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요 JD. 뭐해.

-책 읽어.

-뭔데 뭔데?

-호밀밭의 파수꾼. The Catcher in the Rye.

-아 그거. 나 좋아해. 근데 존 레논 암살자가 체포 당시 이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 때문인지 암살자와 범죄자들의 애독서라는 얘기가 있어. 좀 웃겨. 콜필드는 누구를 죽일 사람이 아닌데.

-콜필드 좀 귀여운 듯?

-난 그 부분이 제일 좋아. 콜필드가, 예쁜 여자친구 샐리를 찾아 가서 자기랑 도망치자고 하는 부분. 그러다 결국 샐리를 울리지. 정말 콜필드스러워. 여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자 없이는 못 살고, 후회할 걸 알면서도 저지르고, 자기가 이 세상과 맞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고칠 생각이 없어.

-동생 피비를 찾아가는 것도 재밌어. 피비가 너무 귀여워.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군.

-지금 너 말고 피비가 침대 위에 앉아 있다면 좋을 텐데.

-나, 콜필드가 피비 사주려고 샀던 음반 진짜로 있는 음반인 줄 알았어. 나도 들어보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안 나오는 거야.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나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어떤 사람이 친절히 써 놨더라. 가공의 음반이라고. 더 멋있지 않아?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피비와 콜필드만 들을 수 있는 음반인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의『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도 비슷한 게 나오는데. 가공의 작가 데릭 하트필드.

-그러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도, J.D. 샐린저도 『위대한 개츠비』의 팬이네?

-나도.

-은근슬쩍 끼지마.

-진짜야.

-ㅇㅋ

-ㅇㅇ

-피츠제럴드의 표현력은 어마어마한 거 같아. 너무 요란하지도, 너무 건조하지도 않아. 개츠비의 분홍 정장은 정말 끝내줘. 개츠비의 성격이 딱 보이지 않아? 난 이 정도도 소화해 낼 수 있지. 이 정장도 어마어마하게 비싸다고. 데이지 나 좀 봐봐. 톰은 이런 거 못 입어.

-그런데 데이지한테는 오히려 역효과지.

-응. 옥스퍼드 출신은 분홍 정장을 안 입으니까.

-닉이 데이지를 만나러 처음 갔을 때 장면 기억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열기구처럼 두둥실 떠 있다가, 톰이 창문을 닫으니까 소파 위로 내려 앉았다는 그 장면. 나 진짜 감탄했잖아.

-웨딩케이크같은 천장도.

-돈의 냄새. 킁킁.

-난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를 읽고 나서였어. 거기 주인공이 『위대한 개츠비』를 사랑하거든. 웃긴 게 뭔지 알아? 『상실의 시대』읽은지가 너무 오래돼서 지금은 주인공이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했다는 것만 기억이 나.

-다시 읽으면 되겠네.

-지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걸작선을 읽고 있지롱. 『해변의 카프카』나 『상실의 시대』는 좀..뭐라고 하지 그로테스크한게 있었는데 이 단편걸작선이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좀더 산뜻한 느낌이라 좋아.

-책을 느낌으로 읽으면 안 되지. 넌 너무 책을 술술 읽는 경향이 있어. 씹어 먹을 듯이 달려들란 말야. 검은 게 글자요, 하얀 게 바탕이니~하며 눈동자만 굴리지 말고. 그 한 단어 쓰는 데 얼마나 깊은 고뇌가 있었겠어. 한 문장이라도 버릴 게 없는 게 소설이야. 책 읽기 좋은 날씨니 계절이니 하는 것도 우스워. 가을이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라구? 오죽 책을 열심히 안 읽으면 계절 정해서, 분위기 따라서 읽을까. 다 끼워 맞추기 마련이지. 봄,여름,겨울은 뭐 안 좋은 계절인가?

-글쎄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책 읽기 좋은 분위기는 있지 않아? 책이 가득 꽂혀 있는 도서관, 좋은 노래를 틀어 놓는 창문이 아주 큰 카페, 따뜻한 내 방 이불 속 등등. 지하철 안도 좋고. 아,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 중에 '택시를 탄 남자'라는 단편이 있어. 거기서 어떤 여자가, 주인공한테 '택시를 탄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그 그림 속 남자는 택시에 갇혀 어디론가 '이동' 중이란 말야. 근데 나도 지하철 안에 갇혀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거든. 잠깐만, 뭐라고 하냐면..여깄다.

너무나도 오랬동안 그 <택시를 탄 남자>를 바라보았던 탓에, 그는 어느 틈엔가 제게 있어서 분신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그는 제 심정을 이해했던 거에요. 저 역시 그의 심정을 이해했고요. 저는 그의 슬픔을 이해했어요. 그는 '범용'이라는 이름의 택시 속에 갇혀 있었던 거죠. 그는 거기서부터 빠져 나올 수가 없었던 거에요. 영원히 말이죠. 진정한 영원 말입니다. 범용함이 그를 거기에 있게 하고, 그리고 범용한 배경의 우리 속에 가두었던 거지요.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는 지하철을 탄 여자였던 셈이지. 순간 나와 그 여자와 택시를 탄 남자 사이에 sympathy가 형성되는 것만 같았어. 앞으로 지하철에서 책 많이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얘기가 센 감이 있지만 뭐 괜찮네.

-애초에 우리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시작했지.

-『호밀밭의 파수꾼』과 『단편걸작선』은 비슷한 점이 많아. 정신없는 스토리 전개도 그렇고 정신없는 주인공들도 그렇고.

-너무 거칠게 묶어버리는데?

-굳이 좀 더 표현하자면, 콜필드는 굉장히 불안정하지. 일단 성인도 아닌데 퇴학까지 당했어. 돈도 없고. 나이, 직책, 돈 이 세가지가 다 없단 말이야. 그런데 무작정 돌아다니지. 술도 마시고, 피아노 연주도 듣고, 창녀를 사기도 하고. 당연히 잘 될리가 없지. 근데 웃긴 건, 만약 콜필드가 성인이고, 직책이 있고, 돈도 있었다면 이 소설은 굉장히 재미 없었을 거야. 바꿔말하면 '완전함'이라든지 '안정' 자체가 참 웃기고 따분하단 거지. 왜 모두들 완전해지려고 하는 거지? 아이들을 봐. 콜필드가 말했듯, 아이들의 일기장은 정말 끝내줘. 언제 읽어도 재밌지. 하다못해 내 어렸을 적 일기장도 재밌어. 아이들은 언제든 호밀밭에서 뛰쳐 나가고 호밀밭을 파괴하려해. 어른이 되면 그 누구도 그러지 않아. 호밀밭의 파수꾼에게 어른은 필요 없어. 아이들만이 그의 관심 대상이지. 콜필드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불안정함을 일부러 유지하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와 같아. 다들 어딘가 불안해 하고, 어떻게 보면 철이 없어. 여자 26명이랑 자고 진득한 연애를 못하는 사람도 있고, 빵가게를 습격했다가 나중에 아내와 햄버거 가게를 습격하기도 하고, 남편이 레더호젠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고 정이 떨어져서 이혼하기도 해. 그런데 그 미성숙함과 불안정함이 소설을 탄생시켜.

-그렇게 치면 『위대한 개츠비』도 마찬가지네. 개츠비도, 톰도, 데이지도 미성숙하고 불안정하지. 그리고 다들 또라이야. 데이지는 예쁘게 생겨서는 아름다운 영국제 셔츠만 보면 눈물을 흘리는 병이 있었지.

-개츠비는 핑크색 정장을 입고.

-콜필드는 사냥용 빨간 캡모자를 썼어.

-너는?

-너랑 이러고 있지.

 

2013년 추운 겨울 집 안에서, 곰돌이 JD와 함께. J.D.샐린저의 사망일이 다가오는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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