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증폭장치

 

내 친구 걔 있잖아. K. 걔가 너 좋대.”

 

Y는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거리다가 퍼뜩 고개를 들고 친구를 쳐다 보았다. 두근두근. 자그맣게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가 이 소리를 들으면 안 되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을 열면 두근거리는 소리가 샐 것만 같아 Y는 입을 꾹 다문 채 미소만 살풋 지었다. 하지만 살짝 떨리고 만 입꼬리는 불가항력. 그런 Y를 친구는 재밌다는 듯이 계속 바라보았다. Y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뒷통수를 쓸어 내렸다. 민망하거나 긴장하면 나오는 그녀의 버릇 중 하나였다. 그렇게 해야 두근두근하는 이 소리를 조금이나마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

“K. 저번에 나랑 지하철 입구에서 인사한 애.”

..그래?.”

 

Y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지만 살짝 발그래해진 얼굴을 감추려 시선을 돌린 채였다. 학원이 끝나고, 12시간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피곤에 절어있던 귀가길이었는데 갑자기 빨리 내일 아침이 되어 다시 학원에 오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았다. “누구?”라고 반문하긴 했으나 그녀가 K를 모를 리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학원이 끝날 무렵, 복도나 입구에서 자주 마주쳤던 남자 아이였다. 물론 그 아이 말고 마주치는 학생은 수 십 명이지만 유독 그 아이는 Y의 기억에 남았다. 친구와 같은 반이어서 더 자주 보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발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츄리닝에 간단한 티 셔츠를 즐겨 입으며 실눈을 뜨고 실실 웃고 다니는 남자아이의 모습은 이상하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K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서 언젠가부터는,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우연히,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 거의 스쳐 지나갈 때 즈음해서 슬쩍, 얼굴을 훔쳐보면 얽히는 두 눈동자에 Y는 괜시리 화들짝 놀라 다시 앞을 바라보곤 했다.

 

걔가 인사시켜 달라던데.”

 

Y가 평정을 찾으려 할 때에 친구가 던진 말은 다시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동그란 원이 심장께에서부터 간질간질하게 올라와 서서히 퍼져 머리를 둥둥, 울렸다. 우연이, 인연으로 변하는 첫 신호가 자그맣게 들리는 듯 했다.  










#I'm back

 

할 일이 없어 늘어져 있다가, 갤러리 사진도 구경하고, 페북에 뭐 올라온 거 없나 확인하고, 그러다가 친구한테 뭐함?” 이라고 카톡을 보냈다가 답장이 없어 심심풀이의 끝이라는 카톡 프로필 사진들을 구경하기에 몰두해 있는데, 정말 우연하게도. 전 남친 K군의 사진도 보게 되었다.

 

“……사진 바꿨네.”

 

Y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사진을 클릭하여 확대해, 멍하니 쳐다보았다. 더 이상 심심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찍어 주었던 사진 속에서 K는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별 거 아님에도 사진 하나 바꾼 것에 Y의 심장은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더 이상 그녀의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K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시간에 존재의 흔적을 남길 때마다, 그 흔적을 물꼬로 과거는 시간의 경계를 부욱 찢고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오늘처럼 Y가 혼자 집에 가는 길일 때에는 그 파장이 더 크곤 했다. Y는 핸드폰 액정을 끄고 버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미 없는 불빛과 사람들이 초침과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추억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헤어짐이 있었다. 첫 번째 헤어짐에는 그리움이라는 핏물이 손 닿는 곳마다, 눈길 향하는 곳마다 뚝뚝 떨어졌고, 그래서 가슴을 움켜 쥐고 울음 섞인 비명을 계속 토해냈다. 절대 익숙해질 거 같지 않던 아픔이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들고, 두 번째 헤어짐은 조금의 눈물과 조금의 원망만을 남겼다세 번째 만남은 부재했다. 이제 완전히 을 실감하면서도 Y K가 남기는 흔적 중에 자신을 향한 것이 혹여나 있을까하는 기대마저 접지는 못했다. 우연으로 시작된 인연이 끝나자 K Y 사이에는 다시 우연만이 남았다. Y K를 카톡에서 지우지 않고, 번호도 남기고, 페북 친구도 끊지 않은 까닭은 그 우연을 어쩌면 기다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추억에서만 만날 수 있는 K와 닿는 방법은 그것 외에는 없음을 Y는 잘 알고 있었다.

 

카톡

 

액정에 불이 들어오며 누군가에게 카톡이 왔다는 신호가 켜졌다. 톱니바퀴가 드르륵, 하고 돌아가더니 추억이 빨리감기되어 순식간에 사라지고 Y의 시선이 액정 위의 시간에 머물렀다. 친구한테서 답장이 이제서야 온 것이다. “치킨 먹음.” 과거가 다시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우연에만 의지해야 할 만큼 두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헤어짐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졌고, 이제는 고작 치킨에 목을 매는 친구의 메세지가 Y에게는 더욱 현실감이 있게 다가왔다. 피식, 하고 바람빠지는 웃음을 날리고 Y는 답장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화면 위에서 움직였다







*** 


설익음, 풋풋함, 설렘, 아련함.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를 듣다보면 첫 사랑이, 첫 사랑과 함께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K군과 한창 사귈 때 버스커버스커가 폭풍같이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고 버스커버스커 장범준의 보컬은 복고풍 느낌이 많이 나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데 아주 적절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설 익었던 연애가 때도 묻고, 여기저기 구르고 치이면서 닳고 닳자 그 다음부터는 프라이머리의 노래와 더 어울리게 되었다. 프라이머리 가사가 남자 입장에서 쓰인 게 대부분이라, 연애가 과거형이 되고 나서 조금 더 객관성을 가지고 추억을 돌이킬 수 있어졌을 때 아, 걔는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담담하게 많이 들었던 거 같다. 그게 오히려 치유가 많이 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 혼자 하는 추억 여행이고 나 혼자 하는 음악 감상이라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당시에는 함께 걸어갔던 시간이지만 이제는 나만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 아이와는 이제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한 때는 그리움이 향하는 곳이 추억 속의 그 아이라는 것을 모르고 현실 속에 그 그리움을 풀으려고 애쓰느라 눈이 눈물에 항상 발갛게 불어 있었다. 지금은 나 혼자 하는 추억 여행이더라도 그 그리움이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추억에게 부탁해 놓은 그 아이가 가끔 내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지듯이 그리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듯이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을 어렴풋이나마 알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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