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해야할 일.

1. 아침 자습 마치고 교탁 위에 놓여있을 예쁜 '낙엽'들을 가려뽑아야한다. 11월 이벤트!! 예쁜 낙엽 컨테스트.. 내 눈에 젤로 이뿐 낙엽 3장을 골라 책을 상으로 줄 생각이다. 독후감 경연대회 목록으로 올라와 있는 상 중에서 아이가 원하는 것으로... 아! 작년에 부석사 가서 줏어온 단풍잎이랑 은행잎에 축하멘트 적어서 코팅해 책갈피에 살짝 꽂아줘야겠다. 역시 난 이벤트의 여왕이다... ㅋㅋ

2. 교지 작업으로 1,2학년 반장을 불러야한다. 그리고 그동안 이러저러한 교내 그림그리기,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아이들도 불러서 자신의 글은 워드작업하고 그림(환경의 날 4컷만화)은 다시 그려서 내달라고 해야한다. 아! 그리고 3학년 반장들의 '1년 돌아보기'와 학생 회장 부회장들의 인사글도 챙겨야하고...

3. 학교운영위원회의가 있다. 급식 업체가 계약연장을 신청해왔다. 흠.. 이 일은 미리 했어야하는 일인데.. 늦었다. 솔직히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다. 사전에 샘들과 아이들에게 급식만족도나 계약연장 찬반, 계약 연장이 될 경우 업체에 바라는 사항 등에 대한 설문을 해야했는데... 샘들은 메신저로 급조하고 아이들의 의견도 내일 수업 든 네 개 반에 알아보아야겠다. 그럴려면 지금 간단한 설문이라도 만들어야할까? 학급문고에 대한 추가경정예산을 잡아달라는 것을 기타안건으로 상정하는 것은?

4. 아이들과 함께 부산일보사에 [박노자 강연]을 들으러 갈 계획이다. 8교시 보충수업을 째야하는데 허락은 각자가 부모님께 받아오라고 해두었다. 8교시면 2학년 부장샘 시간인데 미리 말을 해두어야할지 그냥 가는 게 나을지 조금 고민된다. 지난 번 김종철씨 강연에 따라가겠다는 예린이와 소연이를 샘께 올려보냈더니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시면 불쾌해하셨다. 나 역시 불쾌했다. 평소에는 출석체크도 잘 안하면서 부모님 허락 받아 담임이 강연 데리고 가겠다는데 '수업을 빠져서 되겠냐'는 둥 '그 강연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둥..  암튼 내일은 어쩔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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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11-2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식업체 계약기간 연장에 관한 설문] - 교사용

학교급식직영전환계획이 2009년으로 연기됨에 따라 현 급식업체(삼보유통)가 현 계약서의 '부산광역시교육청의 직영전환 계획에 따라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연장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에 따라 계약기간 연장을 신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들의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다음 질문에 적절하게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 올해 급식비가 교사 2,600원 학생 2,300원으로 작년에 비해 300원씩 인상되었습니다. 가격 인상 후 급식의 질에 만족하십니까?

*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현 급식업체의 계약기간 연장에 찬성/반대하십니까? 찬성/반대에 대한 이유를 써주십시오.

* 현 급식업체와의 재계약을 수용할 경우, 선생님의 입장에서 업체에 반드시 요구하고 싶은 조건이 있으시다면 써주십시오.

해콩 2006-11-20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식업체 계약기간 연장에 관한 설문] - 학생용

학교급식직영전환계획이 2009년으로 연기됨에 따라 현 급식업체(삼보유통)가 현 계약서의 '부산광역시교육청의 직영전환 계획에 따라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연장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에 따라 계약기간 연장을 신청했습니다. 이에 대한 학생 여러분의 의견을 묻고자 합니다. 다음 질문에 적절하게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 올해 급식비가 교사 2,600원 학생 2,300원으로 작년에 비해 300원씩 인상되었습니다. 가격 인상 후 급식의 질에 만족하십니까?

*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현 급식업체의 계약기간 연장에 찬성/반대하십니까? 찬성/반대에 대한 이유를 써주십시오.

* 현 급식업체와의 재계약을 수용할 경우, 학생 여러분의 입장에서 업체에 반드시 요구하고 싶은 조건이 있다면 써주십시오.

해콩 2006-11-2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아무튼 급식업체와 계약할 때 교원위원이 입회하여 우리의 조건을 성문화한다는 조건하에 기존 업체와 수의 계약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바꾸고 싶어하는데 나를 포함한 어른들은 귀찮고 번거로워서 그 밥을 아이들에게 그냥 먹이기로 했다. 다른 업체가 들어와도 그게 그거고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박노자칼럼] 내가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까닭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기획연재 : 박노자 칼럼
최근에 필자가 대중 강연을 했을 때 일이다. 월드컵 축구 광풍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스포츠 애국주의를 국가가 이용하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발제가 끝나고 질의 시간에 청중 한 분이 물었다. “국가간 대항전 형태의 축구 시합에 빠져드는 것이 왜 위험한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운동 경기라도 보면서 응원하지 않으면 여가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로서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이 일종의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끼치는 최악의 해악이 무엇인지 바로 그 순간에 생생하게 체감했다. 자본주의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의미하는데, 자본주의 초기나 오늘날인 자본주의 후기에 생산·소비의 주체는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최근에 순천의 하이스코나 포항의 포스코, 서울의 고속철도(KTX)에서 생존권을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현대형 천민, 비정규직들은 생산의 주된 주체가 됐지만 소비 주체에서 상당부분 배제된 상태다. 그들에 대한 과도 착취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의 모순점이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으로 남아 ‘중산층’을 자칭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과연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인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많은 경우 ‘좋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가게 되는 직장에서의 고된 근무가 끝난다고 해도, 체제가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말 잘 듣는 것’이 ‘착하다’는 것을 익히고, 학교에서는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꼭 외워야 할 정답이 하나씩만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군대에서는 ‘튀는 행동’이 신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익힌 이들은, 자본이 강요하는 노역의 시간이 끝나고도 곧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중독에 빠져든다.

소비의 대상은 재벌이 만들고 파는 소주·맥주나 백화점의 상품이 되든, 아니면 재벌이 협찬해주고 재벌의 광고가 계속 눈에 띄는 텔레비전 속의 운동 경기가 되든, 우리를 노역시켜주고 돈 쓰는 기쁨을 안겨주는 우리의 주인들, 곧 재벌들의 손을 벗어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거의 없다. 바보상자의 화면에서 국가·재벌이 고용한 현대판 검투사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처절한 싸움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눈을 감고 내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 인연에 대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고, 한반도 곳곳에 보이는 산에 올라 새들의 노래를 듣고 나무·꽃들과의 침묵의 대화를 가져볼 수도 있고, 이 땅에서 과거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문인들의 글을 천천히 음미해볼 수도 있고 ….

괴롭게 태어나고 괴롭게 죽게 돼 있는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평온과 고요함의 시간을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내향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어울릴 줄 모르는 낙오자의 설교로 들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런 기성세대가 있기에 수만 명의 10대들이 온라인 게임의 중독자나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일 것인가? 어릴 때부터 이미 폐인이 돼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텔레비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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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북방 사극’: 화면 속의 ‘페니스 파시즘’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기획연재 : 박노자 칼럼
현실이 버거울수록 민중의 두뇌를 마비시킬 초강력의 마취제가 더 필요해서일까? 불황으로 영세민의 생활이 망가지고 노동 불안화 정책으로 비정규직들이 대규모로 양산되는 이 시대에, 시청자로 하여금 현실의 애환을 잊고 화면 속의 볼거리에 몰입하게끔 만드는 사극들이 유달리 많이 나타난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 고대적인 갑옷·무기·의상도 ‘볼거리’지만 이들 영화는 무엇보다 보는 이의 ‘민족적 감수성’에 호소한다.

현실 속에서 입시 지옥과 대학들의 학비 인상, 취직난과 조기퇴직 압력, 비정규화와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늘 한숨만 쉬게 돼 있는 선남선녀들로 하여금 한나라, 당나라의 군대를 쳐부수는 등 ‘힘’을 과시해 온 고구려, 발해의 ‘기상’을 즐겨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껴 ‘위대한 과거’의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문화전략인 셈이다. ‘북방 사극’들이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고구려인들의 단군 숭배 등을 연출시키면서 국수주의로 흘러간다는 비판은 이미 여러 번 제기됐는데, 사실 강경한 민족주의야말로 이 영화들의 호소력의 주된 기반인 듯하다. 민족주의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존재해 온 다양한 종족, 국가들을 뭉뚱그려 ‘똑같은 우리 한민족’으로 묘사하여 이 ‘한민족’의 ‘기백’과 ‘힘’을 찬양하는 담론이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는만큼 현실에선 힘을 잃어가는 개개인들에게 바로 ‘우리 힘’의 숭배야말로 최적의 위로, 최강의 정신적 마취제가 되는 법이다.

시청자의 상당수가 사극의 내용을 ‘역사’로 받아들이기에, 신빙성이 있는 사료에 기록돼 있지 않은 장면들을 안방극장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북방 사극’들이 설령 무리한 추측을 ‘역사’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해도 그 효과를 긍정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북방 사극’도 대다수의 일반 사극처럼 역사의 중심적 주인공으로 남성을 등장시키는데, ‘북방 사극’은 이 남성 주인공의 주된 활동 분야로 전쟁, 곧 살육을 만든다. ‘북방 사극’이 제공하는 ‘화려한 볼거리’란 살기 띤 눈을 부릅뜬 중무장한 남성들이 서로 찌르고 베고 토막 내는 아비규환의 장면들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성다움이란 곧 폭력 능력이고 진정한 사나이란 바로 다른 진정한 사나이를 주검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극을 통해 계속 가르친다면 과연 군사문화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일본의 군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지만, ‘화려한 전투장면’이란 일본의 우파적 전쟁 긍정론에 못잖은 군사주의적 선전이 아닌가? 물론 사회통합 차원에서 역사 속의 영웅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남북을 더 가까워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구려사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한-중-일 사이의 이해 증진을 염두에 두어 중국에서 천태교관의 실천자로 이름을 높인 고구려인 파약 스님이나 일본인들에게 종이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고구려 화가 담징 스님을 사극의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동북아 국가 사이의 약육강식만을 꼭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 관변 쪽과 일본 우파의 군사주의적 민족주의를 미워하면서도 꼭 베껴야 하는 것인가?

역사는 칼을 찬 근육질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 어린이, 장애인, 종교인, 그리고 연개소문과 같은 착취계급의 우두머리들을 상대로 해서 투쟁했던 민중의 반란자들에게도 그들의 역사가 있다. 방송사가 남성 지배자의 칼만을 ‘우리의 위대한 과거’의 상징으로 만든다면 이것은 최악의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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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우리에게 없는 것, 일터 민주주의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기획연재 : 박노자 칼럼
몇 달 전, 시베리아의 한 군부대에서는 러시아 전국을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새해 전야에 얼차려를 받았던 한 신참이 고참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다리와 성기 등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절단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참 구타 근절의 문제가 잠시 도마에 올랐는데, 여론 ‘주류’가 주장한 제안은 헌병대 창설, 이전에 폐지되었던 영창의 복원, 군목 역할 강화 등의 ‘감시·처벌’ 방향의 안들이었다. 급진 좌파 쪽에서는 신·고참을 막론해 모든 사병의 권익을 대변할 ‘병사 협회’ 창설, 곧 병영 생활의 민주화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주류’ 언론에서 묵살하고 말았다.

1917년 2월의 민주혁명 이후 ‘병사 소비에트’ 덕분에 제정러시아 군대에서는 하급자에 대한 폭력의 병폐가 고쳐져 내전 시기의 적군(赤軍)에서 ‘고참 구타’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현재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징병제 군대에서는 일종의 ‘사병 노조’가 합법적으로 존재해 폭력 방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돈이나 학력, ‘빽’이 없어 군에 끌려온 총알받이들이 자신의 대표자를 뽑고 그들이 머리 빳빳이 들고 장교들과 동등하게 대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내무반의 선거를 상상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는 아마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민주사회의 원칙상 군인도 자치권을 가진 시민이지만 지배자들이 볼 때 군에 끌려온 사람은, 다만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한치의 어김도 없이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하는 ‘국민’인 것이다.

분단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최고의 성지인 군대는 그렇다 치자. 그러면 우리에게 배움터와 일터의 민주주의는 존재하는가? 학교에서 반장이 교사의 ‘착실한 보조원’ 구실을 벗어나, 학생들을 대표해서 학교의 행정에 참여하거나 또는 결정권을 가지지 못해도 학생들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거나 권고하는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가? 보수 언론들은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을 전개하는 대학교 총학생회들을 ‘운동권 주도의 과격단체’로 몰고 있는데, 필자는 학교 당국들이 등록금 등 학생 관련의 사항을 결정하기 전에 왜 한번쯤 학생들의 자치기구들과 제대로 협의해 본 적이 없는지, 그렇다면 학생들을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의 동반자가 아닌, 바치라는 대로 바쳐야 하는 ‘아랫것’으로 아는지 등 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대기업들이 일부 이권을 ‘나눠먹기’해서 노조 간부들을 부정부패의 공범으로 만들어 개별적으로 포섭·관리할 줄은 알지만 왜 노조 간부들을 노동자의 대표자로 인정하고 경영에 긍정적인 동반자로 참여시킬 줄은 모르는가? 보수 언론들이 ‘강성 노조’ 운운하지만 노조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당하는 경우에 사용자에게 포섭되지 않는 이상 강성 투쟁의 길로 나가는 방법 말고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제 기득권 집단은 그들의 부와 권력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절차적 민주화’가 다 됐다고 대내외적으로 크게 홍보하지만, 일터와 배움터에서는 민주적이랄 수 있는 외형조차도 없이 지배·복종의 관계가 가시적이며 노골적이다. 생산 관계에서 독재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백 명의 학생·노동자 활동가에 대한 징계·연행·재판·실형선고 등 ‘공권력’의 폭력이다. 군부 독재가 물러간 이 시점에서 학교·직장의 참여 민주주의 투쟁이야말로 시의적절하지는 않은가? 또한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막는 좋은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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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여승무원들에게 절을 바친다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기획연재 : 박노자 칼럼
‘지는 자는 비참하다!’(Vae victis!) 이 라틴어 속담은 우리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윤 저하 위기에 빠져 비용절감 경쟁을 벌이는 각국 자본이 잉여가치 수취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동자들을 원자화한 개체로 만들려고 총공세를 펴는 상황에서는 ‘밀리면 죽는다’는 것이 철칙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의 ‘게임 룰’을 한번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본은 곧 노동을 고립시켜 박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한편, 끈질긴 진지전을 편다면 이미 확보된 ‘영토’(예컨대 유럽의 경우 1945년 이후에 구축된 복지 시스템)를 지킬 뿐만 아니라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노동계의 전위를 담당했던 2만명의 광산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고 광업을 다시 구조조정하겠다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에 맞서 1984년 3월 광산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약 1년 지속된 파업에서 몇몇 노동자들이 죽고 1만1천여명이 검거되는 등 치열하기로 전례가 없었지만, 정부에 포섭당한 다른 산업별 노련들이 연대를 거부한 탓에 광산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그 패배로 광산 지역이 세습적 빈곤의 지대로 변한 것은 물론, 신자유주의에 영국 노동계가 저항할 능력을 당분간 잃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70년대까지 확보해 온 많은 혜택들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무상 교육권을 잃은 영국 대학생들이 내야 하는 연간 약 500만원까지의 등록금이 한국에 비하면 싸지만 추세로 보아 몇 해 뒤 한국만큼이나 대학생들을 수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우파 정권의 복지제도 개악 시도에 맞서 95년 약 200만명의 노동자들이 나선 총파업 투쟁을 비롯하여 계속 크고 작은 충돌을 통해 복지 모델을 지키려고 힘을 쏟은 결과, 2000년부터는 주당 35시간 근무제 시행 등 새로운 성과까지 올렸다. 유럽 최장의 노동 시간에 시달리는 영국에 견주면 행복한 노릇이라 하겠다. ‘목소리를 내는 만큼 복지를 얻게 된다’는 법칙을 믿기에 현재 프랑스의 청년과 노동자들이 청년노동을 비정규화하는 악법에 맞서 길거리로 나가는 것일 거다.

초과 착취의 대상이 된 비정규직의 조합화 시도들이 곳곳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는 한국의 경우에는 그래도 암흑 속에서 빛이 보인다.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정규직 사업장에서는 70년대의 전설적인 동일방직 투쟁과 비견될 만한 끈질긴 저항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만들고 이중 착취를 가능케 하는 외주화를, 해고 위협을 무릅쓰고 거의 한 달 가까이 반대하여 싸워온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들을 보면, 미래의 대한민국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의 장이 아닌 연대·복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회사가 그들이 개별적으로 투항한다면 ‘시혜’를 베풀어준다고 유혹해도 끝까지 위탁업체 아래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노예 생활을 거부하는 그들은 수백만 명의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러한 현장의 투쟁들이 전국적인 비정규직의 조합화·정규직화 운동으로 확산된다면 자본의 비인간적인 공세가 결국은 역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제하 ‘불령선인’들이 지금은 독립투사로 불러지듯이, 지금 투쟁으로 쓰러지고 ‘업무방해’와 같은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고, 해고·가압류로 생계 곤란자가 되는 비정규직 운동가들이 미래에는 우리를 경쟁의 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게 한 노동계의 영웅으로 불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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