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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홍차에 빠지다
이유진 지음 / 넥서스BOOKS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전에는 홍차를 무척 즐겼더랬다.
늘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도 차를 좋아했기 때문에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야 할 정도였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차는 커녕 물 한 모금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로 바빠지고 쉽게 지치는 삶이 찾아오면서 조금쯤의 여유를 어떻게든 마련해야 마실 수 있는 차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 인생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차의 빈자리엔 간단하기 그지없는 인스턴트 커피믹스가 떠억하니 들어섰다.
달고 자극적이고, 그리고 텁텁한 뒷맛을 남기는 커피믹스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한 번 멀어진 홍차와의 거리를 다시 좁히긴 쉽지 않았다. 티백이란 게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티백으로 차를 마시느니 차라리 안 마시고 말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인이 박힌 듯 다시 커피를 마셔댔다. 차와는 멀어졌어도 뭔가를 마셔야 하는 버릇은 못처럼 몸에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병원에서 밤을 새워 읽었다. 아이의 입원 첫날,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잘 수 없었고, 웃기게도 병실 옆 휴게실에서 뽑아온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며 보호자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홍차에 대한 책을 읽었다. 한 두어모금 쯤 마셨을까, 어느 순간 나는 종이컵을 슬그머니 밀어놓고 책에 집중했다.
온갖 불안한 잡념을 떨치기 위해 더욱 활자와 사진에 집중했다.
메모도 간간히 했다. 퇴원하면, 이것과 이것을 주문해야지. 하루에 한 번은 꼭 차를 다시 마셔야지, 몇년 간 찬장 속에 넣어두고 거의 쳐다도 보지 않았던 차들, 정리도 좀 해줘야지. 이런 단순한 결심들을 같이 적어놓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예쁜 사진이 실린 페이지가 있으면 귀퉁이를 살짝 접어도 놓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마셔봤던 차들은 뭐가 있었더라, 내가 무슨 차로 홍차에 입문(?)을 했더라, 어떤 사람들과 같이 차를 마셨고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었더라...? 아이들과 같이 차를 마셔본 적은 있었던가... 하고 옛생각을 더듬기도 했다.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간호사가 몇 번 왔다갔다 하는 동안 오른손에 남은 페이지 두께는 점점 얇아져 갔다.
아, 며칠은 읽을 줄 알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다 읽어 버리다니. 아깝다.
입원 이틀째 날, 잠깐 집에 들렀다가 필요한 물건을 챙기면서, 나는 뜻밖에도 보온병과 무슨 생각에선지 구입해 놨었어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티백 몇 개를 함께 챙겨와서, 병실에 가져다 놓고 몹시 들뜬 기분에 젖었다.
그리고 정말 몇 해 만에 처음으로, 느긋한 기분으로 차를 마셨다. 티백은, 내 예상과- 제대로 루즈 티로 끓인 차가 아니면 맛없어, 라는 뭣도 없는 자만을 깨고 기대 이상의 향과 맛을 전해주었다. 더불어 따뜻한 위로도.
예전에 늘 맛있는 차를 같이 마시러 다녔고, 아직도 생각나면 차 선물을 해주는 친구에게 '나 방금 집에서 가져온 트와이닝의 레몬진저티를 마셨어. 맛있었다'고 문자를 보내니, '얼마만에 들어보는 트와이닝이란 이름인지'하고 웃음기 섞인 답신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좋아했었으면서도 어떻게 몇 년 동안이나 차를 안 마시고 살아왔을까? 티백 하나로도 이렇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을.
책에 대해 개인적인 느낌을 적을 수도 있겠고, 마음에 들었던 챕터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나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떤 생각을 하게 하고 어떤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게 했는지, 어떤 때에 어떻게 위로가 됐는지를 적고 싶었고, 그것이 책의 내용과 인상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