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어리다. 말랑말랑하고, 물컹물컹하고, 어딘가 설 익었다. '어리다'는 것과 나이는 상관이 없다. 온전한 하나의 개체가 되는데에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불안정하고 여기저기 잘 휩쓸리고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 너무나 두서없고 솜털 같아서 언제든지 폭풍 한 가운데로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런 자아를 가지고 있다. 단단한 껍질을 지니지 못한다는 건 참 힘들다. 외부의 충격을 온 몸으로 흡수해 눈물로 짜내게 되니까. 물론, 충격의 근원지에는 약간의 반작용만 가해질 뿐이다. 게다가 껍질 없이 무한정 팽창한 솜사탕 같은 자아는 필히 어딘가 툭 튀어 나온 고리에 긁혀나가게 되어 있어,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바심을 내야 한다.
최근 들어 또 조심성 없이 세상을 다 담아내겠다고 몽실몽실하게 피어오르던 내 자아가 불 꺼진 열기구마냥 급격히 쪼그라든 일이 있었다. 자아의 팽창은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바람, 적당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즉 온실처럼 외부와의 차단이 되어 온전히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 틀어 박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나는 온실 바깥으로 나갔다가, 책과 영화에서만 접하던 섬칫한 냉기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어김없이 온실 안으로 돌아와 '힐링'을 바라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내가 내 뿌리로 실제 대지 위에 자리 잡아 양분을 빨아 들이며 실제의 하늘을 향해 뻗어나갈 일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내 힘과 피와 땀을 들여 내 안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기생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기에 벌레같은 나의 몸뚱아리를 느끼고 좌절했다. 이럴 때는 달콤한 케이크도, 뜨뜻한 말 한마디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금처럼 그것들이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실감할 때도 없다.
그러다 보니 책도 안 읽게 되더라. 억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고 싶은데 나의 이런 면이 타인에게는 사자의 눈에 잡힌 어리버리한 얼룩말로 보이니 말이다. 혹은 오통통하게 살이 오른 육질이 부드러운 돼지. 약육강식이 전제되어 있는 사회에서 아무런 칼도, 방패도 없이 내미는 손은 그대로 잘려 나가 금가락지만 빼내고 개밥으로 던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사회는 어떤 사람들이 만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뱃속에 칼을 숨겨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회의가 들어, 그동안 나에게 감명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배를 따뜻하게 지폈던 책들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도 읽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손에 집은 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는 친구가 추천했던 책이라서 읽고 싶었던 와중에 시간이 남아 잠깐 들렸던 신촌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얼핏 안을 살펴보니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 『그 후』에 비교했을 때 분량이 적고 내용도 가벼웠다. 쉬어 가는 시트콤 느낌이랄까. 그렇게 머리를 식힐 겸 읽기 시작해서 정말 이틀 밤 만에 후딱 읽어 냈다. 게다가 표지와 속지가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산뜻한 디자인이라서 동화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최근들어 삽화가 들어 있는 책을 읽은 것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민음사판 뿐이라서 약간 어색한 기분까지 들 정도 였다. 삽화가 있고 없고는 참 차이가 크다. 상상력을 제한하는 삽화는 잘못된 삽화다. 읽는 사람이 끄적거리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최근에는 책에 밑줄을 긋는 것도 나중에 그 부분을 다시 읽을 때 누가 옆에서 스포일러 하는 기분이라 되도록이면 긋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미지에 상상이 달라붙어 버리면 그 책에서 내가 어떤 부분을 좋아했고, 싫어했고와 상관없이 그 이미지로 책에 대한 기억이 구축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중고로 사들인 책의 삽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석의 여지를 풍부히 남겨두는 편이라서 좋았던 것 같다. 너무 알록달록하긴 했지만 나름 시트콤같은 느낌과도 어울렸으니 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0124/pimg_729078148819994.jpg)
게다가 무려, 이 책의 삽화가께서 지인분께 선물하신 책이었다:) 이런 우연이! 안 그래도 글씨체가 참 예쁘다란 생각을 했는데 참 신기했다. 중고책의 매력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정말 의도치 않게 타인의 삶과 교차하는 느낌! 내가 삽화를 그린 책을 지인에게 선물하는 기분을 잠시나마 느껴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선물 받은 책을 중고로 내놔야 했던 사정이 무엇일까 아쉽기도 하고.
튼 내가 만난 나쓰메 소세키의 4번째 소설은 참 신선했다. 무엇보다, 주인공 도련님이 겪는 좌충우돌의 세상사가 내가 앞으로 겪어나가야 할 세상의 풍파같아서 참 절절히 와닿았다. 나처럼 속터지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어린' 도련님은 정직함과 예의가 있다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도련님을 인정해주고 비웃지 않는 것은 기요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도련님은 말 그대로 '도련님'이다. 이 도련님에 담긴 뉘앙스의 잔인함이란. 이 단어 하나로 순식간에 한 사람의 인격이 가치 절하되고 그 사람의 미래 마저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소설 내용이 웃기긴 한데 마음껏 웃지는 못하고 웃다가 자꾸만 한 숨 푹..쉬고 그랬다. 도련님이 너무 나랑 비슷해서. 나 역시, 속은 텅텅 비었으면서 겉만그럴듯하게 포장해 자신을 내세우고 남들에게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고고하게 고개 빳빳이 들고 진흙탕에 같이 나뒹굴지 않으려다가 나도 도련님처럼 호되게 당했버렸던 것이다. 기요나, 센바람, 끝물 호박 선생같은 사람은 많지가 않다. 정말이다. 딸랑이처럼, 빨간 셔츠처럼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괴롭히고 만만하게 봐서 안 그래도 소수의 '도련님'같은 사람들을 음지로 내몰거나 자기들처럼 바꿔버린다. 어렸을 때 죽어라 들려 주는 콩쥐팥쥐 이야기나, 왕자와 거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대체 누구 좋으라고 만든 건지 모르겠다. 모두가 약아지면 안 되니까 나같은 애처럼 물러터진 애 몇 명을 '도련님'으로 키워 나중에 뜯어 먹겠다는 음모가 아닐까.
1906년에 씌인 소설인데 세상 사는 모습은 참 똑같다. 그러고 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놀라운 작가다. 얼마 전에 읽은 『그 후』만 해도 분위기가 얼마나 어두웠는데. 시뻘건 색은 자꾸 등장하고 어디서 진득한 백합향은 자꾸 나고 비도 오고. 『산시로』나 『그 후』에서는 주인공이 화자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주인공의 관점에서 소설이 진행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같은 경우는 고양이가 화자이고, 『도련님』도 도련님이 화자. 즉, 각 소설에는 주인공의 생각, 말투, 행동, 사상 등이 모조리 싹싹 담겨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거대한 우주를 지금 무려 4번이나 창조해낸 것이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도련님』의 분위기가 비슷하고, 『산시로』와 『그 후』의 분위기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 비슷하다는 것도 붉은 계통과 푸른 색 계통끼리 비슷하다는 거지, 그 안에서도 천차만별로 다양한 매력이 있다. 작가가 얼마나 많은 구상과 고민과 노력 끝에 하나의 소설을 탄생시키는 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이다. 분만의 고통 저리가라! 이렇게 슈퍼 우량아를 매 번 낳으려면 10개월은 택도 없고 낳고 나서 산후 조리는 두 배로 해야 할 게 분명하다.
재밌었다. 도련님이 저렇게 깨지고 멍들고 모욕 당해도 끝끝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내게 필요한 것은 자책이 아니라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나한테 누가 아가씨라고 놀려도 그래, 나 아가씨 맞다. 그러는 넌 뭔데? 하고 그 사람에게도 제멋대로인 별명을 갖다 붙일 수 있을 만한 자신감. 혹은 깡다구. 고마운 나쓰메 소세키 아저씨다, 과연.
참 산뜻한 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