오는 드라마에 소설 얘기만 해서 그런가 열한 시도 안 되었는데 배가 고픈 듯한 이 느낌적인 느낌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