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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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보내고

                                 - 이 성 부



너를 보내고

또 나를 보낸다.

찬바람이 불어

네 거리 모서리로

네 옷자락 사라진 뒤

돌아서서 잠시 쳐다보는 하늘

내가 나를 비쳐보는 겨울 하늘

나도 사라져간다.

이제부터는 나의 내가 아니다.

너를 보내고

어거지로 숨쉬는 세상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나를 맡기고

어디 먼 나라 울음 속으로

나를 보낸다.

너는 이제 보이지 않고

나도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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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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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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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 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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