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목)


29일(금)


30일(토)


1일(일)


2일(월)


3일(화)


4일(수)


1


퍼펙트 커플

[12:00]


달콤한

열여섯

[12:00]


마음

[12:00]


관타나모로

가는길

[11:00]


퍼펙트 커플

[12:30]


달콤한

열여섯



[12:00]


소립자

[12:00]


2


립자

[13:50]


소립자

[13:40]


관타나모로

가는길

[14:10]


숏 버스

[12:50]


달콤한

열여섯

[14:20]


숏 버스

[13:40]


마음

[13:50]


3


와 늑대

사이의 시간

[16:00]

GV

전수일 감독

진행:오동진


퍼펙트 커플

[15:30]


 


 


관타나모로

가는길

[16:00]


마음

[15:20]


숏 버스

[16:00]


4


관타나모로

가는길

[17:20]


숏 버스

[17:50]


소립자

[16:50]


소립자

[17:50]


소립자

[17:30]


달콤한

열여섯

[17:40]


5


숏 버스

[21:50]


숏 버스

[21:50]


소립자

[21:50]


퍼펙트 커플

[20:50]


숏 버스

[20:00]


관타나모로

가는길

[21:50]


퍼펙트 커플

[21:50]


 

 

 

5일(목)


6일(금)


7일(토)


8일(일)


9일(월)


10일(화)


11일(수)


1


마음

[12:00]


소립자

[12:00]


퍼펙트 커플

[12:00]


관타나모로

가는길

[11:00]


퍼펙트 커플

[12:30]


마음

[12:00]


스틸라이프

 

&

 

마리

앙투아네트


2


퍼펙트 커플

[14:10]


달콤한

열여섯

[13:50]


소립자



[13:50]


숏 버스

[12:50]


소립자

[14:20]


퍼펙트 커플

[14:10]


3


달콤한

열여섯

[16:00]


퍼펙트 커플

[15:30]


 


 


관타나모로

가는길

[16:10]


소립자

[16:00]


4


숏 버스

[17:40]


관타나모로

가는길

[17:20]


숏 버스

[17:50]


퍼펙트 커플

[16:50]


숏 버스

[18:00]


관타나모로

가는길

[17:50]


5


소립자

[21:50]


숏 버스

[21:50]


관타나모로

가는길

[21:50]


소립자

[20:50]


달콤한

열여섯

[20:00]


숏 버스

[21:50]


 

 

신에게 바치는 화려한 선물, CINE休 ORCHESTR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성과 빈민은 같은 처지다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운 저항시인 허난설헌

▣ 이덕일 역사평론가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에서 허난설헌이 ‘소천지(小天地·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으로 여겼다고 적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조선의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동인 영수 허엽(許曄)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주들도 진서(眞書·한문)를 배우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漢詩)를 배울 수 있었다.



△  허난설헌의 시비와 무덤. 그는 모순된 조선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다.(사진/ 권태균)


8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였던 여동생의 영특함을 높이 산 조치였다. 허난설헌은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평가될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했던 이달은 서얼이란 이유로 등용되지 못했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뛰어난 문재(文才)임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이달을 보면서 허난설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떴다. 허난설헌이 최경창과 백광홍을 예로 들면서 “낮은 벼슬아치 녹 먹기 어렵고/ 변군(邊郡)의 벼슬살이 근심 많아라/ 나이 들어 벼슬길 영락하니/ 시인이 궁핍하다는 말 이제야 알겠네”(‘견흥’(遣興)) 라고 노래했다. 서얼이 아니었던 최경창·백광홍의 궁핍에 대한 노래는 역으로 서얼 출신 이달의 궁핍 정도를 짐작게 한다.

남편 없는 집에서 외로움에 떨다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허난설헌은 열여섯 무렵 혼인하면서 사회 모순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된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과거에 거듭 낙방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서는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 누가 봤을까 반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로 아내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였다. 허난설헌은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조선 남성들의 처신을 조롱했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탄 그 꼴/ 아침부터 양양주에 취하고 나선/ 황금 채찍 휘둘러 대제(大堤·중국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던 색주가)에 다다랐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손뼉 치고 비웃으며/ 다투어 백동제(白銅?·악곡 이름)를 불렀다네.”(‘색주가를 노래함’(大堤曲))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난설헌과도 사이가 서먹해진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이 ‘술집의 노래’(靑樓曲)에서 “길가에는 술집 10만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문밖에는 칠향거(七香車·향목으로 만든 수레)가 멈춰 있네”라고 노래한 것은 색주가나 드나들던 남편 같은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혼인생활만이 아니었다. 18살 때(1580)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한데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으며, 게다가 스물한 살 때인 선조 16년(1583)에는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허봉은 이듬해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한 채 선조 21년(1588) 38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역시 객사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떨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잠 못 이루니/ 먼동 틀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 많으리”(‘사계를 노래함’(四時詞))라는 노래나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인 것은/ 임 그리며 1년 방초 한탄함이로다(‘규방의 한’(閨怨))”라는 노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남성들에 대한 실망은 진정한 남성상에 대한 희구로 나타났다.
“선봉대 나팔 불어 진영문을 나서는데/ 붉은 깃발은 얼어붙어 날리지 않네/ 구름은 캄캄한데 서쪽 신호불이 반짝이고/ 밤 깊은데 기병은 평원을 사냥하네/ …/ 장군은 밤중에 용성(龍城) 북으로 진군하고/ 전사들의 북소리 병영을 울린다/ …/ 금창은 선우(單于·흉노족의 왕) 임금의 피로 씻고/ 백마 타고 천산(天山)의 눈을 밟고 개선하네.”(‘변방을 노래함’(塞下曲))
중국 고대 한(漢)나라 장수의 북방 흉노족 정벌을 그린 노래로서 비록 중국 남성을 빌렸지만 허난설헌이 바라는 남성상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색주가의 남성을 조롱하고, 대륙을 달리는 기상을 지닌 그를 조선의 여성인 시어머니가 사랑할 리 없었다. 허균이 ‘훼벽사’(毁璧辭)에서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받은 그의 의지처는 두 아이였으나 남매에게도 비극이 잇달았다.


△ 허난설헌이 그린 <양간비금도>. 허난설헌은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한시를 배울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슬픈 세상을 떠나 도교의 세계로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네/ 사시나무 가지에 바람 소소히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반짝이누나/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불러서/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자식을 애곡함’(哭子))
이런 불행은 그를 도교의 세계로 안내했다. 도교는 현실에 상처받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이덕무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규수 허경번(許景樊·허난설헌)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라고 쓴 것처럼 ‘여도사’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이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흰 봉황새 타고’ 도교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에서 “피리 부는 소리 잠시 꽃 사이에 끊기는 동안/ 인간 사는 고을에는 일만 년이 흐른다오”라고 노래한 것에선 허무한 인간 세상을 떠나 신선들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허난설헌은 ‘달 속에 있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마지막 구절에서 피안의 세계를 구체화한다.
“육지와 바다가 변해도 바람 수레를 타고 오히려 살아서, 은창(銀窓)으로 노을을 눌러, 아래로 구만리 머나먼 세계를 굽어보리. 옥문이 바다에 임하면 웃으며 삼천 년 동안 맑고 얕은 상전(桑田)을 보도록 하시며 손으로 삼소(三?)의 해와 별을 돌리면서 몸은 구천(九天)의 풍로(風露) 속에 머물게 하소서.”
그러나 이런 세계는 마음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산물이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모순된 사회구조의 정점에 억압이 있었다. 허난설헌은 억압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시각을 넘어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
이처럼 피지배층의 빈곤과 지배층의 부유를 비판하던 허난설헌의 분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로 확산되었다.
“수(戍)자리 고생 속에 청춘은 늙어가고/ 장정(長征)의 괴로움에 군마도 여위어가네.”(‘변경을 지키러 나가는 노래’(出塞曲))
“모든 백성들이 달공이 쳐들고/ 땅바닥 다지니 땅 밑까지 쿵쿵거리네/… / 성 위에 또 성을 쌓으니/ 성벽 높아 도적을 막아내겠지/ 다만 무서운 적(恐賊) 수없이 몰려와/ 성 있어도 막지 못하면 어찌 할 거나.”(‘성 쌓는 원한을 노래함’(築城怨))

노동의 소외까지 간파하다

‘가난한 이웃·수자리 군인·축성하는 백성’은 모두 사회구조의 하부에 있는 피지배층들이었다. 축성으로도 막지 못할 ‘무서운 적’은 바로 그 백성들이란 함의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에서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민’이 같은 처지임을 간파한다.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김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추워도 주려도 내색을 않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오직 아버님만은 불쌍하다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삐걱삐걱 베틀 소리 차갑게 울리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었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동료인간)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나아간다”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라는 난설헌의 시구는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라는 구절은 가난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한 절창으로서 그 자신이 가난한 여인에게 깊게 동감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렇게 허난설헌은 한 여성의 시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에 칼을 들이대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허균은 “우리 누님은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다”라면서 “그래서 삼구홍타(三九紅墮)라는 말이 바로 증험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삼구홍타는 허난설헌이 23살 때(1585) 지은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夢遊廣桑山詩)에서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차갑네”(芙蓉三九朶/紅墮月霜寒)라고 노래한 것이 27살 때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뜻이다. 야사 <패림>(稗林)도 27살 때의 어느 날 목욕 뒤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27)의 수인데,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허균이 “유언에 따라서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세상에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 간행

허난설헌이 세상을 떴을 때 동생 허균은 만 20살이었다. 그는 누이의 시를 묶어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해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라는 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도 출간되면서 소천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문명이 알려졌다. 숙종 37년(1711)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개인적인 한으로 삭이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부당함을 노래했다. 그는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고보니 너희들에게 쓰는 첫 편지구나.
나도 참 무심하기도 하지...
올해는 담임도 아니고... 비교적 한가롭게 살고 있는데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귀여운 네놈들에게 편지 한 통 못 쓰고 뭘 하며 살았누...

처음 동아리를 만들고 너희들 반짝이는 눈빛을 맞닥드렸을 때의 그 느낌이 살아오는구나.
독서동아리 함께 하겠다고 너희가 찾아왔을 땐 솔직히 나도 산마루도 낯설고 뻘쭘했었다. 너희도 마찬가지? ㅋㅋ 너희는 우리의 무얼 믿고 찾아왔던 것이냐? ㅋㅋㅋ 학교운영위원회실에서 가졌던 첫 모임 때, 아직 얼굴을 못 익혀 미안스러워했던 기억도 있군. 그땐 우리가 그랬구나. 그치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업에 들어가서도 누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참~ 왠지 모르게 든든하더라. 다른 아이들에겐 쪼~끔 미안하지만 우리만의 교감이랄까 공감이랄까 뭐 그런게 느껴져서. 너희들도 그랬냐?

안 쓰던 편지를 이렇게 쓰게 된 건, 음~ 조금 심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요즘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고, '우리가 하려는 것이 과연 무얼까'하는 동아리활동에 관한 뒤늦은 성찰일 수도 있어.

산마루나 내가 처음 동아리를 꾸려나가려 마음 먹은 시점부터 이야기해야할까?
통 책읽을 시간이 없는 너희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책을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누고싶다'는 것이 산마루와 나의 소박한 첫 번째 목적이었다. 마침 교육청에서 주어지는 예산도 있으니 너희에게 몇 권의 책은 사줄 수도 있겠다 생각했고. 사실 너희들 책 사볼 용돈, 궁하잖아. 우리 학교 도서실에도 좋은 책이 진짜 많지만 '내 책'이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니까. 그건 소유욕을 떠난.. 뭐랄까 친밀감? 무엇이든.

그리고 너희랑 하고 싶은 활동도 많단다. 이미 몇 가지는 치러냈지. 솔직히 생각보다 참여하는 숫자가 적어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너희가 학교공부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영화와, 역사와 문화를 숨 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단다. 은빛 물고기처럼 생기있게 파닥거리는 너희들 모습을 상상했지.

내신도 신경써야하고 내년이면 고3이니 슬슬 수능 걱정도 될거고... 학교 공부에 대한 이런 저런 부담도 만만치 않지? 하지만 애들아~ '공부'란게 과연 무얼까? 학교나 학원에서, 수업시간에, 책상머리에 붙어앉아서 하는 '공부'만이 '공부'의 전부일까? 평소 수업시간에도 가끔 이야기했지만 '진짜 공부'란 그렇게 바로바로 효과가 드러나는, 수치로 환산되어 성적이 나오고 등수가 매겨지는 그런 부분보다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겨 나가는 것, 나라는 사람을, 또 나의 생각을 남에게 자신있게 표현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또는 설득 당하고 옳다고 배운 것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공부란 그런 것이며 그런 것이라야하는 것 아니겠니? 교과서는 그 내용 중 아주 좁은 부분일뿐이라 생각해.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걸까? 그것도 그렇게 열심히 해야하는 걸까? 성적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 남들이 애기하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좀 더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서?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 오직 그런 목적만으로? 대학, 직장, 임금, 지위 그런 것들도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것들만 충족되면 내 삶이 따뜻하고 행복할까?  가치있는 삶이란 어떠해야할까?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해. 식상한 말이 되겠지만 행복이란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부와 지위만으로 이룰 수는 없는 것 같아.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늘 오늘과 현재를 희생하라는 말... 기만스러워. 지금 행복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미래 어느 시점에 행복할 수 있을까? 내 행복의 정체에 물질과 지위 이외에 또 다른 무엇도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말이야. 

그래, 다시 생각해보니 산마루나 나는 너희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나보다. 오늘, 당장, 학교라는 공간 또는 그 밖에서 함께 행복을 느끼고 싶었나보다. 그것도 중요한 공부방법, 공부목적의 하나라고 믿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 힘들수도 있지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러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도 부쩍 자랄 거라고. '활동하는 건 조금 힘들지만 요즘 나, 무지 재미있고 무지 즐거워~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고 함께하는 친구들도 모두 다르지만 소중한 존재야~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이런 것이 살아가는 것이구나' 뭐 이런 감탄 말이야.

요즘, 너희도 산마루나 나도 조금 느슨해졌지? 정기 모임에서도 얼굴을 볼수 없는 두빛나래가 점점 많아지고 준비한 활동들이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 교육청 강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홉산, 각종 다른 토론 행사 참여, 달빛산행 등등.. 책 읽어내기도 빠듯한데 자꾸 이런 저런 곳으로 나들이 가자니깐 짜증도 날거구.

흠... 고민을 많이 했단다. 그렇지만 역시 너희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너희에게 부담을 주는 동아리 활동이라면 무엇이 행복할 것이며, 무슨 공부가 될 것이며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무엇보다 너희 스스로가 행복하고 뿌듯하고 만족스러워야지. 그래야 함께하는 우리도 행복하지. 자기존중감, 행복감도 전염성이 있나봐.

그래서 더 이상 동아리 활동을 하기 힘든 사람은 빼주기로 했단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해.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이것이 탈퇴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다음부턴 빠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지.

처음... 독서동아리 꾸릴 때, 그건 일년을 바라본 일종의 '약속'이었다. 산마루와 내가 욕심이 많아 이런 저런 외부 활동에 너희를 참여시키고 싶어했던 건 인정! 하지만 미리 나눠주었던 [활동 계획서]에 그런 내용들은 모두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건 모두 선택 사항이었지. 산마루도 나도 너희에게 강요할 수는 없단다. 강요하고 억눌러 상대방의 숨통을 죄는 교육은 어떤 명분을 갖다대더라도 참교육이 아니라고 보거든. 

최소한의 활동- 매월 두 번 있는 독서토론 모임과 놀토마다 있는 교육청 강연-은 우리의 처음 약속처럼 나름대로 성실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일이 있는 등 사정이 생기면 빠질 수도 있지. 그러나 최소한 산마루나 나에게 사전에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 오버일까? 너희에게 무리한 요구일까?

독토동아리... 뒤늦게 찾아오는 바람에 탈락된 아이들이 여럿 있었단다. 우리들의 활동이 너희에게 이제는 부담스러운 무엇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다른아이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될 수도 있었을거야. 너희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는 것이고 너희 중 누군가가 그 혜택을 부담으로 느끼고 이제와서 빠지길 원한다면 그건 결과적으로 다른 아이가 누릴 수도 있었을 그 혜택을 빼앗는 짓이 되는 거야. 결과적으로.

이게 바른 선택인지 여전히 많이 고민스럽지만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간에 빠질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그리고 빠지지 않더라도 앞으로는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활동하도록 하자. 최소한 우리들이 정한 책은 다 읽고 모임에 참가하도록 노력하고, 교육청 강연도 정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꼭 참여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미션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되도록 산마루와 나도 더 신경쓸게.

나름 성실하게 열심히 참여하는 너희들 모습, 너무 이쁘고 대견해. 지금은 너희가 다소 힘들더라도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 틈틈이 행복감을 느낀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고, 또 당장 도드라지게 표나지는 않더라도 우리들의 이 시간들이 언젠가 너희 삶에 빛나는 무엇이 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구나.

두빛나래-기대에 들떠 이름 짓고 만나왔던 우리 독서동아리, 여전히 애정이 있고 함께 하고 싶다면 짧은 답장 써줄래? 문자도 좋고 찾아와서 귓속말로 속삭여도 좋고, 책상 위에 쪽지를 남겨도 좋아. 20일(수), 21일(목), 22일(금) 삼일 동안 기다릴게. 계속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지 않는 사람은 아쉽지만 이쯤에서 빠지는 걸로 생각할거고. 혹시 you가 빠졌다고 산마루나 내가 미워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는 않겠지? 우린 그렇게 유치+치사하지 않단다. ㅋㅋ

우리가 끝까지 '함께'이기를 바랬다. 그치만 조금 변화가 생긴다고 해도 너희들 모두 여전히 소중하고 이쁠거야. 교사라는 직업의 원죄 중 하나는 아이들을 탓할 수 없다는 것! ^^ 어떤 상황에서도. 산마루나 내가 스스로도 모르게 너희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아픔을 주었다면 그  본심이 무엇이었든 우리들의 잘못일거야. 표현법이 세련되지 못했거나 너희 마음을 오해할 수도 있었겠지. 언제나 어른보다 더 너그러운 너희가 이해해주길 바래. 그리고 산마루와 나의 '본심'이 무엇이었을까... 한 번만 생각해주길 바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떠난다고 해도, 남는다고 해도 너희들 똑같이 다~ 이쁠거야.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이뻐해야하는 것' 힘들지만 이것 또한 교사의 의무거든. ㅋㅋ

2007년 6월 19일 교무실에서 강낭콩과 산마루가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6-1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음 고생이...
나무는 제 스스로 잎을 떨굽니다
 

탈식민주의와 문화주체 이동연의 문화강의

2007/02/23 16:36

http://blog.naver.com/sangyeun65/110014715632

첨부파일탈식민주의문화주체-sangyeun65.hwp
 

탈식민주의와 문화주체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흑인이란 검은 인간이다. 즉 일련의 감정적 편향의 결과로 그는 그가 빠져 나와야 할 우주의 심층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바는 검은 피부의 인간을 그 스스로 해방시키는 것 뿐이다.


                                              프란츠 파농



1. 문제설정: 탈-식민주의 개념의 이해


요즘 서구의 문화적 생산물을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읽으려는 새로운 비평적인 방법론들이 자주 목도된다. 한동안 서양 문학을 연구하는 문학도들에게는 가문의 족보나 성경처럼 여겨졌던 서구 문학의 위대한 경전에 대한 해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부르주아 텍스트에 대한 인간주의적, 신비평적 해석으로부터의 단절과, 그러한 텍스트들에 대한 전복적인 글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 여파로 소수 민족작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서구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시각에서 오래동안 벗어나 있던 텍스트들의 역사적 복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 문화 생산물에 대한 비판적인 독해들은 최근의 이론 동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그러한 독해를 이론적으로 가장 잘 뒤받침해주는 것이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가 아닌가 싶다.

국내에서도 요즘들어 탈-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이 개념에 대한 적절한 정의조차 공유가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탈-식민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구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논의해야 할 점들이 많아 보인다. 사실 ‘탈-식민주의’라는 말에는 역사적인 시기구분, 인종, 지역, 성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2차세계 대전 이후의 제국주의-제3세계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하나의 명제로 명료하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탈-식민주의에서의 ‘탈’(post)이라는 접두어가 80년대 이후부터 지속되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주의’의 파급효과에서 나온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예컨대 포스트주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를 같은 문화적 맥락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있다. 탈-식민?! 聆풔? 미국 다원주의 대중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대변하는 탈구조주의에서는 발견되기가 힘든 서구와 제3세계 사이의 구체적인 정치적, 문화적인 억압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 역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며, 탈-식민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들의 방법론이 탈구조주의의 몇몇 핵심 개념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들의 이론들은 담론투쟁을 통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자신의 정치적 전략을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앞의 이론들보다 더 현실개입적이고 세속적이다.

한편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용어를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해서 독립을 쟁취한 후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과정의 피해를 본 모든 문화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는 지적은 각 민족-국가의 식민지 역사와 문화적 상황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너무 일반화시키는 정의이다. 또한 패트릭 윌리암스(Patrick Williams)나 로라 크리스만(Laura Chrisman)의 언급 처럼 식민지 군사지배가 종결되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결합되는 ‘신식민지적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탈-식민지란 용어를 문제없이 사용하기에는 많은 장벽이 있다.2) 앤 맥클린토크(Anne Mcclintock)는 이전의 식민국가를 탈식민국가로 간주하는 것은 유동적이며 논쟁적임을 강조하는 데, 왜냐하면 핵심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자신이 계속해서 무기를 대주고 적대의 분위기를 조장시킨 그 국가를 상대로 걸프만에 무력개입하고, 박애주의를 가장하여 소말리아에 군사적인 개입을 감행한 것, 이런 모든 사실등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시기에 행했던 태도들과 전략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3) 그리고 탈-식민주의를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 의거해서 설명하려는 논의도 있다. 서구의 제국주의 역사를 크게 4단계로 구분할 때, 통상 그 용어가 사용되기 전인 레닌 이전의 맑스의 단계,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로 지칭한 레닌의 제국주의 단계,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신식민지적 단계,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다국적 자본?! 聆?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4번째 단계를 탈-식민주의의 단계로 말하 는 것도 제 3세계 국가 내의 경제적 발전의 불균등성을 고려하지 않는 바이겠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포스트콜로니어리즘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후기’로 사용되건 ‘탈’로 사용되건 그 자체로 완전한 경계긋기란 불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기술적인 쓰임 역시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문제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것이 ‘근대성’, ‘근대주의’(modernism) 또는 ‘근대화’(modernization)에 대한 성격규정이듯이, 바로 식민지적인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용어 사용자의 비판적 인식이다. 예컨대 현재의 제 3세계적 상황을 식민주의가 완전히 청산된 상황으로 본다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단절의 의미가 강한 탈-식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서구의 지배 담론이기가 쉽다. 거꾸로 현재의 상황을 2차 세계 대전까지의 제국주의 지배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으로 본다면 ?! 怠뵈?콜로니얼리즘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게 되며, 그것은 오히려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에 가깝다. 이 두 입장은 현재의 제국주의-제3세계 사이의 사회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절’로 낙관하거나, ‘종속’으로 비관하는 양극단의 태도를 보이는 데, 이러한 태도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동과정에서 제 3세계적 실천의 담론적, 이데올로기적 장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용어 사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미 탈-식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셈이 되었는데, 이 때 ‘탈’이란 접두어는 식민지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확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뒤의 본말(식민주의)과 접합 시에 대단히 유동적이고 불확정적인 의미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필자가 ‘탈’과 ‘식민주의’ 사이에 거리를 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탈’이라는 의미는 논의되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다. 예컨대 탈-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담론과 투쟁할 때 ‘탈’의 의미는 ‘반’(anti)의 의미에 가까우며, 파농과 사이드의 식민지 담론이나, ‘네그리튜드’4)(Negritude)와 같은 본질론적인 민족주의! 를 비판할 때, 그 의미는 ‘연속’의 의미에 가깝다.

탈식민지주의 개념과 연관해서 한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그것을 하나의 ‘담론적(이론적/비평적) 실천’으로 제한해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직접적인 정치적 해방을 요구하기 보다는 서구의 역사에 공고하게 자리잡은 동양인, 혹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지식-체계를 해체하고 전복하려는 대항 담론을 내세운다. 그러한 대항담론은 70년대 ‘종속이론’이나 80년대 ‘신식국독자론’과 같이 ‘제 3세계의 독자적인 해방이론을 정립하는 것이기 보다는 서구의 지식-체계에 스며든 동양관의 이데올로기를 밝혀내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서구의 지식-체계와 문화적 관습과 조응해서 형성되는 제 3세계 주체들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종의 해석적인 실천인 것이다.

담론적 실천으로서는 탈식민주의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 이후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 푸코의 계보학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결합해서 서구의 지식체계에 대한 전복적인 글읽기를 시도했다면, 가야트리 스피박(G. Spivak)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호미 바바(H. Bhabha)는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아이자 아마드(A. Ahmad)는 맑스주의. 찬드라 모한티(Chandra Mohanty), 사라 술레리(S. Suleri)는 페미니즘을 각각 자신의 이론의 축으로 삼아 식민지 담론들에 대해 좀 더 정교한  비판을 가한다. 본 글은 각각의 이론가들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탈식민주의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각 이론가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필자의 주를 참고하기 바! 란다. 


2. 식민지 주체형성

   

반식민지 저항이론의 선구자인 프란츠 파농은 1925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1943년 알제리 내전에 참가한 그는 아프리카에서 서구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목격하면서 식민지 저항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953년 이후 알제리 쥬앵빌 병원에서 5년간 일하면서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게 되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서구인들에 대한 독특한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검은 피부, 흰 가면󰡕(Black Skin, White Mask)5)은 그가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알제리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서구(프랑스)와 서구인들을 직접 경험한 정신질환자들은 서구에 대한 공통적인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서구인들을 우월하고 지적이며, 흑인들은 열등하고 야만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다. 정신질환자들은 이 이분법이 가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그것을 거의 진리처럼 믿으며 자신의 사고관이나 행동양식을 그 이분법적인 신화에 맞추며 살아간다. 파농은 백인의 우월감이나 흑인 열등감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흑인들의 컴플렉스를 형성시킨 감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흑인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해석만이 유효하다고 말한다(10쪽).

파농은 그 정신분석학적 해석에서 언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언어현상을 통해 유색인들은 백인의 차원을 이해하는 방법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파농이 고찰한 바에 의하면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은 프랑스어를 자기의 국어로 하면할수록 보다 더 백인에게 가까와진다는 점, 바꿔말하면 한층 더 진짜 인간에 가까와지는 것으로 믿는다. 식민지 원주민은 지배 국가의 문화적 규범을 자기의 가치로 여기면 여길수록 정글 속에서 탈출할 수 있게되고 피부의 검은 빛, 즉 미개발 상태를 부정하면 할수록 백인에게 가까와진다(19-20쪽). 프랑스 언어는 따라서 백인과 흑인을 묶어주는 하나의 지주가 되면서, 프랑스인이 되고 싶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은 언어를 통해 프랑스의 문명과 의식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한다. 이는 언어과정을 통해 흑인 주체들이 자신을 프랑스인으로 형성하?! ? 바라고, 자신과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동일화하려는 욕망을 꿈꾸는 일종의 자기 컴플렉스의 징후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파농은 흑인들의 컴플렉스를 검은 피부의 여자와 유럽남자, 검은 피부의 남자와 유럽여자와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흑인들에게는 자기의 개별성으로부터 도망가고 자기현존을 파괴하려는 신경증적인 소외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시한다(61쪽). 흑인들의 자기소외는, 예컨대 파농이 분석한 백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서인도 흑인 여성 메이요트 카페시아처럼 백인의 주위를 끌려는 자기고립, 보호적인 자질을 획득하려는 화고한 의지, 백인처럼 강해지고자 하는 관심으로 이어져 이런 것들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는 부분으로 변하게 된다. 파농은 이런 컴플렉스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백인이 흑인들에게 은연 중에 강요한 허위의식과 그 허위의식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흑인들의 동화작용이 만들어낸 가상효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나의 혼이 가장 검은 부분으로부터 얼룰! 덜룩한 줄무뉘를 따라 갑자기 백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른다”라는 발언은 특히 백인 사회에 살고있는 흑인들의 주체 형성을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측면이다. 흑인들은 이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비난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기형적인 형태로 만들게 하다. 파농은 바로 여기에서 흑인들의 신경증적인 컴플렉스가 생긴다고 보고, 그것을 치료해주는 것이 중요한 실천으로 생각한다. 파농은 백인들이 강요한 허위의식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치료술로 세계를 다시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85쪽)고 역설하는데, 그의 그러한 생각은 흑인 자체의 우월성을 반대급부로 내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소외로부터 해방으로가는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미리 결정하지 않고 스스로 “오, 나의 육체여”(235쪽)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끝임없이 던질 때 진정한 자기모습을 찾을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파농이 식민지 주체의 정신병리학적인 형성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팔레스틴 츨신 사이드는 서구 지식-체계의 담론과정에 주의를 기울인다. 사이드는 팔레스틴인이면서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기독교인인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을 비롯한 서루 제국주의의 강력한 비판자이면서도 동시에 회교 분리주의에도 반대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은 무엇보다도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대한 해체를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문명/야만, 선/악, 정교도/이교도, 물질/정신과 같은 서양과 동양에 대한 이분접적인 사고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사이드는 방대한 서구의 문학 텍스트와, 역사문헌 등을 통해 검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 옛玲? 관계하는 빙식으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으로 “문화적이고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그러한 동양의 모습들을 제도나 어휘, 학문, 심상, 강령, 심지어 식민지 관료체제나 식민지적 스타일에 도움을 받아 하나의 담론 양식으로 표현하고 표상하는 것”6)을 의미한다. 좀 더 압축해서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권위를 세우려는 서양의 스타일이다(3쪽). 사이드가 추적하고 있는 점은 서양의 정치적인 폭력과 탄압의 증거들이 아니라, 서양의 동양에 대한 지식 축적 과정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그렇지만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현들과 스타일들이다. 그래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하나의 담론으로 고찰하지않고서는 유럽문화가 동양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군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고 과학적이고 상상적으로 다루어왔고 생산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이드는 푸코의 ‘지식-권력’ 개념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결합해서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효과를 설명하고 있는데, 푸코에게서는 동양을 담론화하는 서구의 역사적 문헌들의 권력 의지를, 그람시에게서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불군등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각각 읽어내고 있다. 특히 사이드는 그람시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가 지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의(consent)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서구가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서구밖의 문화에 대해 “우월한 입장”을 차지하는 것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점을 오리엔탈리즘의 주요한 작통 메카니즘으로 본다. 요약하자면 오리에탈리즘에 의한 서양과 동양의 관계는 그의 말대로 “권력과 지배, 그리고 다양하고 복잡한 헤게모니의 관계이다”(5쪽)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이론적인 문제설정으로 정하면서 직면한 문제들을 세가지로 말하는데, 그것이 순수한 지식과 정치적인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둘째는 방법론 상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문제설정(problematic)을 말하는 전략적인 위치(strategic location)와 전략적인 구성체(strategic formation)에 관한 것이고, 세째는 개인적인 자신의 위치가 갖는 특이함에 관한 것이다. 첫째는 문학 연구가로서의 자신의 입장이 결국은 정치적인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려는 방대한 분야의 문헌들과 문학 텍스트들이 직간접적이든 제국주의 권력의 작용점으로 작동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는 자신이 쓰고 있는 동양에 관련된 자료와 관련하여 저자가 그 텍스트 안에 어떤 위치에 있는가하는 점을 기술하고, 텍스트들과 텍스트! 들의 그룹과 유형들이 나중에 문화전체에서 대량화 되고, 농밀하게되고, 지시적인 권력을 갖게되는 방식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20쪽). 그리고 세번째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틴 지식인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제국주의 투쟁이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의 정치적, 문명적 오리엔탈리즘을 교정하기 위한 “기록의 싸움”임을 강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서양의 동양 지식은 동양의 진실이 아니라 단지 권력과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표상일 뿐이다.


3. 하위주체와 모방의 주체


사이드와 함께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 진영에서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야트리 스피박과 호미 바바는 식민지 담론의 대전제라 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을 문헌적인 분석과 같은 계보학적인 접근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다. 예컨대 억압당한 식민지 주체의 정신치료술을 위한 파농의 분석이 식민지 주체의 정신구조를 해체하고 있고, 제국주의 담론의 구성과정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은 서구 주체의 담론 구성체를 해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식민지 담론을 둘러싼 이 대립주체들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규명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스피박과 바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데, 이들의 논의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대전제가 놓치고 있는 식민지 주체 자체의 복잡한 구성 형태를 미세하게 읽어내?! ? 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이론적 구체화이자, 한편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자칫 빠지기 쉬운 계보학적, 이데올로기적 분석 수준을 극복하는 새로운 이론틀이라 할 수 있겠다. 좀 더 부연하자면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담론의 형성과정만을 주로 언급하는 것과는 달리, 스피박과 바바는 ‘주체화 양식 과정’(타자화과정)과 ‘담론 과정’에서 서구와 비서구의 비선형적이고 불확정적인 경계를 문제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스피박과 바바에게 서구/비서구 주체,  혹은 서구/비서구 담론의 이분법적인 경계는 지도상에 그려진 추상적 구획처럼 실제로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요하는 지형이다. 이 동요의 관계를 스피박과 바바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사이의 동요의 관계로 파악한다. 요약하자면 이들은 지배/피지배의 문제를 어느 한쪽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절합관계에서 나오는 ‘효과’로 본다는 점에서 식민지 주체를 의식적인 주체로 보려는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스피박은 󰡔하위주체 연구󰡕라는 책 서문에서 하위주체 연구(subaltern studies)에 대한 본질론적인 민족주의와 계급주의 평가를 피하고, 그들의 주체-의식을 해체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7) 「하위주체 연구」는 구아(Guha)가 중심이 되어 인도의 하위문화를 연구를 하는 그룹으로, 푸코식의 계보학적인 접근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방법론으로 사용하여 인도 역사의 지식-권력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그룹이다. ‘하위주체’는 인도의 민중계급이 아니라 지배계급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지식인 그룹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하위주체 그룹에 대한 스피박의 평가를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하위! 주체’, ‘하위주체 연구’, ‘하위주체 연구 대상’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피박은 주로 하위주체들의 순수하고 자명한 의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들이 연구해온 담론들의 재현가능성에 대해 의문시하려는데 이 때 하위주체는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위주체 연구는 담론적인 차원에서, 하위주체 연구 대상은 재현의 차원에서 각각 부정되고 있다.

스피박의 표현에서도 나타났듯이 “하위문화 연구의 작업 안으로 들어가 그것의 결을 거스르는 것”(13쪽)이 그녀의 하위주체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인데, 말하자면 하위주체연구의 의식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해체주의적인 시각으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면을 이 글에서 발견할 수있다. 스피박은 하위주체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위주체들이 연구하는 민중계급들(소작농, 봉기자들)과 그들을 이론화하고 지식화하는 부르주아 주체들과 그들의 지식 담론을 구분하려고 하며(예컨대 ‘담론적 치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 전자의 텍스트 재현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이 의도는 결국 이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하위주체들의 의식의 결정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의식의 순수성, 그 의식 실천의 관념론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스피박은 이 글에서 크게?! ? 맑스와 데리다(좀 더 넓게 말하면 알튀세르의 ‘주체없는 과정’, 혹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푸코의 계보학까지 확장된다)를 결합하고 있으며, 특히 주체의 실천의식의 전통적인 틀이라 할 수 있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통해 그 관념적 성격을 지워내고 있다. 요컨대 맑스의 계급투쟁의 핵심 논점이라 할 수 있는 낡은 계급관계에 대한 청산(sweep away)의 문제를 맑스가 본래 사용했던 지양(Aufheben)의 개념이 갖는 이중적인 의미(유지되면서 동시에 끝장내는)에 주목함으로써, 계급의식에 대한 명목론(nominalism) 관점, 즉 주체-효과로서의 계급의식을 독해해 내고 있다. 주체-효과로서의 계급의식은 주체의 정체성의 이질적인 요소들에 의해 구성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런 견해를 뒤받침해준다.


주체-효과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구성될 수 있다. 하나의 주체로 작동하는 듯해 보이는 것은 정치학이나 이데올로기나 경제학이나 역사나 성이나 언어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가닥들의 광대한 불연속의 네트웍의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 자체가 수만가지 환경에 의존하는 이질적인 결정체들에 의해 이러한 가닥들의 다른 매듭과 형태배치들은 작동하는 주체-효과를 생산한다(12-3쪽).


스피박이 하위주체 그룹에 대해 언급하는 ‘자기소외’나 ‘부정적인 의식’과 같은 말들은 제 3세계 지식인 주체들의 실천에 있어 통상적인 시각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통상적으로 제 3세계적 지식인 주체의 실천은 오히려 스피박의 언급과는 정반대로 ‘자기해방’과 ‘긍정적인 의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해방’과, ‘긍정적인 의식’은 여전히 서구/동양의 이분법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을 전제로한 것이기가 쉬었고, 그것이 자명한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민족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고 있었다. 스피박의 해체주의적인 분석은 제 3세계 주체들의 본질론적인 정체성을 거부하고 주체-효과가 생산해 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정체성의 생동적인 모순관계를 포착한다. 스피박에게 있어 계급과 계급의식은 어떤 결정된 실체가 아니라 ! 데리다 식으로 부단히 차이를 두고 지연시키는 ‘주체-효과’이다.

스피박의 논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하위주체 의식을 동일성 보다는 차이를 통해 인식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주체로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정치학이나 이데올로기나 경제학이나 역사나 성이나 언어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가닥들의 광대한 불연속의 네트웍의 부분이 되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가 수만가지 환경에 의존하는 이질적인 결정체들에 의해 이러한 가닥들의 다른 매듭과 형태배치들은 작동하는 주체-효과를 생산한다. 스피박은 주체를 구성하는 수준에서 “계급”은 결국 인간의 생동성에 대한 절대적인(inalienable) 기술이 아니며 기술적인 수준에서 계급의식은 그 자체로 전략적이고 인공적으로 재편하는 인식이다라고 말한다. 그 인식은 변형적인 수준에서 집단 의식이 상황에 따라 발전해왔던 바로 그 계급의 윤곽을 구성한 기제들을 파괴하고자 하며, 이 때에 작취?! ? 지배의 사회적 장 내에 계급 혹은 집단성의 “의식”의 임무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자기소외적이라고 스피박은 생각한다. 그녀는 집단성 의식이 자기를 소외시키는 치환하는 운동, 그리고 집단성의 의식에 의한 그런 운동에서 생겨나는 전략적인 이해관계의 틀 속에서 자기결정과 소외되지 않은 자기 의식이 제기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그녀의 언급은 하위주체 연구 그룹들의 부르주아적 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보여진다. “주체를 마비시키지 않고, 블가능성의 조건들을 가능성으로 지속적으로 변형시기면서, 탐구 주체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9쪽) 이른바 해체주의적인 전략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피박이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없다”8)라고 단정한 것은 그들이 어떤 완결되고 고정된 담론 형태와 주체의식을 갖을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하 하겠는데, 이러한 그녀의 주장이 결국은 하위주체들의 연구만이 아니라 모든 반식민지적 실천의 무효성을 주장하는 데로 나가는 것은 아닌지하는 ! 의문이 든다. 

한편으로 스피박이 하위주체 연구 그릅들의 의식들과 그들의 담론 형태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연구가 제국주의 담론에 흡수되지는 않았나하는 점에 대한 지적이다. 󰡔식민지 담론과 탈식민지 이론󰡕의 편자인 윌리암즈와 크리스만이 언급하듯이 하위주체가(the subaltern)가 식민지적이고 자국 제국주의적 담론과 주체성에 반성적인 역할보다는 구성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가하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하위주체는 식민주의자가 자신의 이론화를 진척시키기 위해 식민지 이전에 구성된 주체성과 지식, 원주민의 현존, 위치, 정치적 저항을, 식민지 담론의 결정적이고 주요한 역할로 삼았던 것보다 더 구성적인 역할을 한 면이 있다(16쪽 참고). 

스피박이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식민지 담론을 재구성하고 있다면 호미 바바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라캉의 욕망이론을 통해 식민지 담론의 양면성(ambivalence)을 지적해내고 있다. 바바는 식민지 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타자성(otherness)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하는 데 있어 ‘고정성’(fixity)의 개념에 의존하는 것.9)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서구인 대 비서구인의 관계를 고정시켜 그 안에 선/악, 문명/야만, 이성/감정과 같은 항을 대입시키는 정형화된 틀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바는 그러한 고정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그 경계가 대단히 모호하고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본다. 식민지 담론에서 문화?! ?/역사적/인종적 차이의 기호로서 고정성은 역설적인 재현 양식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질서뿐만아니라 무질서, 타락, 악마적인 반복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형화(sterotype)는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이미 알고있는 것과,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것 사이에 동요하는 지식과 동일화의 형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식민지적 정형화를 통하게 만들고, 변화하는 역사적 담론적인 국면에서 그 정형화가 반복되게 만들고, 그 정형화가 개인화와 주변부화의 전략들을 알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양면성의 힘 때문이다(66쪽).

바바는 이러한 식민지 담론의 양면성을 모방(mimicry)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바는 식민지적 모방은 다시 만들어지고 공인된 타자, 즉 거의 동일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는 차이를 가진 주체로서의 타자를 욕망한다고 말한다.10) 이는 모방의 담론이 양면성의 주변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방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계속해서 자신의 미끄러짐과 초과와 차이를 생산해야 하는, 즉 양면성을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바바는 모방이라고 명명했던 그런 식민지 담론 양식의 권위는 미결정성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모방은 그 자체로 자신을 부인하려는 차이를 생산한다. 즉 모방은 타자를 전유할 ! 수 있는 조절과 훈육의 전략이지만, 반대로 식민 권력의 지배적인 전략 기능을 수미일관하게 하고, 복종을 강화하며, 표준적인(normalized) 지식들과 휸육적인 권력에 내재적인 위협을 가하는 전유할 수 없는 것의 기호, 즉 차이와 고집의 기호이다. 이러한 모방의 양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위협이 될 수 있다. 모방의 위협은 식민지 담론의 양면성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담론의 권위를 분열시키는 이중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바바가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언급하면서 모방의 양면적인 성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식민지 주체의 저항을 은밀히 읽어내려는 것도 이러한 이중의 비전과 맥락이 닿아있다. 그러나 바바가 말하는 모방의 과정이 식민지 주체의 저항의 가능성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라캉의 환유 개념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면이 분명 존재한다. 바바가 “식민지 모방의 욕망은  현존의 환유라는 전략적인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 라캉의 환유개념에 기댄 설명인데, 이것이 식민지 주체의 저항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어려운 것은 기본적으로 라캉?! ? 환유개념은 욕망의 결핍, 즉 요구의 실제 대상을 소유하지 못하는 기표의 치환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바가 말하는 ‘모방의 양면성’이 식민지 담론을 전복하는 어떤 설명 틀이 되기위해서는 모방의 욕망이 표상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들뢰즈 말대로 그 자체로 생산적인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4. 이산과 문화정체성


지금까지 파농과 사이드, 스피박과 바바를 통해 주로 주체과정과 담론과정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었다. 탈식민주의에서 실제로 중요한 실천은 이러한 담론적인 실천 외에도 과연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가하는 정체성의 정치학도 중요한 문제이다. 식민지 주체하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서구 주체에 의해 억압당하는 타자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타자로서의 식민 주체는 그 내부에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백인/비백인(white/non-white) 관계는 수많은 인종적이고 종족적인 이질성 속에서, 일자/타자(the one/the other)의 관계는 계급, 성(sexuality), 성차(gender)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식민 주체의 정체성은 대립적인 서구 주체와 이항을 이루어 단순하게 단일한 실체성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 질적이고 모순적인 속성 속에서 서구 주체와 관련을 맺는다.

일례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언급한 카리브인들의 이산의 정체성을 들어보자. 홀은 문화 정체성을 말할 때 두가지 입장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입장은 문화 정체성을 하나의, 공유된 문화, 즉 일종의 집단적 ‘하나의 진실한 자아’라는 견지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우리의 문화 정체성들은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공유된 문화적 코드들을 반영한다. 두 번 째 입장은 유사성을 말할 수 있는 많은 요점들이 존재한다는 것 뿐이라 우리 실제 존재(아니 오히려 역사가 개입된 이래로, 우리가 되어온 존재)를 구성하는 심오하고 중요한 차이에 대한 비판적인 요점들도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홀은 하나의 경험과 하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것의 다른 측면들, 즉 카리브인의 독특함을 구성하는 파열들과 불연속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카리브인들의 정체?! 봉? 올바로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11) 홀은 문화 정체성은, ‘있음’(being)의 문제만이 아니라 ‘되어감’(becoming)의 문제이며, 과거에 속해 있는 것처럼 미래에도 속해 있고, 어떤 본질화된 과거에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와 권력의 지속적인 ‘유희’에 종속된다고 말하면서 ‘식민지적 경험’의 상처깊은 특정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입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394쪽). 그래서 홀은 카리브인의 문화 정체성은 유사성과 연속성의 한 축과, 차이와 균열의  다른 축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 두 축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의해서 정체성은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카리브인들의 정체성을 살펴보면 그들의 현존은 크케 아프리카적 현존과 유럽적 현존, 아메리카적 현존으로 분리되는 이산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결국 홀이 의도하려는 이산의 경험은 본질과 순수성에 의해서 정의되는 게 아니라 필연적인 이질성과 다양성을 재인지하는 것에 의! 해서 정의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차이와 함께 사는, 설사 그렇지 않다해도 , 차이를 통해 사는 정체성의 개념에 의해서, 즉 혼종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산의 정체성들은 변형과 차이를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항상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그런 것이다(402쪽). 


5. 식민지 근대와 여성주체


한편 식민지 주체의 인종적인 정체성을 이야기 할 때,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논의는 중요한 문제임도 불구하고 제대로 언급되지 못했다. 술레리의  지적대로 당대 페미니즘 담론에서 탈식민주의는 문화 전투장에서 지유롭게 떠다니는 메타포나 인종의 역사성을 위한 쓸모없는 기표로 읽히는 경향이 있다.12) 특히 국내의 민족주의 담론에서 여성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않는 실정이다. 제국주의 지배과정에서 여성들이 당한 이중의 억압, 말하자면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의 동시적인 억압은 유발 데이비스(N. Yuval-Davis)와 안티아스(F. Anthias)가 언급하듯이 여성들과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것은 국가적, 민족?! ? 과정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역동성은 탈-식민주의적이고 식민지주의적인 담론 이론 양자에 모두 핵심적인 쟁점이 되는데, 왜냐하면 민족성이 젠더와 관련된다면, 젠더는 노동과 국가에 대한 질문들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그것이 또 노동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 노동의 요소가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든 안되든 가부장적인 담론 내의 여성의 구성이 물질적, 가사적, 성적인 노동들의 구성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13) 한편으로 데니즈 칸디요티는 이슬람 국가가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주의 기획들 내부로 흡수되어 들어가는지를 설명한다. 칸디요티에 따르면 주권을 가진 민족-국가 내에서의 시민주의로 요약할 수 있는, 여성이 근대적 민족성에 통합되는 과정은 남성의 궤도와는 약간은 다른 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여성들은 비록 민족에서 그들의 중심성이 항상 재확인된다해도 정치의 주변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14)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을 말할 때, 우리는  늘 서구인들의 정체성과 대비시켜 언급하곤 한다. 압둘 잔 모하메드(A. JanMohamed)가 언급하듯이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사이의 관계에는 마니교적 이분법(선/악, 어둠/밝음 등)이 항상 작동되어 이 이항 대립을 고착화시킨다. 그런데 사실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나, 바바의 ‘양면성’은 완전히 고착화된 이항 대립에서 식민지 지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의 동요와 불안정성, 그리고 헤게모니적인 접합에서 나온다.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을 사고할 때, 이 경계의 동요와 공백 지점을 중요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의 작동 메카니즘을 인식하는 것 뿐아니라 바로 여기서 관념적이고 의식의 수준을 넘어선 저항의 계기들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 경계의 동요에 관여하는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은 그 식민지적 지배가! 폭력적인 것만이 아니라 더 비가시화되고, 상징적이게되고, 문화적이게 되는 현재의 ‘후기식민지적’ 상황(이를 다문화주의 시대, 혹은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시대로 정의할수도있겠다)에서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성질을 드러내게 된다. 예컨대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은 계급, 성, 종족, 인종, 성차라는 심급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층결정되어 있다. 식민지 주체의 청체성을 대립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차이와 모순의 관계를 함께 사고하는 인식적인 지도그리기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