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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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김용택 아저씨의 시. 우리 교실 앞 게시판에 코팅해서 붙여주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당신께 드립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서...쓸데없이 늘 이렇게 '고백'을 하고 싶은데 녀석들은 몰라준다. 즈들 바라보며 내가 하는 인사, 넋두리, 고백들... 내 마음을 전하는 것, 부질없다 생각하면서도 늘 그러고 싶다. 녀석들로부터 어떤 비판을 되돌려받더라도 모의고사와 야자와 보충 등등에 대한 내 마음, 생각을 맘껏 얘기하고 싶은데, 스스로의 검열이 더 지독하고 무섭다. 그저 이 시를 읽어주듯이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두/렵/다. 나는 겁이 많다. 그리고 욕심도 많다. 잃고 싶지 않아서... 바보처럼.. 복잡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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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보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ㅇㅆ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혔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기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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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 세 개  -홍세화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의 할아버지께선 나에게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대부분 잊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신께서 중국의 노신을 읽으시고 좀 바꾸어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며 우리 옛이야기에 실제로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얘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옛날에 서당 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 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터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 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도 글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 하니 서당 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 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세 개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커가면서 세 개째의 개똥은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이 할아버님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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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문제는 아니지만 그냥 그 개똥, 남에게 먹이느니 내가 먹을까? 생각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남에게 개똥 먹이는 일도 장난 아니게 힘들기 때문. 그렇지만 대부분 내가 먹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소심한 나는 아주, 아주~ 조심그럽게 상대방 앞에 슬쩍 밀어놓는다.

개똥 먹는 것 만큼이나 힘든 건 내 말에 책임지는 것! 같이 개똥 먹일 인간 되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도 나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아닌 건 아니라고 눈 딱감고 말하려하는데 사람들은 그저 눈 딱 감고 아무 말도 말아달라고 한다.
침묵은 묵시적인 동의!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실천하지 않는 앎은 앎이 아니다.

그러나 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과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일은
힘/들/다/
 

 “한 소방관의 죽음” - 소방의 날 (11월 9일)

- 김훈 『김훈 世說-‘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21쪽.~24쪽.


 

  지난 5월 25일 새벽 시께 전남 여수시 교동 400번지 중앙시장 화재현장에서 2층 점포내부의 인명을 수색하던 여수소방서 연등파출소 소속 인명구조대원 서형진 소방사가 화염과 유독가스 속에서 퇴로를 찾지 못한 채 쓰러져 숨졌다.

 

  숨진 서형진 소방사는 선착대로 현장에 도착해서 곧바로 3층으로 투입되었다. 서 소방사는 3층 유리창의 방범용 쇠창살을 도끼로 찍어내고 창틀에 매달려 아우성치던 16명을 굴절사다리 바스켓에 묶어서 지상으로 대피시켰다. 서 소방사는 이어 3층 내부의 인면수색을 마치고 다시 2층 내부로 진입했다. 이때 3층은 연쇄인화 직전의 매연으로 가득 차 있었고, 2층은 극성기의 화염이 살수공격으로 수그러들면서 열기와 유독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보증금 1천 8백만 원짜리 전세아파트에 26세의 젊은 아내 박미애 씨와 지난 2월에 태어난 젖먹이 아들, 그리고 노부모를 섬겼다.

 

  지난 5월 20일, 그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월급을 받았다. 그가 숨진 5월 25일, 그의 아내는 남편이 벌어온 월급 중에서 6만 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소복을 한 젊은 아내는 돈에 관하여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늘 잠이 모자라서 꾸벅거리던 남편의 고달픔과 그리고현장 2층의 암흑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남편이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뜨거움을 되뇌면서 쓰러져 울었다. 그 여자는 “아, 그 뜨거운 곳에서……”라며 울었다. 아무도 그 여자의 울음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여자를 달랠 수 없었다.

 

  이날 화재는 24일 밤 11시 21분께 여수소방서 상황실에 전화로 신고되었다. ‘중앙시장’이라는 신고에, 상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본서 상황실 당직관 유호일 소방경은 현자오가 최근거리에 있는 연등파출소에 초동출동을 명령했다. 이날 밤 여수시 동북부 지역 당직 상황실장은 낙포파출소장 이규준 소방위였다.

 

  이규준 소방위는 연등파출소의 차량 6대(지휘차, 구조대 펌프차, 앰뷸런스, 사다리차, 화학차)와 대원 20여 명을 인솔하고 11시 24분께 현장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이날 진압전투의 선착대였다. 선착대가 도착했을 때, 2층 유리창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화염과 연기가 3층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2층 유리창들은 모두 다 방범용 쇠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3층 유리창도 대부분이 마찬가지였고, 몇 군데 유리창에는 쇠창살이 없었다.

 

  쇠창살에 갇힌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쇠창살이 없는 창문에서는 매연에 쫓긴 사람들이 곧 뛰어내일 기세였다. “뛰어내리지 마라. 바람 쪽으로 머리를 낮추고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이규준 소방위는 핸드마이크로 3층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뛰어내릴지 말지는 소방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회염 속에 갇힌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었다. 선착대는 쇠창살 없는 유리창 밑 인도 위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4명이 뛰어내렸다. 부상자는 없었다.

 

  이규준 소방위는 구조대원에게 3층 옥내 진입을 명령했다. 홍갑석 소방교, 김종수 소방사 그리고 숨진 서형진 소방사가 굴절사다리를 타고 3층 창문으로 접근했다. 바스켓을 창틀에 밀착시키고 도끼로 방범 쇠창살을 부수었다. 굴절사다리는 세 번을 오르내리면서 16명을 지상에 내려놓았다. 부상자는 없었다. 구조대원들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3층 유리창을 통해 3층 옥내로 들어가서 30여 개 점포와 볼링장과 극장을 수색했다. 인명이 없음을 확인한 구조대원들은 3층 옥외계단으로 철수했다.

그때 거리에 모여서 발을 구르던 주민들이 “2층에서 바느질하는 할머니가 못 나온 것 같다.”고 고함쳤다. 서형진 소방사는 옥외계단을 따라서 2층으로 내려와 2층의 방화용 철문을 도끼로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형진 소방사는 거기서부터 27미터를 전진한 자리에서 죽었고, 2층에 그가 구하려던 할머니는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부재가 확인되지 않는 한, 그는 2층 불길 속에서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옥외에서 쏘아대는 물줄기가 화점에 닿지 못하자 정오채 서장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통로 돌파를 명령했다. 중앙통로는 방범 쇠창살과 철제 셔터로 막혀져 있었다. 전동장치로 개폐되는 문이었는데, 이미 옥내 전원은 끊어져 있었다. 철제 셔터는 열을 받아서 뜨거웠다. 대원들은 물을 뿌려 철문을 식혀가면서 도끼와 유압절단기로 철제 셔터 아래쪽에 구멍을 뚫어내다. 이 작업에 약 12분이 걸렸다.

 

  이 구멍을 통해서 수관 4개가 2층 옥내로 들어왔다. 수관 1개마다 4명씩의 관창수가 붙어 있었다. 관창수들은 2층 화점을 공격하면서 1층과 3층으로의 연쇄인화를 차단했다. 새벽 1시 30분께 화재는 진압되었고 서형진 소방사는 동료들의 들것에 실려 지휘관 앞으로 운구됐다. “장비를 벗겨주어라”라고 정 서장은 말했다. 대원들이 서형진 소방사의 무장을 해제했다. 공기호흡기, 도끼, 망치, 손전등, 안전모, 개인 로프를 떼어주고 방열복을 벗겨주었다. 그는 그렇게 한평생의 멍에를 벗었다.

 

  28일의 영결식에서 그는 소방교로 추서되어 국립묘지로 갔다. 그가 세상에 남긴 젓먹이 아들의 이름은 서정환이다. 그의 장례식 다음날이 정환이의 백일이었다. 화재피해를 입지 않은 1층과 3층은 다음날부터 정상영업을 계속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는 온통 장관부인들의 고급 옷에 관한 것뿐이었다.


* 서형진 씨는 1999년 5월 25일 중앙시장 화재 현장에서 16명의 생명을 구하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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