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김동성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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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그 날'이다.

가끔은 '샘~'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부담스러운 나는 스스로 '스승'이라는 호칭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런 격이 높은 호칭을 선망해본 적도 당근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스승의 날'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화려한 옷처럼 늘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솔직히 이런 날, 없었으면 좋겠다.

과정이야 어쨌든... 어쨌든 내일 학교에 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영부영, 서먹서먹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야 하나? 뭣이든 대비해야 하나? 하루 종일 주저주저했다. 내일... 어떻게 하지? 이미 지난 주에 '무엇이든 다 돌려보낼 것'이며, '직접 쓴 편지 한 통 받고 싶'고, '초코파이 하나 정도는 허용하겠다'고 했지만... 암튼 아침에 간단한 식을 마치면 싫든 좋든 첫 시간은 담임에게 주어질 것인데 이 시간, 무얼 하나? 예년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들 잔치에 분위기 맞춰주느라 어색한 웃음 짓기는 싫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어떨까? 아주 아주 솔직한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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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맘먹었지.

그날 아침 가지고 교실에 들어가긴 했는데..용기가 없어 그냥 나와버렸다나 뭐라나...

샘은 이렇게 편지 쓸 때마다 너희에게 조금 부끄럽단다.

나 안볼 때 살짝 살짝 읽어줘~


 

나는 어떻게 교사가 되었나?


이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지는데... 고등학교 시절, 나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공부를 특별히 잘 하지도 못 했고, 뭐 개성이 강한 아이도 아니었고, 매사에 불만은 많지만 잘 표현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범생' 스타일의 학생, 그게 나였다. 당근, 샘들 눈에 잘 드러나지 않았고, 그래서 1년이 다 되도록 담임샘께도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리지 않는 그런 아이. (가만있자...우리 반의 누구랑 비슷할까? ^^; 이름은 다 불러준 것 같은데... 가끔 깜박깜박하지만... 앞으론 별명을 불러주마!!)

 

그 시절 어른들, 특히 학교 샘들 대부분은 말씀하시길....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은 대학 간 후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그랬지. 영화를 보고 싶어도 중간고사 친 뒤에,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싶어도 기말고사 뒤에... 모의고사 뒤에, 월례고사 뒤에, 주초고사 뒤에... (그 시절, 아마 우리는 시험 보는 기계였나보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은 대학교 무사히 입학한 뒤에 하라는... 그 말이 '진실'은 아니더라도 부분적인 '사실'쯤은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 오늘 하고 싶은 일을 끊임없이 내일로 미루며, 샘들에게 찍히지 않을 만큼 교칙이랄까 뭐 그런 걸 지키면서 꾸~욱 참고 3년을 살았으니.


가끔 친구들에게 미묘한 감정(헐~ 그런 미묘함 말고... ^^;)을 느낄 때도 있었는데 뭐랄까..  미안하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면서 또 가끔은 시기 질투도 생기고 짜증도 나고...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의 소중한 친구들도 결국은 '나의 경쟁자'가 될 거라는 '쇄뇌'에서 오는, 일종의 강박증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시험이 있을 때마다 전교 100등까지 추려서 학교게시판에 붙이고 또 반 등수도 뽑아서 교실게시판에 붙여두곤 했거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이들 성적이 다 공개되는 거지. 이건 '개인정보 보호'라는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부작용은 그런 분위기 속에 푹 쩔어서 그것이 잘못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 나랑 아주 친한 친구가 이번 시험에서 나보다 성적이 잘 나오면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마음이 들킬까봐 걱정되고 결국 친구에게 미안하고... 자책하게 되고... 어쩌면 내 마음과 비슷할 친구도,  나 자신도 결국 믿을 수 없게 되고... 친구를 믿을 수 없는 마음, 내 제일 가까운 친구를 경쟁상대로 봐야하는 괴로움. 그 죄의식... 그때는 그 불안의 정체가 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그래서 힘들고 괴로웠어. 물론 반 아이들을 '인간성'으로가 아니라 '성적순'으로 나누어 보는 습관도 알게 모르게 내 몸에 배여버렸을거야.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대학이랑 과를 결정해야 할 때, 내가 '가고 싶은' 대학, 과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대학, 과를 선택하게 되더라. 사실 나는 '중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고3 때 담임샘이 안 된다고, 그러면서 한문과가 새로 생겼는데 처음 생긴 과는 점수도 낮고 안전하다고 설득하시더라구. 마지막 시간까지 기다려 경쟁률을 보고 원서를 넣었지. 지난 번에 얘기했제? 그러다가 9시 뉴스에도 나왔다고. 눈치 지원에 막판 경쟁률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말야..ㅋㅋ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애들아, 그렇게 남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며 대학에 들어갔는데 학교 샘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다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더라. 저절로 생각이 깊어지지도 않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도 않고.. 왜냐?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고 '책임'지고...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거든. 그 누구도 '너 스스로 뭔가 해보렴'하는 말을 내게 해 준적이 없었거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도대체 뭘 좋아하는지, 뭘 잘 하는지, 왜 사는지, 무엇이 인생인지..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들을 고민하는 방법과 답을 찾는 방법...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더라. 다만 '대학만 가면' 저절로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들 했지. 허무하더라구. 누구는 열심히 연애하고 누구는 열심히 공부하고, 또 누구는 1,2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데.. 나는 그 좋다는 대학 들어가서는 그만 더 살고 싶지 않더라. 이런게 인생이라면 지금 죽으나 그럭저럭 꾸역꾸역 살다가 나중에 죽으나 뭐가 다를까 싶더라. 한창 나이에 벌써 삶이 시들해진 거지.


그러니 내가 연애를 잘 했겠냐, 공부를 했겠냐, 하다못해 취직준비를 했겠냐. 4학년 졸업하고 나서 바로 백수가 되었지. 몇 개월 집에서 노는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너무 갑갑하다,. 떠나고 싶다. 이렇게 살다가는 대충 아무하고나 도피하듯 결혼해서 남편한테 목매고, 아이 낳으면 또 거기에 목매고, 내가 못한 것 아이에게 강요하고... 그러다가 죽나?' 하는 생각. 일단 부산을 벗어나려고 맘 먹었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교육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거였어. '자격증을 따서 교사가 되자' 생각했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담임샘이 국어샘이셨는데 내가 그 분을 좋아했거든, 그때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얼핏 했고. 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그게 유일한 것이었고...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지. 시험날짜까지 3개월 정도 남았을 때였기 때문에 물불 가릴 여유가 없었어. 밥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죙일 공부만 했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거든. '하고 싶은' 일이었거든. 그러니까 그 지겨운 공부하는 것이 저절로 되더라구!! 신기하지?


그렇게 대학원에 합격하고 소위 말하는 '상경'이란걸 했다. '서울', 내게는 사실 그렇게 환상적인 곳은 아니야. 2년 반은 교사 자격증 따느라, 또 2년 반은 임용시험 준비하느라 모두 5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아르바이트 해서 생활비랑 학원비 벌어 가면서. 물론 부모님 등골도 어지간히 뺐지. 지금도 그렇지만 임용 시험이 쉽지가 않거든. 게다가 내가 시험 치기 시작하던 그 해부터 서술형, 논술형 등등의 문제로 바뀌면서 더 어려워지데. 그래서 두 번이나 떨어졌잖아. 세 번째 험 칠 때, 그때는 정말 힘이 들었는데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은 다 붙고 나만 남아서.. ㅜㅜ 체력도 딸리고 병도 나고...ㅠㅠ 감기가 낫질 않더니 기침을 하면 피까지 올라오는 거 있지? 폐병 걸려 죽는 줄 알았잖아. ㅋㅋ 그때 내가 버틴 힘은 무엇이었을까. '교사가 되어야지' 이 생각 하나였던 것 같아.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아이들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이러저러한 선생님이 되어야지 다짐하고... 그랬어. 우습지? '이 외로운 서울에서 5년을 버텼는데',  '지금 그만두면 아무 것도 아닌데', '부모님 얼굴은 또 어찌보며'...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하루 하루 살았지.


 

나는 왜 교사가 되었나?


내가 뭔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교사'뿐이었거든. 정보가 없었던 거지. 내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왠지 그럴 듯해 보이는 직업은 교사가 유일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샘의 영향이 컸고. 그리고 현실을, 부산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뭔가 목표가 있어야했는데 그 당시 내가 하고싶은 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사자격증'을 따는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한심하지? 한마디로 나는 그렇게 무식했다. 샘이 게시판에 '직업소개란'을 갈아붙이는 이유, 알겠지? 내 적성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직업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거든.


 

나는 어떤 교사가 되려하나? -그래서 소망하는 것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범대나 교대 입학해서 임용시험에 바로 붙으면 4년이 걸리지. 나는? 딱 10년 걸렸어. 이러저러하게 많이도 돌아온 거지. 고등학교 다닐 때, 바로 목표를 잡아서 남들처럼 시간을 단축했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냐. 그렇지만 내가 방황하고 고생하며 보낸 그 시간들... 후회하진 않는단다. 성공한 경험만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진 않더라. 뭐 늘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실패의 경험'이 아주 소중할 때도 많단다. 특히 '사람'을 대하는 직업은 더 그런 것 같아. 남의 아픔을, 실패한 경험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내 실패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거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주 힘들게 원하는 걸 얻었기 때문에 지금 이 일이 단순히 내게 돈을 버는 수단만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사실 무슨 직업이든지간에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일하는 기계, 돈버는 기계밖엔 안 되겠지.


그래서 샘은 말이다, 공부도 중요하고 성적도 중요하고 대학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너희들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어. 우리는 매일 학교에 와야하고 이러저러한 교칙을 따라야하고... 그래서 한계와 제약도 많겠지만 그런 속에서도 지금의 상황을 끊임없이 '회의'하고 남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심을 품고... 힘있고 강한 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힘없는 사람의 눈높이에도 맞추어 볼줄 아는 그런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런 모습의 너희들을 곁에서 도와주고 싶어. 진심으로. 그런데 요즘 늘 샘이 하는 짓이란 지각 잔소리, 청소잔소리, 보충야자 조퇴 잔소리... 미안~

 

너희들.... 나처럼 바보같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늘 현재를 희생하고 저당잡혀야하는. 지금 하고 싶은 일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엔 별로 하고싶지 않게 되거나 영원히 못하게 될 지도 몰라. 18세 황금같은 너희들의 나이, 인생에 두 번 다시 안 온단다. 그리고 학교에서 '즐겁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것, 너희들과 함께 그렇게 노력하는 것, 그것이 샘이 소망하는 일이야.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


우선, 성적이나 외모나, 또 가정형편이나... 그밖의 무엇으로도 너희들의 소중함을 저울질 할 수 없음을, 너희들 한 명 한 명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을 것. 다시 말해 내 밖에 있는 물리적인 조건들로 내 자신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지 말 것.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부분'이 꼭 있단다. 그걸 찾아내는 사람과 내가 아닌 걸 나로 착각하고 평생 살아가는 차이가 있을 뿐. 그건 성적이나, 등수, 돈, 지위의 높고 낮음 따위와는 상관없는 것이겠지? 그러니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고 또 스스로 얽매이게 되는 그런 숫자놀음에서 자유로와지도록 노력하기. 그럴려면 끝까지 '나는 좋은 사람임을 믿/을/것!!'


내가 소중한 존재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소중하다는 것, 이것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내 의견이 중요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할 줄 알아야하고, 내 권리를 주장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자세가 필요하겠지?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곳에서는 권리뿐만 아니라 내게 부여된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도 필요하군. 물론 의무를 부여받는 과정에 내가 합의했다면 말야.

 

그러니 당연 나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초래하는 나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닐거라는 것이지. 내 바로 옆에 아파서 엉엉 우는 사람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고, 또는 나에게 신나는 일 있다고 혼자 깔깔 웃지는 못하잖아? 어른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도 너희들은 그렇지 않잖아! 너희들이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어린 왕자'였으면 좋겠다.


백범 김구 할아버지 알지?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더라. "어떤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것이 현실이냐, 비현실이냐를 따지기보다는 먼저 그 일이 바른 길이냐 어긋난 길이냐를 따져서 결정하라" 내 생각과 행동의 판단 기준은 그것이 나에게 '편하냐? 불편하냐?' 혹은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가 아니라, '옳으냐? 그르냐?' 또는 '나만을 위한 일이냐?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한 일이냐?'가 되어야한다는 뜻이겠지?


이러한 말들이 희망사항일 뿐이고 하나의  이상이라고 비판하기 쉽지만, 희망과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하는 걸까? 현실에 끊임없이 나를 맞추어나가면서 그렇게 나를 잃어가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안주하기 위해서? 그래봤자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을텐데?

 

스승의 날, 편지를 마치며...

사실 지금은 스승의 날이 훨씬 지난 19일 금요일 태풍 짠쯔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아침이란다. 운동화랑 치마랑 책가방도 많이 젖었겠지? 정말 오늘 같은 날은 너희들이 학교로 무사히 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또 하루쯤 학교 농땡이 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단다. 늘 이쁘고 고맙고 그런데도 가끔은 일부러 억지로 오버해서 너희들을 야단치기도 하는 샘 마음을 알아주길...

 

학교 오는 차 안에서 '비오는 거리'라는 노래를 들으며 너희들이랑 이런 노래를 들으며 따라부르며...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또 오늘 같은 날 따뜻한 찐빵을 살 수 있다면 아이들이랑 같이 하나씩 나눠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도...(그런데 구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ㅎㅎ)

 

스승의 날, 너희들이 써준 편지... 고맙다. (특히 집에서 편지 써온 은주랑 지화! 샘, 감동 먹었다. 진짜 써올 줄 몰랐거든 ^^)비록 내 강압에 못이겨 억지로 쓴 것이지만. 담번에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편지 써줄래? 답장 꼭 쓸께!

 

2006. 5. 19. 금요일.

비는 오지만 마음은 늘 맑은 너희들에게 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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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5-1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놓고 보니... 너무 길고, 너무 거창하고, 너무...
흠... 밀어부쳐? 말아? 고민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진지함, 내지는 지루함... 이 되겠는데...

해콩 2006-05-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라이~~ 1교시 담임시간에 편지 인쇄해서 가지고 갔는데... 이것 저것 딴 짓만 하고..눈치만 보다가 그냥 나왔다. 이런이런..
아차차차~ 아이들에게 이번 달 안에 나랑 같이 둘이서 사진찍자는 협박도 안했다. 종례시간에 꼭 해야지.

비자림 2006-05-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선생님!! 해콩님 사랑을 받고 크는 아이들 무럭무럭 잘 크겠네요.

해콩 2006-05-1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우리 반 아이들은 동의하지 않을걸요... 사실이라니깐요.. ㅠㅠ
 

2006년 5월 12일 (금) 12:40   프레시안

청소년 인권, 더 외면할 수 없는 사회의제

[프레시안 성현석/기자]  10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청소년 인권 찾기 선언'이라고 쓰인 종이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시대가 계속 변해 왔지만, 학교는 여전히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자 가면을 쓰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앳된 기운이 섞였다. 이들은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다. 가면을 쓰고 마이크를 잡은 청소년들은 '바리캉'으로 상징되는 폭력적인 두발 규제, 교사의 지나친 체벌, 원하지 않아도 받아야하는 보충수업, 종교계 사립학교에서 강요하는 종교수업 등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이날 청소년들은 학교가 자신들을 고유한 개성을 가진 주체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호소했다. 청소년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있지만, 학교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개성이 없는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현재의 학교가 학생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상태로 인권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곳임을 알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 5월 10일 청소년들이 교육부 앞에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이날 행사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등의 청소년 단체와 인권운동사랑방, 문화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5.14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준비위원회'가 주최했다. 오는 14일에 예정된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교육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청소년들로 하여금 직접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인권침해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지난해 두발규제 반대 촛불집회 이후 1년
  
  지난해 5월 14일 학교의 강제적인 두발규제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촛불시위가 광화문에서 열렸다. 이같은 청소년들의 집단 움직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7월 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두발 자유는 학생의 기본권이므로 각 학교에서 '강제 이발'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두발 제한이나 단속은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이뤄지도록 대책을 마련하라"라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각 시도 교육청은 강제적인 두발 단속을 하지 않도록 하는 지침을 각급 학교에 보냈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책적인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일 년이 지났다. 청소년 인권을 고민하는 이들은 지난해 열린 촛불시위로부터 정확히 일 년이 되는 올해 5월 14일에 '청소년 인권행동의 날' 집회를 열기로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청소년 인권의 실태를 되돌아보는 한편, 청소년 인권에 대한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청소년들이 가면을 쓰고 이야기한 주제는 강제적인 두발 규정부터 체벌과 종교수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는 청소년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다양한 지를 잘 보여준다. 14일에 예정된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두발 규제의 철폐에만 초점을 맞췄던 지난해와 달리 학교 안팎에서 청소년들이 겪는 인권침해 전반에 대해 문제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지난해 7월 인권위가 내놓은 강제적인 두발 단속에 대한 권고안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 지적했다.
  
  "지난해 인권위의 권고안은 사실 절충안에 불과하다.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할지는 오직 청소년 개인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다.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의 단속을 허용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유윤종 씨의 말이다. 유 씨는 14일 행사에서 청소년들의 두발 기본권에 대해 보다 원칙적인 입장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문제제기 잇따라
  
  청소년 인권을 전면에 내건 이들의 움직임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최근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인권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움직임이 연이어 나타났다.
  
  지난 8일 아침 서울의 동성고등학교 앞에서 이 학교 3학년 오병헌 군이 '빼앗긴 인권을 돌려주십시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벌였다. 오 군은 이 학교 교사들이 제지할 때까지 시위를 진행하면서, 교사들의 과도한 체벌과 강제 보충수업 실시 등이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5월 8일 서울 동성고등학교 3학년 오병헌 학생이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며, 일인 시위를 진행했다. ⓒ프레시안

  "고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모금하는 성금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품었던 적이 있다. 학교 게시판을 통해 이에 대해 질문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학교 운영의 민주화와 학생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막상 학생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고 보니, 학교가 학생 인권의 불모지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뒤로는 학교의 수많은 반인권적 관행들이 견디기 힘들어졌다. 결국 누군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8일 저녁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오 군이 한 말이다.
  
  학교의 두발 규제에 대해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사례도 있다. 지난 4월 19일 서울 양동중학교에서 이 학교 3학년 학생 50여 명이 두발자유와 체벌금지를 요구하는 학내시위를 벌였다. 불과 십여 분만에 끝난 이날 시위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뻔 했지만,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 중 하나가 청소년인권단체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2004년 강의석 사건, 학생인권에 대한 관심 촉발의 계기
  
  2004년 서울 대광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의석 씨가 학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재학 중인 비기독교인 학생의 예배 선택권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강 씨는 종교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학교 역시 학생에게 이같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 인권 혹은 청소년 인권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제적되면서까지 굽히지 않은 강 씨의 주장을 법원이 인정하면서, 학생 인권은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강 씨는 그해 연말 한 시사주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8일 동성고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한 오병헌 군도 2년 전 강의석 씨가 진행한 투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강 씨의 영향을 받은 게 단지 오 군만은 아닐 것이다.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인에게 보장된 기본권을 유예해도 된다는 생각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올해 서울 구로고등학교를 졸업한 전누리 씨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동성고 앞에서의 일인 시위나, 4월 19일 양동중학교 학생들의 시위 등은 학생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태도에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다.
  
  지난해 '학생 두발 자유' 완전허용한 대만, 이제 한국은?
  
  그리고 이것은 한국만 겪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과 교육 환경이 유사한 대만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지난해 8월 31일 대만 정부는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완전한 두발 자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2000년 민진당 정부가 출범한 이후 대만에서는 과거 국민당 정부 시절의 권위주의적 관행에 대한 청산 작업이 진행돼 왔다. 그런데 이런 과거사 청산 움직임이 청소년들의 권리의식을 자극했다. 두발 자유화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집회가 연이어 벌어졌고, 결국 대만 정부는 청소년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민진당 정부 출범 이후의 대만 사회와 참여정부 출범 이후의 한국은 닮은 점이 많다. 대만과 한국 모두 권위주의가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사춘기를 보낸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조금씩 민감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월 7일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학생인권법을 발의하자 최 의원의 미니홈피에는 이에 호응하는 청소년들의 게시물이 쇄도했다. 최 의원이 발의한 학생인권법은 두발 규제를 비롯한 각종 학생 생활 규정상의 인권침해 요소 철폐, 과도한 체벌 금지, 학생에 대한 각종 차별 금지,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보장, 강제로 실시하는 보충수업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한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호응에서 청소년 인권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돼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오는 14일에 예정된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집회에서 청소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성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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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5-15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인권법은 두발 규제를 비롯한 각종 학생 생활 규정상의 인권침해 요소 철폐,
과도한 체벌 금지,
학생에 대한 각종 차별 금지,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보장,
강제로 실시하는 보충수업 금지...
학생은 인간이 아니지. 이런 것도 못 누리는 게 인간일까?

해콩 2006-05-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 빠진 것 있네요. '야간 자율 학습' 진짜로 자율적으로 실시!ㅋㅋ
인간 아닌 아이들, 인간 만드는 게 우리들의 '일' 맞지요?
그런데 실은...인간 되지 마라, 아직은 인간 될 생각하지 마라. 대학 가면 저절로 인간된다... 하고 있으니.. 슬/퍼/요...

글샘 2006-05-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알거든요. 공부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닌줄... 공부 그렇게 못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걸... 괜스레 스승의 날이랍시고 찾아온 애들에게 열변을 토했더랬죠.ㅋ

해콩 2006-05-31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 동성고 1인 시위 학생 지원
지난 5월 8일 사랑방과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3학년 오병헌 학생이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학생은 0교시 강제보충 폐지, 체벌 금지, 두발규정 폐지 등을 요구하였는데요,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동성고등학교에서는 느리지만 많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일단 0교시 수업은 9교시로 옮겨졌고, 6:55이었던 새벽별 등교시간도 1시간 정도 늦춰졌습니다. 체벌을 일삼았던 담임교사는 교체되었고, 두발규정과 관련해서는 학생 설문조사 등을 거쳐 개정 절차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오병헌 학생은 시위 전 사랑방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는데, 사랑방 교육실에서는 학교와 교육청에 대응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이 학생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동성고등학교의 사례가 다른 학교의 변화에도 자극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 인권운동사랑방 정기 소식메일 [사람사랑] 2006년 5월 137호
 
 전출처 : 라주미힌 > 영원히 돌이킬 수 없으리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 평택=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그날 저녁, 대추리 주민 엄팔복(70)씨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초등학교 정문을 쇠사슬로 칭칭 걸어잠갔다. 그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50년 전 이곳 대추리로 이사왔다. 노인은 “이래 봬도 젊은 놈들 서너 명은 끄떡없다”고 말했지만, 눈은 불안으로 충혈돼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부친과 고생해 땅을 많이 사 모았지만, 1970년대 평택을 휘몰아친 대규모 토지 분쟁인 ‘동백흥농계’ 사건에 휘말려 가진 것을 모두 잃었다. 그는 “정말 내일 군대가 오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최후통첩, 15시간의 고민

5월3일, 저녁 어스름을 타고 전국의 노동자·농민·학생·평화 활동가들이 대추초등학교로 몰려들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1천여 명의 시민들은 이날 밤 10시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평화의 땅 사수 결의대회’에 참가해 “야만적인 행정대집행을 멈추라”고 외쳤다.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이 “노무현 당신! 누구 덕에 대통령이 됐는지 생각해보라”고 외쳤고, 방송 3사 기자들이 그 장면을 배경 삼아 뉴스를 내보내기 위해 초등학교 앞에서 자리 다툼을 벌였다. 학교 앞에 모인 학생들은 <농민가> <반전반핵가>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을 부르며 밤을 새웠다.


△ 5월4일 대추초등학교는 지옥이었다. 그들은 총만 안 들었을 뿐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특공부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초등학교를 찾은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려졌다(사진: <시민의 신문> 양계탁 기자).

김택균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우리도 싸우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침탈이 시작되기 6일 전에 주민 대책위 쪽에 대화 제의를 해왔다. 국방부는 주민들과 두 번의 만남 끝에 “농사를 중지하고, 국방부의 기지 건설사업에 협조하지 않으면 대화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해왔다. 그들의 최후 통첩 날짜는 5월1일 저녁 9시였고, “회신을 해달라”는 날짜는 다음날 낮 12시였다. 그 15시간 동안 주민들의 머릿속을 오갔을 비참함을 기자는 헤아리지 못한다. 주민들은 “국방부와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대추리 노인들은 이날 오후 1시 대추리 노인회관 2층에서 주민 총회를 열었다. 주민 65명이 종이를 찢어 무기명 투표를 벌였다. “끝까지 싸우자”는 주민이 54명, “싸우지 말자”는 주민이 9명, 무효표가 2표였다.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난 오후 4시 문정현 신부는 초등학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어코 올 날이 왔다”며 “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는 “5월4일 새벽에 국방부와 경찰의 침탈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경찰의 애초 작전 개시 시간은 ‘새벽 4시30분’이었다. 경찰은 안전 사고를 걱정해 일정을 늦췄다. 경찰은 새벽 5시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날 ‘작전’을 위해 경찰 110개 중대 1만1500명, 수도군단·700특공연대 2개 연대 2800여 명, 용역업체 직원 600명을 동원했다. 작전명은 ‘여명의 황새울’이었다.


△ 젊은 학생들은 대추초등학교 2층 교실에 누워 “한반도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기지 확장을 백지화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경찰에 끌려 하나씩 경찰서로 연행돼갔다.(사진/한겨레 김경호 기자)

첫 충돌은 대추초등학교 정문 앞에 뚫린 미군부대 쪽문에서 시작됐다.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학생들은 쪽문 앞에 차를 대놓고 경찰의 침탈을 막았다. 경찰이 방패로 사람들을 찍어누르며 맹렬히 돌진했다.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아침’의 이빨이 깨졌고, 울산에서 올라온 노동자 이상수(36)씨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최철호(31)씨는 오른쪽 눈밑, 전남대 강아무개(26)씨는 경찰이 던진 돌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스무 명 넘는 시민들이 다쳤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20년 전과 어쩌면 저렇게 달라진 게 없냐”며 가슴을 쳤다. 마을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때리지 말라”고 외쳤지만, 호소가 폭력을 막을 순 없었다. 경찰은 기자들의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옥의 1층, 학생들이 피 흘리다

시민들을 몰아낸 뒤 경찰은 확성기를 통해 “대추분교를 점거하고 경찰의 출입을 방해하는 것은 엄연한 공무집행 방해”라고 말했다. 그 사이 저 멀리 도두리 벌판에는 국방부가 병력 2800여 명(보병 2천여 명·공병 600여 명·헌병 150여 명·의무병 60여 명 등)과 용역직원 700여 명을 투입해 주민들의 농사를 막기 위한 철조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군대는 보트를 타고 안성천을 건넜고, UH-60 헬기에 철조망을 매달아 전달했다. 시민들을 밀어낸 경찰 1만여 명은 초등학교 주변을 둘러싼 채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랬다.

국방부는 주민들과의 대화에서 “미군기지 이전사업이 한-미 간의 합의 사항이고, 국회 비준 동의를 받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앵무새처럼 되뇌어왔다. 그 말에 토를 달긴 힘들다. 그렇다면 국방부는 미국을 상대로 얼마나 훌륭한 협상을 했을까. 미국은 2002년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서 대추리 땅 24만 평을 달라고 했다가 2003년 4월 “해외주둔미군 재배치계획(GPR)을 추진 중”이라며 기지 제공 면적을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애초 합의안은 312만 평이었다. 이후 미국은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땅 30만 평을 추가로 요구했다. 상식 밖의 행동이었지만 미국의 요구는 관철됐고, 용산 미군기지 이전 비용 모두는 우리 정부가 떠안게 됐다. 언론들은 “협상이 잘못됐다”고 대서특필했지만, 국방부는 말이 없었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5월3일 오후 5시 기자회견을 자청해 “팽성 대책위 주요 핵심간부들의 평균 보상금은 19억2천만원에 이르는 등 사실상 백만장자”라고 말했다.


빵을 다 먹은 경찰들이 곤봉과 방패를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초등학교 사방을 포위하고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침탈은 아침 9시15분에 시작됐다. 학생·노동자·농민들이 대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경찰에 저항했다. 그들의 막대기는 경찰의 곤봉과 방패를 당해내지 못했다. 저항은 쉽게 진압됐다. 경찰은 충돌 5분 만에 시민들의 방어망을 뚫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접수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은 개떼처럼 쫓겨나 초등학교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아비규환이었다. 경찰들은 학생·노동자·평화활동가 600여 명이 몰려 있는 대추초등학교 건물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젊은 학생들이 방패에 머리를 찍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누군가 “여기 학생 손가락이 잘라졌다”고 외쳤다. 그는 경찰의 발길질 세례를 받으며 학교 밖으로 긴급 후송됐다. 경찰은 1층 복도 왼쪽 벽 합판을 방패로 때려 부수고 학교 안으로 난입했다. 안경을 쓴 학생 한 명이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잘못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둘러싸고 경찰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옮겨간 아파트는 관리비만 30만원

경찰은 저항 능력을 잃은 학생들에게 철제 의자를 휘둘렀다. 보다 못한 기자들이 전경을 막아섰다. 경찰들은 기자들을 향해 방패를 휘둘렀다. 국가인권위원회 직원이 전경을 제지하러 다가섰지만, 경찰들은 “지금 나를 협박하냐”며 인권위 직원을 곤봉으로 위협했다. 경찰 간부들은 전경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추초등학교 접수를 위해 전경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장을 취재하던 일본인 모리 기쿠코(29)씨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박성호 <시민의 신문> 기자가 경찰 간부에게 “부상자가 있으니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말했지만, “자기네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물러났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쳐 쓰러졌는지 일일이 세지 못한다. 학생 400여 명이 경찰에 쫓겨 대추초등학교 2층으로 피신했다. 학생들은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김지태 대추리 이장은 “국방부가 자기 나라 국민들을 이렇게 다룰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국민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정부의 공권력 행사를 지켜보는 일은 난감했다. 주민들이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모임을 만든 것은 2003년 7월이었고, 촛불집회가 시작된 것은 2004년 9월1일이다. 국방부가 주민들을 설득하고자 했다면,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3년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군대를 투입해 자국민들을 몰아세웠다. 사태를 이렇게 악화시킨 것은 국방부의 태만이거나, 무능력이거나, 업무 방기거나 그 모두를 합한 것이다. 국방부는 정책 실패의 책임을, 신념을 좇아 초등학교로 몰려든 젊은이들의 육신에 전가했다. 젊은이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난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이날 상황을 지켜봤다. 삶은 그들에게도 고난의 연속이다. 대추리에 살던 ‘이슬이네’ 할머니(65)는 국방부가 준 보상금을 곶감 빼내듯 쓰며 살고 있다. 그는 낡은 집 한 채를 보상받아, 1남 4녀 자식들에게 모두 빼앗겨버렸다. 그는 전세 6500만원을 주고 평택 객사리 우미아파트에 산다. 전세돈 가운데 5천만원은 국방부가 무이자로 융자해준 빚이다. 그는 “전세 자금을 그냥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대추리에서는 내 한몫하면서 편히 사는데, 여기서는 매달 관리비만 30만원이 나오니 어찌 살아요!” 정부는 농사짓는 주민들을 위해 충남 서산 간척지에 땅 150만 평을 준비했지만, 주민들의 호응은 높지 않다. 대추리 이장을 16년 동안 지낸 임정석(64)씨는 “그곳 땅은 척박하고 너무 멀어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직업을 잃은 농부들에게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말했지만, 직업을 얻은 사람은 2명에 불과하다.

토끼몰이가 끝난 뒤 점심시간이 되자 경찰들은 초등학교 곳곳에 마련된 그늘을 찾아 밥을 먹었다. 냉동 밥차가 찾아와 경찰들에게 새미도시락·지리산천년수·오란씨가 담긴 상자를 내왔다. 전경들은 방패를 무릎에 얹어 도시락에 담긴 고추장·김치·시금치·풋고추·미역국·잡채·새우맛살튀김·방울토마토 두 알을 먹었다. 김기옥(37)씨는 노인정에서 하루 종일 쌀을 씻었다. 그는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 없다”며 하루 종일 울며 쌀을 씻었다. 그는 아침에는 김을 싸 주먹밥을 만들었고, 점심 때는 콩나물 비빔밥을 만들어 봉지에 담아 학생들에게 건넸다. 그는 중매 반 연애 반으로 대추리 새마을지도자 신종원씨와 결혼했다. 그는 ‘평화바람’ 활동가들과 솔부엉이 방송국의 아나운서를 맡아 재치 있는 입담을 과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싸우는 게 두려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옆에서 도와줘 힘든 줄 모르고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다. 사복 경찰들이 다가와 김씨가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전경들을 지휘했다.

“오늘 물러서면 내일 미군 땅이 되잖아요”

학생들이 밀려난 초등학교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이 포클레인을 몰아 학교 주변에 있던 콘크리트 이승복상·사자상·은행나무들을 뽑아냈다. 김금순(72) 할머니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억울해서 못 산다. 당신들은 내 맘을 모른다”며 울었다. 학교 소사였던 할머니의 죽은 남편이 뽑힌 나무를 심고 평생 가꿔왔다. 그는 1968년 대추리로 이사와 11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을 살았다. 그의 남편은 객사리 부용초등학교로 임지가 바뀌어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다 사고로 숨을 거뒀다. “한창 저기할 땐 촛불집회하고 와서 아저씨 환갑 때 찍은 사진 보고 나 혼자 그러는겨. 여보 나 좀 데려가. 나 좀 데려가. 혼자 드러누워 있으면 뭐혀. 밤은 길고. 난 사람들 다 나가도 젤 끝까지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세상에 어디 가 못 살아.”


△ 사람들은 경찰의 안면 공격에 주로 얼굴을 많이 다쳤다. 이마와 얼굴이 찢어져 굵은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들의 수를 세기 힘들었다.

오후 1시가 되자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과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이 대추초등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선 문정현 신부 등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최후 농성을 하고 있었다. 2층에 갇힌 학생들은 초코파이와 생수를 나눠마시며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공주교대에서 온 한 학생은 “곤봉 들고 쳐들어오는 전경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내일 이곳은 미군의 땅이 되잖아요.” 학생 대표들은 “오늘 연행되면 절대 묵비권을 행사하자”고 결의했다.

밥을 다 먹은 전경들이 2차 작전에 돌입했다. 경찰은 깨진 초등학교 창문을 통해 물대포를 발사하며 건물 난입을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학생들의 저항은 1분이 못 돼 쉽게 진압됐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하나하나 잡아 끌어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인순(71) 할머니가 경찰들에게 달려들어 “저 애들이 무슨 죄가 있냐”며 울었다. 저 멀리 안성천 쪽으로 노을이 지고, 문정현 신부 등 옥상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은 “잡혀간 시민들을 불구속한다”는 조건으로 오후 6시께 내려왔다. 신부가 건물을 떠나자 포클레인이 달려들어 초등학교 건물을 작살냈다. 범대위는 이날 경찰의 강제 침탈로 524명이 연행되고, 20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고 밝혔다.

싸움은 이것으로 끝났을까. 주민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아직 끝이 아니다”고 말했다. 범대위는 “군사보호시설 구역 지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불복종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주민들은 노인정 옆에 마련된 평화예술공원에서 610일째 계속된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있다. 김지태 대추리 이장은 범대위 홈페이지(www.antigizi.or.kr)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쓰는 편지를 띄워 “이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당신, 이제 치유의 길은 없습니다.


△  그들은 여의도의 3배가 넘는 평택 들판에 29km의 철조망을 세웠다.

더 이상 조롱하지 말고, 그리고 더 이상 고통 주지 말고 더 이상 기지 이전문제 지연되지 않게 모두를 죽이고 당신 뜻을 이루십시오”라고 적었다. 이제 대화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국방부는 주민들에게 6월30일까지 집을 비우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대추초등학교에서 그랬듯,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을 강제로 허물고 주민들을 길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마지막 마을 잔치의 아름다운 모습들

5월3일 대추초등학교에서 열린 마지막 촛불집회에서 주민들은 마지막이 될지 모를 마을 잔치를 열었다. 대추리로 이사온 지킴이들이 모여 만든 ‘대추리 중창단’ 멤버 미희·재연·민진씨는 시민단체 활동가 ‘돕헤드’가 만든 노래 <평화가 무엇이냐>를 불렀다. 노래는 2004년 5월29일 평택 평화축제 때 문정현 신부의 발언 내용을 곡으로 쓴 것이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 두꺼비·맹꽁이·도롱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 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


△ 5월4일 평택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 들어선 군인들은 철조망을 쳐 농민들의 출입을 막았다.

노래를 들으며 시민단체 활동가 차미경 ‘아시아의 친구들’ 대표가 아이를 안고 610일째 촛불 행사를 알리는 펼침막 앞에서 춤을 췄고, 도두2리 이상열 이장이 “한 번 더”를 외쳤다. “평생 죽도록 알만 했다”는 이민강(67) 아저씨가 ‘평화 그 먼 길 가다’라고 쓰인 펼침막에 기대어 졸며 박수를 쳤다. 610일 동안 계속된,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하루가 저물었다.


[들이 운다]마지막으로 학교 한번 본다는데…

이놈들아 우리가 다 돈 내서 지은 겨, 왜 못 들어가게 해?

▣ 황필순(76)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69

포클레인이 대추초등학교를 부수기 시작했을 때 황필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싶다며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경찰은 할머니를 막았고, 방패에 가로막힌 할머니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아냈다.

부수기 전에 들어가서 한 번 보고 나온다는데 왜 못 들어가게 혀. 사람이 그래도 인정이 있으면 내가 잠깐 들어가서 보고 나온다는데 뵈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여? 건물 부수기 전에 내 너무 아까우니께 얼굴이라도, 건물이라도 잠깐 보고 나온다고 했어. 그런데 이 염병할 새끼들이 못 들어가게 하는겨. 그러니 내가 얼마나 분통 터져. 아이고. 너무너무 억울혀. 아이구 이놈들아. 너희 사는 집을 때려부수면 좋겠냐. 이게 무슨 일이여. 청천벽력이지. 너희놈들은 눈물도 없냐. 내가 저 건물을 한 번 쳐다본다는데 왜 못 보게 혀. 왜 못 보게 혀. 왜.


나는 지금 80살이 다 됐어도 이런 꼴은 생전 처음이야. 내 정신으로 6·25사변을 겪었어도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여. 학교 짓는 것도 냈지, 노인정 짓는 것도 냈지. 다 대추리 사람들이 돈 내 가지고 지은 겨. 대추리 사람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디. 그런데 지금 이 지랄을 하니.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우리 시어머니가 맨날 우리 며느리 같은 것도 없다고 그랬는데. 내가 점심도 거르고 일해서 모았는데. 한 끼라도 아껴가며 땅 사려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디. 너무 아까워서 어떡해. 이놈들아. 자식들 파릇파릇 자랄 적에 목숨 자르는 거랑 똑같은 거여. 저 나무에서 가을에 은행이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데. 왜 나무를 저놈들이 죄 자르고 지랄이여. 가슴이 뛰어서 못 살겠어. 경철 할아버지가 옛날 이 학교 소사 볼 적에 나무 다 심은 겨. 얼매나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는디. 저 나무들 다 심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디. 말도 못해. 세상에 대추리가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어.

우리 큰아들은 계성국민학교 다니고 그 밑에 애들은 다 이 학교 다녔어. 우리 작은아들이 2회 졸업생이여. 내가 애들 어떻게 가르쳤는디. 농촌에 살아도 애들 가르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디. 나는 못 배운 한으로. 나는 초등학교도 못 배웠어. 내가 못 배운 한으로 글을 제대로 못 봐서 속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 이제 다 늙었으니께 그만이지만 젊어서는 못 배운 게 얼마나 한이 되고 분통 터지는지 알아. 이 우라질 놈들아. 아이구 하느님도 무심하지. 설마 설마 했지. 내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강제집행을 한대두 저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아이고 분해여. 강도 잡으랬지 누가 사람 잡으랬어. 이놈들아, 야 이놈들아. 우리들은 다 한이 맺혀서 이러는 겨. 이 개 같은 놈들아.

*인터뷰·사진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진재연



국방부와 대추리 주민, 어떻게 생각이 다른가?

#평택기지 확장 문제

국방부=국가 안보와 직결되고 한-미 간 협상이 요구되는 사업 성격상 국가 간 협의 완료 → 국회 비준 동의 → 주민 협의 순으로 진행

주민과 범대위=사전에 주민 동의 없이 국방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법적 절차만 밟고 두세 차례씩 쫓겨난 주민들을 내쫓음

#보상금 및 대체농지 문제

국방부=토지 감정평가 평당 15만~18만원, 서산 간척지 57가구 83만 평 제공, 서산 땅은 옥토

주민(협의·미협의 포함)=대추리 주변 평균 농짓값 시세인 20만원 이상, 3시간 거리인 충남이 아니라 평택 인근 경기도 내에 대토. 서산은 대토 규정상으로도 편법이며 사실상의 자갈밭, 노인들은 농사 포기에 따른 생계대책 마련 필요

#이주단지 문제

국방부=평택 3곳에 올해 말 택지 공급 예정, 국제화 계획지구 내에 택지 공급

주민들(협의·미협의 포함)=국방부와 평택시 다툼으로 부지 매수조차 안 돼, 부지에 따라 입주 연도도 제각각 다르고, 협의매수에 따른 보상비용으로는 이주용지와 주택 건축 비용 자부담 어려워

#반대 주민과 대화 노력

국방부=찬성·반대 주민과 45회 간담회, 150차례 이상 정부 대책 설명

범대위·주민=반대 주민과 공식적 대화는 지난 4월30일 단 1회뿐. 협의매수에 응한 주민과 일부 반대 주민들을 사적으로 만난 것을 대화로 호도하는 등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만 몰두

#영농행위 문제

국방부=법적 절차에 따라 국방부 소유, 일체 행위 불법, 영농행위 허용시 미국 쪽으로부터 기지이전 사업 추진 의지 의심받아

주민·범대위=토지 소유권 이전 불인정, 경작 보상금 수령한 적 없는 만큼 영농행위 정당

#평택 미군기지 종합실시계획(MP)과 미군 배치 정당성 문제

국방부=종합실시계획 6월에서 9월로 늦춰짐. 그러나 9월부터 본격 공사를 위해 이전에 측량과 지반조사 등 준비작업해야. 재배치 정당성 문제 제기는 기지 이전을 연기하려는 속셈이며 평택으로 이전하는 용산 미군기지는 범대위에서도 용산 철수를 주장한 사안으로 북한 견제 의도

범대위=2008년까지 미군 용산기지 평택 이전 물리적으로 불가능, 주한미군 쪽의 지상군 추가

감축 가능성이 제기된 만큼 평택 미군기지 확장 규모의 적정성 논의와 미군 재배치는 북한의 남침 저지가 아니라 미군의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고 한반도 전쟁 위험 높이는 것



“오히려 홀가분하다”

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승리라고 말하는 김지태 이장

▣ 평택=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이튿날인 5월5일. 전국의 시민사회 단체와 학생들 1500명이 철책선을 뚫고 대추리 마을로 몰려들었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지태(44) 이장은 마을에 나가 이들을 반길 수 없었다. 그는 이날 마을 모처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쓰는 편지’를 쓰고 취재진과 만났다.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때는 어디에 있었나.

=그때도 나가지도 못하고 오늘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정부가 어떻게 그렇게 폭력적일 수 있나?

그렇게 하루 만에 강압적으로 해치울 것이라고 예상했나.

=이번은 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민들에게 얘기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농토까지 쑥대밭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농토가 쓸모없게 됐으니, 이제는 농사지으랴 싸우랴 두 일 하느라 바쁘지 않을 것이다.

한나절 만에 무너진 학교 건물을 보고 충격이 컸을 텐데. 주민들의 동요는 없나.

=어제 행정대집행이 끝난 뒤 몇몇 주민을 만났다. 다들 힘이 빠져 있더라. 심리적 공황 상태다. 주민들의 얼굴에는 싸움에 대한 의지보다는 증오감이 읽힌다.

국방부는 충분한 보상금을 주고 이주 지원을 해주겠다는 입장인데.

=우리는 정부 정책 결정 과정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03~2004년 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협상할 때 당사자인 우리가 계속 반대했지만,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부의 행동이 정당했다면 기꺼이 마을을 떠나겠다. 주한미군을 인정한다고 치자. 주한미군은 북한의 위협 때문에 있는 것 아니냐? 그럼 휴전선 근처에 있어야지 왜 이곳으로 오겠다는 건가? 그러나 국방부나 언론은 그런 얘기는 듣지 않고 보상금 이야기만 한다. 우리는 보상금을 바라지 않는다. 보상금을 원했다면, 위장전입 세대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위장전입 세대가 있을 때 쫓아내기까지 했다.

앞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곧 대추리 마을로도 침탈이 들어올 텐데.

=물러설 데가 어디 있나. 마을과 집을 때려부수면 끝나겠지. 역사는 그렇게 정리될 것이다. 대응책은 없다. 당하는 수밖에. 우리가 억울해서 무기를 드는 순간 군인들은 더 큰 무기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 몸뚱이 하나하나가 무기다. 우리는 그렇게 지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승리할 것이다.



부상자 통계, 소가 웃을 일

어처구니 없는 경찰쪽 주장, 범대위는 “시민 200명 부상” 밝혀

5월4일 대추분교 유혈진압의 당사자인 경찰이 내놓은 부상자 통계를 보고 처음 나온 것은 헛웃음이었다. 경기경찰청은 이날 무력 충돌로 경찰에서는 26명이 중상, 111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밝혔고, 시위대에서는 7명이 중상을 입고 86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날 현장 상황을 봤던 사람이면 경찰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게 된다. 온몸을 방어 용구로 중무장하고 방패와 곤봉을 든 1만 명이 넘는 훈련된 전경이, 방어구 없이 대나무 막대기를 손에 든 1천 명의 오합지졸을 상대로 그렇게 많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경기경찰청 경비 파트 간부들은 단체로 시말서를 써야 한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도 5월5일 발표한 자료에서 “시민 쪽에서 200명 가까운 부상자가 났다”며 “경찰이 자의적으로 경찰 부상자만 높게 계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시민 부상자들은 방패와 돌에 의해 머리를 비롯해 얼굴을 다친 사람이 많아 이날 경찰의 진압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대추초등학교 진압 현장을 관찰한 박순희 경찰 인권위원도 기독교방송(CBS) 라디오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이 곤봉에 머리가 터지고, 방패로 찍히는 바람에 코뼈가 내려앉고, 안면 부상을 무척 많이 당했다. 피바다였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쳤다”며 “인권위원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진압이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경찰은 여전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자세다. 경찰은 5월5일치 내부 보고서에서 “일부 언론에 경찰의 과잉 진압이 강조돼 보도됐지만 어린이날 연휴로 (부정적인) 관련 보도가 더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부정적인 보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상 전·의경이 인터넷에 직접 댓글을 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마크 트웨인의 말대로 세상의 3대 거짓말은,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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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대추리의 평화를 궁금해하는 결이에게...

공개되길 원치 않을 수도 있었는데 바람구두 아저씨가 임의로 공개해버려서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합니다. 이미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문 어쩌면 이미 판에 박힌 결론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시선과 달리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그대의 질문이 주는 함의가 크다는 생각을 했고, 그 문제를 우리 모두가 공유해보자는 뜻에서 공개한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길 바랍니다. 일단 망명지를 통해 나름의 고민들이 해결되었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군요. 제가 학교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고, 그런 점에서 참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후반엔 학교에서 현재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안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들키는 것만으로도 학생부실에 끌려가서 한바탕 소란을 벌여야 했습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죠.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뜻을 결집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로 나아가는 일, 그 첫 출발점은 늘 사람들이 모여서 지혜를 모으는 일로부터 시작되니까요.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집회 ․ 결사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고,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유신헌법은 이런 자유를 부정했습니다. 이른바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인 조치를 통해서 거리 혹은 학교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법으로 처벌했던 시대지요.

사실 그대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저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평택 미군 기지를 확장 이전하겠다는 계획은 한반도를 미국의 전쟁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인 데 그러면 왜 우리 군은(군이 제일 먼저 반대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군 기지화 작업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제 나름의 의견을 말해보겠습니다.

국가란 절대적인 존재인가?

그대의 질문은 참으로 올바른 상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적이라는 것은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교육받고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하게 접해온 수준이란 뜻이며, 그보다 좀더 역사적이고, 전문적인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거기엔 몇 가지 전제가 있는데, 우선 군의 목적, 존재 이유에 대해 우리 군의 국방목표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라 합니다. 또한 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라고들 하지요.

군대(military power)가 존재하는 이유에서 보면 알 수 있듯 군대가 다른 폭력집단(예를 들어 산적이나 해적, 용병 등)과 다른 것은 국가에 속해있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먼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할 겁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한반도에 우리 민족이 정착한 선사시대 이래 이 땅에는 수많은 국가 체제들이 만들어졌고, 소멸되었습니다. 고조선으로부터 구한말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즉, 국가란 제도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부족 국가 체제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것이고, 한반도에서 근대국가체제가 시작된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으로 보아도 110여년이 약간 지났을 뿐입니다. 이전까지 존재했던 국가 체제는 민주공화정이 아니었고, 전제 왕정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국가체제에 존재했던 군대는 국민에 충성하는 집단이 아니라 전제군주(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얼마 전 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는 이런 대목들이 비교적 잘 드러난 것 같더군요.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의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와 해적 집단 사이에는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고 도덕적인 차이는 없었습니다. 두 집단은 모두 성공을 위해 내적 조화와 조직에 의존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취하고 파괴하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성공여부를 평가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안식처를 ‘인간의 도시’나 ‘땅 위의 도시’(즉, 국가)에서 찾지 말고 신의 도시, 즉 우주적이고 초월적 가치의 국가에서 찾으라고 조언(신국론[神國論, De civitate Dei])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덧붙여 “그러나 당분간 우리는 양쪽의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과 역사에서 국가와 전쟁, 그리고 부당함의 회색빛 그늘 속에서 순수성을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신의 도시를 알기는 하되 ‘때’가 되기 전에 마치 우리가 완전히 그 도시의 시민인양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국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국가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흔히 국가이성(國家理性, reason of state)이란 말로 설명하곤 합니다. 국가는 국가의 생존 강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국가권력이 법이나 도덕·종교보다도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고, 국가는 이와 같은 권력을 유지하는데 국가이성은 이런 권력을 추구하는 것에 있어 높은 목적 합리성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또한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국가 자체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말이 조금 어려울 겁니다.

조금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SF영화에 간혹 등장하는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지닌 슈퍼컴퓨터가 있습니다. 대개 그런 컴퓨터는 마치 로봇처럼 나름의 규칙 - Three Laws of Robotics,  1.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되고, 게으름을 피워 인간이 해를 입도록 해서도 안 된다. 2.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이 첫 번째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로봇은 첫 번째 법칙과 두 번째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간혹 슈퍼컴퓨터가 작동 오류를 일으키거나 너무 위험해서 사람들이 컴퓨터의 작동을 중지시키려고 하는데 이런 행동을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판단해서 도리어 인간을 공격하는 겁니다. 국가의 목적 합리적 행위란 것은 국가의 생존강화를 목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경우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궁극적, 또는 최선의 목적을 수정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 합리적 행위, 목적 합리성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순수에 몰입하게 되는 위험에 제동을 거는 현실적인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이런 목적 합리성이 타락하게 되면, 애초에 국가가 만들어진 그 목적 자체보다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 도구, 기술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기술합리성 또는 도구적 합리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흔한 사례로 나치 독일 치하에서의 경찰이나 군대, 법률 등(알튀세르 같은 이는 이를 ‘억압적 국가장치 RSA’라고 말합니다.)는 국민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한 인간을, 가족과 형제를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가스실로 보내면서도 이것이 국가의 명령, 상부의 명령이므로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충실히 따랐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들이 아무런 고민 없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현대 국가 체제에서 국민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은 흔히 공무원이라고 하는 관료들에게 있습니다. 국가공무원, 경찰공무원, 직업군인, 교육공무원, 행정 관료들이 그들이죠. 현대의 권력은 왕의 선언이나 의회에서의 토론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는 행정이란 이름을 빌어 집행되고, 행사됩니다. 이번 평택 대추리에서 행해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도 겉으로는 “행정대집행”이란 이름을 빌어 진행되었습니다.

이렇듯 관료제는 군사 영역과 시민 영역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적용됩니다. 베버(M. Weber)에 따르면 현대의 고위 관리들조차도 ‘관직'을 위해 투쟁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출세와 승진이겠지요. 관료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안정적인 행정서비스, 예측 가능한 정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데, 관료제란 이런 점에서 매우 확실한 파트너 역할을 합니다. 관료는 즉 공식적인 채용(공채), 전문 훈련과 분업, 고정된 관할 영역, 문서에 의한 절차와 서열에 따른 하위직과 상급직에 따른 업무의 분할 등으로 매우 효율적인 행정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인간미(양심에 따른 판단을 비롯해 인간적인 융통성 등)을 결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채용된 관리들이 우리의 모든 일상적 욕구와 문제를 결정합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시민적인 행정 관리와 군의 명령권자인 장교는 두 부류 모두 관료주의적인 집단이란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경찰, 군대, 법률은 인간적인 양심과 판단을 대신해 관료로서 명령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관료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화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조밀하게 통제하고 있는 관료적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1980년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감행했던 것을 비판받아 왔던 우리 군대가 또다시 평택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지난 80년대 때부터 얼마 전 농민 2명의 죽음을 불러왔던 폭력진압 문제에 대해 반성한다고 하면서도 경찰이 또다시 그런 시위진압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민주국가의 헤게모니 추출도구,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국가는 단순히 이런 억압적 국가장치들만을 통해서 국민을 통치하지는 않습니다.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장치와 달리 국민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국가(혹은 지배계급)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를 활용한다고 말합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사회적 제도들을 말하는데 우리가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언론, 영화, TV, 광고를 비롯해서 학교, 교회 혹은 그 밖에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접하게 되는 각종 소규모 단체를 비롯해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국가(혹은 지배계급)은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해 상징조작, 매스컴에 의한 대중조작, 선전이나 홍보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 맞는 선택을 하기 보다는 국가(혹은 지배계급)이 원하는 방향으로 따르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앞서 저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독재체제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함께 지혜를 모으지 못하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체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좀더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좀더 복잡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방식을 동원합니다. 바로 그것은 이번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이전문제와 같은 사안에서 잘 드러나는 것이지요. 왜 독도 문제는 많은 친구들이 알고 있지만, 평택 문제에 대해서는 친구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같은 나라의 한 지역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연행되어 가는 심각한 사건,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안보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하는 사건에 대해서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은 이런 문제를 잘 보이는 메인 화면에 배치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지 않는 걸까요? 대추리에 군 병력이 투입되었을 무렵인 5월 5일 어린이날 공중쇼를 보이다가 추락해 사망한 공군 조종사 이야기를(물론 저는 이 분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메인 화면에 넣고, 마지막까지 조종간을 놓치 않았음을, 어린 아들이 헌화하고,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보여주면서도 군이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힘들게 지은 대추리 분교에 진입해 강제 진압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과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 것이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악인 국가와 시민의 계약

앞서 국가와 국가이성이란 다소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아마 학교에서 국가의 3요소란 것에 대해 배웠을 겁니다. 근대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 중 어느 하나만 빠지더라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많은 이들이 종종 망각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이 셋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국가가 존립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현대국가체제에서 국가(혹은 군대)가 충성(忠誠)을 바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국민입니다. 어째서 국민인가? 그 이유는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서 한반도에 명멸했던 여러 국가들에 대해 말했는데 전제왕정 국가에서의 권력은 모두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당연히 왕에게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충성이란 국가가 아닌 국민에 대한 충성이고, 국민은 각각의 시민권을 지닌 개인에 의해 구성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회계약론(로크, 흡스, 루소 등)’이라고 합니다. 사회계약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의 자유주의에서 온 말로 전제왕정에 저항하는 시민(부르주아지)들은 천부인권(天賦人權)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만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좀더 합리적으로 누리기 위해(시민의 최소한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서) 국가라는 개인의 자유와는 상반된 존재를 필요악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민들 개개인은 모두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위탁하고, 복종하는 대신 국가는 시민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켜준다는 내용의 계약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원론적인 것으로 들어갔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우리들 개개인은 역사 이래로 투쟁해 획득한 시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대립하고, 타협한다는 것, 그러나 국가(와 지배계급)는 이런 시민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 만들기와 한국전쟁

어째서 국가(군대)는 평택 대추리의 할아버지, 할머니(국민)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조치를 취하며, 군대를 동원해 강제 집행하는 걸까요? 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잘 아다 시피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를 통해 국가 주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회복한 국권을 통해 수립한 국가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전 새롭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 선택해서 구입한 물건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자신이 선택한 학교가 아니라 추첨방식에 의해 어느 학교 소속 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그 학교에 대해 처음부터 정을 가지고 있기는 어렵습니다. 처음 입학한 학교는 여러 가지로 낯설고, 자신이 아직 그 고등학교의 학생이란 사실이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 배정을 받고,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과 소풍과 수학여행도 가고, 또 우리 학교 출신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려운 일을 해나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새로 입학한 학교의 학생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과정을 거쳐 XX고등학교, @@고등학교 출신이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란 신생고등학교의 국민이 된 당시 우리 웃어른들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제 막 생긴 학교의 신입생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학교의 기풍과 전통을 만들기 위해 저마다 많은 의견을 내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 내 분위기는 매우 시끌벅적하겠지요.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분위기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잘 알다시피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이란 다른 체제를 가진 두 세력에 의해 각기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가 세워집니다. 남한은 미국이란 체제를 본받고, 미국의 이해에 따라 세워진 국가체제이고, 북한은 소련이란 체제를 본받고, 소련의 이해에 따라 세워진 국가체제입니다. 국가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이죠.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가 수립기에 있었던 여러 혼란들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해방된 나라의 국가체제를 결정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았던 것, 남북한이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분단된 국가체제를 만들게 되는 것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제주4.3, 여순사건 등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대한민국이란 고등학교(국가)는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국민)들을 처벌하여 퇴학(처형)시키거나 정학(수감)을 주거나 반성문(전향)을 쓰게 하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는 모범생(서북청년단 등)들을 동원해 은근히 겁을 주거나(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일들을 저질렀지요) 학교에서 강제로 떠나게 했습니다(단독정부 수립 움직임[분단]이 본격화되면서 남과 북에서 서로 수많은 사람들이 월북하거나 월남하게 됩니다). 앞서 어느 학교의 학생으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국가도 이와 흡사한 과정을 거쳐 국민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을 학자들은 ‘국민만들기(Nation Building)’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행해진 국민만들기 과정은 매우 혹독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남한 체제와 북한 체제가 정면 무력 승부로 나섰던 한국 전쟁이었습니다.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와 피난사회

서구의 정치사상가 중 어떤 이는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전쟁이란 혹독한 과정을 통해 국가는 국민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라는 체제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국의 지배집단으로 하여금 국가형성(state-building)과 국민형성(nation-building)과 국가 정당성을 창출하는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기간 중 한국인(남북한)들이 보여준 태도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막 생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스스로의 학교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심정이었을 텐데, 거기에 양쪽 체제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면 죽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은 인간으로 당연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남한 정부는 국민을 버리고 자신들만 한강 이남으로 도망간 상황이었지요. 전쟁 당시 남한 정부는 온전한 ‘국민국가’, ‘주권국가’의 지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국가는 국민을 책임지지 않았(못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인민군에게,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국군에게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일종의 ‘건국신화’가 되었고, 국민들 내면에 국가의 정당성을 부여해주거나 혹은 이를 거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웃어른들은 전쟁이란 극한상황에서 남과 북 어느 한쪽을 택해야했고, 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피난(Exodus)’은 한국전쟁의 거의 모든 시기를 통해 남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을 강요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피난은 북한에 의한 ‘인민의 지배’를 긍정하는 것도, 남한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지배를 긍정한 결과이기 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존에 치중한 경향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경험한 극적인 체험은 현재까지도 살아남아서 자신의 안위와 일신의 보존만을 추구하는 경향, 즉 피난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떨어야 했던 극성스러움과 극악스러움이 온존해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마치 여름 한 철 피서지에 놀러갔을 때, 앞으로 계속해서 얼굴 볼 사람들이 아니니 자신의 자리보존과 이해를 위해 타인의 불편이나 공중도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분위기의 좀더 극적인 버전이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온 셈이란 겁니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병폐와 사회적 속성은 여전히 피난사회, 피난지에서 일신의 안위와 보존만을 따지는 것과 일치합니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 “국가 안보는 가장 중요한 국가 목표가 되고, 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국가라는 공동체 유지와 보존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 조직은 군대 조직과 같이 되고, 국민은 군인이 되고, 국가의 법은 군대에서 통용되는 명령”과 동일시되어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북한 양측의 점령 정책은 이와 같이 군사적 목적에 종속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치 행위는 곧 전투행위로 간주되어 각료회의나 민주적 대의 기구의 심의와 논의 없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 양 국가 모두에서 국가는 신(神)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적’과 ‘나’의 이분법을 강요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정한 정치 이념, 즉 이데올로기를 견지하도록 강요하고 사람들을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분한 다음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은 용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으로 취급한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본문 193쪽>

이렇듯 “과도하게 정치화된 전쟁 상황에서 국가의 신격화, 신앙 대상화 현상”은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반공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신앙처럼 되며, 국민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들 “국가가 표방하는 정치의 신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근대 유럽의 종교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이단의 결과는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거친 후 미국의 체제를 본받고, 미국에 의해 탄생했고, 미국에 의해 보전된 남한에는 국가와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가 토대를 튼튼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국가의 통치자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까지 지속되는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호전성은 남한 정권을, 남한의 호전성은 북한 정권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를 적대시하지만, 서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 상대방이 필요한 공범자들, “적대적 공범자들”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국민적 집단히스테리

다시 앞서의 이야기들과 함께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국가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우리들 개개인은 역사 이래로 투쟁해 획득한 시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대립하고, 타협한다는 것, 그러나 국가(와 지배계급)는 이런 시민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정부는 국가 형성 과정, 정부 수립 과정부터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국민의 의지보다는 미국의 의사,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무게를 두어왔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의미는 신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가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국가안보와 국가가 표방하는 정치적 판단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마치 종교재판의 이단자인양 비판되고 처벌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내면화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모든 악은 단 한 마디 ‘빨갱이’로 규정됩니다. 아마 지금도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평택 대추리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마치 우리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출현한 게릴라라도 되는 양 처단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정신병리학적인 집단 히스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양측 모두 차분하고 이성적인 접근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런 역사적 결과가 현재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반대 혹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민들(그들도 분명히 국가가 보호해줘야 할 국민임에도 불구하고)을 군 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몰아내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또 한 가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이란 국가체제를 지켜준(당시 소련과 경쟁하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한) 미국의 이해를 남한의 이해와 동일하게 판단하고, 미국의 사고, 이해, 입장을 내면화한(자신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인 양 생각하는, 또 실제로 자신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기도 하는) 지배세력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미국의 무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영토에 그들이 이번엔 소련이 아닌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좀더 공격적인 군사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재배치하는 일조차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런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역할, 또한 대한민국의 영토와 주권을 수호한다는 측면에서도 당연히 국민의 의견을 묻고 반영해야 하는데 그런 적법한 절차들을 무시하고 진행되었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의 실상에 대하여

평택기지 이전문제를 요약해보자면, 현재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는 기존의 미군기지들을 통·폐합해서 현재 166만평에 달하는 평택기지를 450만평으로 확장하고, 춘천의 캠프페이지를 비롯한 전국의 미 2사단 소속 미군기지를 평택 한곳으로 모은다는 계획입니다. 정부는  오는 2008년까지 총 16개 기지를 환수하고 춘천 캠프페이지 등 3개 기지의 병력과 시설을 분산 배치해 모두 7,000억 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거둔다는 입장인 거죠.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시행한 평택지원특별법에 따라서 평택기지조성비용을 전국에 분포한 미군기지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충당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주한 미군이 한반도에 머물면서 일으킨 각종 범죄는 물론, 그간 자신들이 주둔해 있던 기지의 토양을 극심하게 오염시켜서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둔했던 땅(22개 기지)에서는 암을 유발시키는 벤젠 등 유독성화학물질인 BTEX(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크실렌)이 지하수에 스며들어 기준치의1,830배가 검출되었습니다. 또한 정부는 비용절감과 함께 기존의 미군 기지를 매각하여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춘천 캠프페이지의 경우 지난해 3월 폐쇄된 이후 1년이 넘도록 소유권이나 부지 활용권은 고사하고 아직까지 부지매입비용 산출작업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 국방부까지 나서서 이 땅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주기보다는 자신들이 사용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지요.

언제까지 우리 땅에 우리 세금을 지불하면서 한반도의 이익과 평화보다는 미국의 이익과 미국의 세계전략에 충성하는 미군을 붙잡아 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이익과 한반도의 이익이 부합되는 측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우리의 의지에 따르는 군대가 아니라 미국의 군대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 유사시 미국은 한국 정부와 아무런 상의절차 없이도(통보만 있을 뿐) 주한미군을 이용해 인접한 국가들을 공격하거나 북한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지난 YS정권 당시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는 주변의 다른 강국들로부터 보호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공격받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공격받는 이유가 우리가 그 나라에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매우 잔인한 전쟁을 치렀고, 그때의 경험으로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미군기지를 돌려받으므로, 또 시민단체들은 그동안 놀고 있는 미군기지를 반환하라고 시위해 왔으므로 당연히 환영할 일이 아닌가? 돌려받는 땅이 더 많으므로 도리어 이익이 아니냐고 합니다. 다음은 국방부 홍보실 브리핑 자료입니다.

○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은 한ㆍ미간의합의와 국회의 비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합법적인 국책사업입니다.
○ 이 사업은 1882년 청나라 군대의 주둔 이후 일본군, 미군으로  이어진 수도 서울 중심부의 외국군대 주둔 역사를 청산함으로써 국민적 자존심 회복차원에서 지난 88년부터 우리가 미측에 요구한 사업입니다.
○ 이후, 지난 ’90년에 한ㆍ미간에 합의한 후 일부 추진 중에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우리가 중단을 요구하였고, 03년이 되어서야 한ㆍ미 정상이 재추진키로 합의한 것입니다.
○ 이러한 합의에 의해 최종적으로 362만평을 미측에 신규 제공하는 대신, 전국에 산재해 있는 35개 기지, 7개 훈련장 등 총 5,167만평의 미군기지를 돌려받아 순수하게 4,805만평을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그동안 서울ㆍ부산 등 도심 한복판에 있던 미군기지를 이전 및 통폐합함으로써 주민불편을 해소하고 지역개발을 촉진하는 등 국가균형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현재 미군기지 이전사업을 반대하고 있는 단체들도 당시에는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을 적극 요구하였는데, 이제 와서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이전을 반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며, 결국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 어떤 항의 시위에도 꿈쩍 않던 미군이 용산기지를 반환하는 이면엔 한국과 한국 국민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그 땅이 필요치 않게 되었고, 그 와중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방만한 형태로 군 기지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고, 그런 기지를 유지하는데 있어 기지 사용료를 받기는커녕 유지비용까지 우리 정부가 상당수 대어주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그들 자신도 불필요한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정부(노태우 정부 때부터 협상하기 시작)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쉽게 양보하고, 굴종적 자세로 협상에 임한 탓도 크지요(미군은 지속적으로 감축될 예정이며 현재 평택의 미군기지 중 상당수는 미군의 위락시설 부지로 이용될 예정입니다). 사실 미군이 용산기지를 반환하고, 주한미군이 용산과 의정부에서 떠나 평택으로 집결하는 까닭은 대북방어 문제는 한국군에 떠맡기고, 새로운 군사전략, 주한미군의 공세적 역할변화(전략적 유연성)를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전략을 추진하는 기동타격군으로서 전 세계 분쟁지역으로 손쉽게 오가기 위해 오산비행장과 평택항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즉,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 주한미군의 속성은 변화하고 있으며, 주둔이 지닌 의미는 더 이상 대북억지력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전략을 추진하고 강제하는 군사력이란 겁니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2003년 3월 16일 대북방어는 한국이 부담하고, 미군이 맡고 있던 한국 내 10대 군사임무도 2008년까지 한국군에 이양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주한미군은 평택기지를 확장해서 전 세계 분쟁에 개입하기 위한 거점기지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간 대한민국 정부는 불안(?)해하는 국민들에게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이나 주한미군 재배치(GPR)가 주한미군의 역할변화(전략적 유연성)와 관계없다고 주장해왔지만, 지난 1월 19일 반기문 장관과 미국의 라이스 장관은 워싱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평택 대추리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가?

“왜 정부는 미국이 요구한다고 그 땅(평택 미군기지 확장 땅)을 내놓는가? 구체적으로 그래야만 될 항복문서나 국가간 체결문서가 있는 건가? 우리정부가 안 내놓는다고 하면 안 되는가?”란 질문을 했는데, 일부의 원인은 앞서의 글에서 대략적이나마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정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저보다 오늘(5.13)자 <프레시안>에 실린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임종인 씨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은 재검토해야 한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협상을 잘못했고 그 다음 정부들도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미국과의 재협상이 불가능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용산기지이전협정 제2조 5항에 따르면 "양 당사국은 이전의 시행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소요에 현저한 변화가 발생한 경우에는 상호 협의하고 이전계획에 필요한 조정을 가할 수 있다." 제2조 2항에는 "필요한 경우에는 양 당사국의 상호 합의에 의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전"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미 2사단 이전협정인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LPP) 개정안에도 같은 조항이 들어 있다.
주한미군은 재배치되는 것만이 아니라 대거 줄어든다. 2004년 10월 4일 주한미군은 2008년까지 1만2500명을 줄이기로 확정했다. 이렇게 되면 2008년 말 주한미군은 2만4500명이 된다. 더 줄어들 가능성도 크다. 2006년 4월 23일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의 추가감군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윌리엄 팰런 미 태평양사령관과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도 미 상하원에 그렇게 보고했다.
그런데도 주한미군 감군은 평택기지 확장 면적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3분의 1 이상 줄어드는 것은 용산기지이전협정이나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 개정안의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소요에 현저한 변화가 발생할 경우"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팽성지역 285만 평을 다 주지 않아도 된다.
정부는 발상을 바꿔야 한다. 군사정권이 쓰던 강압적인 방법이나 공안사건으로 몰아서는 평택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국민의 반대여론을 미국과의 재협상에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의 재협상은 근거도 충분하고 논리도 부족함이 없다.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
나는 주한미군의 대북 억지력과 감축 규모를 고려할 때 285만 평의 절반만 제공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국방부가 강제수용한 땅에는 주한미군의 골프장 부지도 포함되어 있다. 미군이 전용하던 성남골프장(28만 평) 대체부지다. 주한미군을 위한 각종 위락시설 부지도 많다.
이런 사유들을 모두 묶어 국방부는 미국과 재협상해야 한다. 재협상을 통해, 다시는 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평택 농민들, 오갈 데 없는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걱정하는 국민들의 염려도 덜어야 한다. 정부는 강제수용을 중단하고 생존과 평화를 바라는 평택 주민과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분의 글 말고도 사실 이와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그것도 올해 중으로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문제 역시 우리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어 앞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태도이고, 최근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건에 대해 국익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비롯해, 효순, 미선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광화문 촛불집회를 싸잡아 비난하거나, 평택 대추리 문제를 같은 시민 된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마치 반미 집단의 일인 양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한 정부가 미국과 당당하게 맞서며 우리의 진정한 국익을 위해 관철시키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앞서 나름대로 길게 늘어놓긴 했으나 그와 같은 분석만으로 해소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사안도 아니지요. 우리 국익을 위해서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저는 일면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유럽이든, 일본이든 혹은 미국이 견제하고자 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도 미국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미국의 힘이 강성하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체념과 마찬가지로 일면의 진실일 뿐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그늘 아래 한반도가 평화로울 거라는 환상처럼 단지 일면의 진실에만 집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그 어떤 강대국도 100년, 200년의 영화를 지속하지 못했다는 진리와 함께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의 국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평택 대추리,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를 생각해볼 때

어쨌거나 앞서부터 지루하게 끌어온 이야기들의 결론을 이제 내야 할 때인 듯싶습니다.
평택 문제는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 고민거리를 던져줍니다. 첫째. 국가는 개인, 시민에게 무엇인가? 둘째. 미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셋째. 국익이란 이름 아래 자국의 국가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혼동하거나 일치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고민거리에 대해 일부는 앞서의 글에서 제 나름의 생각과 입장을 정리해서 보여드렸다고 생각하고, 이전의 글들을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현재 평택의 주민들이 벌이는 시위를 땅값을 좀더 보상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시각들이 있습니다. 기실 이런 시각은 정부와 언론에서 부추긴 측면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방부의 대언론 브리핑 자료를 보면 “반대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추리 및 도두리 지역의 보상금은 평균 6억원 수준, 이중 보상금 총액 10억원 이상이 21명, 팽성대책위 주요 핵심 간부들의 보상금 최고 액수는 27억 9천만원, 지도부의 평균 보상금은 19억 2천만 원에 이르는 등 사실상 백만장자가 생존권 위협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일부분에서는 이전의 주장들과 달리 최근의 언론이나 여론의 동향을 살펴보면 이제 평택 주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분리해서 바라보려고 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평택 주민들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동정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평택 문제를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치부하고 스스로 양심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전자이든 후자이든 평택 주민들을 타자(他者)화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정부의 발표대로 이들이 정말 땅 부자이고, 정말 그 정도 보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지역 주민들이 모두 자기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을까요? 또 이 분들 가운데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자기의 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착을 과연 우리 정부는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이 사실은 이들과 그다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분들이란 사실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닐 겁니다.

3년이 넘는 주민들의 투쟁 과정 속에서 한·미 두 나라 정부가 평택의 주민들과 진지하게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끈질기게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을 이어가는지,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단지 특별법을 만들고, 땅을 뺏고, 농민들을 감옥에 가두고, 정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겠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죠.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 89번지에 사는 오정순(59)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도 고생을 해가지고 지금은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안 좋아요. 그래서 지금은 일을 못해요. 새벽에 다섯 시부터 일어나 애들 셋 데리고 나가서 일 할라고 생각해봐요. 들판에다 다라 속에 애들 놓고 그렇게 일하면서 빨랫줄에 빨래 마를 날이 없었어요. 밤 열두 시까지 빨래하고 그 이튿날 일 나갔어요.
지금 이렇게 앉아서 생각하면 이 몸뚱이 다 망가지도록까지 일한 거예요. 그러니 이 땅에 애착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어디 가서 살라고 이걸 내놓으라고 하느냐고. 그리고 지네들이 미국놈들한테 전쟁마당 제공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원통한 거여. 우리가 어떻게 가꾼 땅인데 이 땅을 달라 그러냐고요. 우리는 진짜 못 나가. 이 땅 가져가려면은 우리들을 다 동네에다 묻고 가져가야 돼.
우리 동네는 지금 아무 걱정할 게 없어. 미군기지만 안 들어온다면은. 노인양반들 여기서 사는 데 아무 불편 없고. 여기는 소작농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어디 가서 사느냐고. 이제 나이 60~70 먹었는디 다른 데 가면은 어디 소작논 주어요? 지난번에 국방부 사람이 그러는 거야. “직장 해주면 되지 않느냐” 해서, “당신네들 60~70 먹은 노인네들 갖다가 직장 줄라느냐”고, “돈 얼마썩 줄라고 직장 얘기하느냐”고 그러니까 답변을 않더라고.

농촌에 산다고, 우리가 세금 잘 내고 거시기하니깐 정부에서 우리를 너무 깜본 거여.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대할 수는 없어 우리 농민들한테. 우리 농민들을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거야. 텔레비전도 보지만 농촌 사람들 사기쳐서 붙잡혀가는 거 봤어요? 우리는 법이 뭔지도 몰라요. 우리가 그렇게 어렵게 살 때 지덜이 와서 치다보기를 했나 도와주기를 했나 물 한 모금을 떠다줬나. 그런 것도 아닌데 지네들은 법 찾고. 우리가 법을 어긴 적이 있가니?
애들이, 학생들이 데모하고 그럴 때에, “아 쟤네들 왜 저래여. 부모들이 저거 갈키느라고 얼마나 욕보고 그랬는데 왜 저렇게 맨날 투쟁을 하나” 그랬거든. 그런데 우리가 당하고 보니까, 그 학생들도 그렇게 생겨서나 그렇게 투쟁을 했는가 보다 하지.

평택으로 기지 확장 이전한다면서 정부가 한 일은 편지 하나 달랑 보낸 것이라고 하는데, 국방부 브리핑 자료를 살펴보면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모처럼 조성된 대화의 물꼬를 국방부가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2년여 동안 반대 대책위 주민들과 공식ㆍ비공식 대화를 38회”나 해왔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와 대화를 나누려 했던 것일까요. 국방부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을 이끌고 있는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와 평택 주민들의 모임인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팽성 대책위)에 전화조차 걸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에 국방부는 협의매수에는 응하지 않으면서 범대위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관망파’를 대화상대로 골랐습니다. 이 분들은 국방부 관계자와 만나 “지금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이고 온건한 요구였겠지요. 지난 2005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인권상황 실태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개발사업지역 세입자 등 주거빈곤층 주거권 보장 개선방안을 위한 실태조사’를 보면 “국가가 진행하는 사업으로 주민들의 생활 여건이 이전보다 나빠져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는 데, 국방부는 관망파 농민들을 설득하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국방부는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은 한․미간의 합의와 국회의 비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합법적인 국책사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책사업이란 대부분이 정부가 밀실에서 일방적으로 정책을 짜고, 그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식이었지요. 부안에 핵폐기장을 만들  때도 그랬고, 천성산 터널 공사도 그랬고, 새만금도 그랬지요. 정말 그곳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묻거나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일부 전문가들, 관료들, 정치인들끼리 결정한 뒤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평택시 팽성읍에는 대추리가 두 곳 있다고 합니다. 50년 전 주민들이 살았던 대추리는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없어졌고, 주민들은 쫓겨난 후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으면서 대추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하지요. 하지만 주민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해 미군 부대 안의 옛 마을 자리를 '원 대추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2006년 이 곳의 주민들은 또 다시 대추리라는 이름을 잃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또, 평택 대추리엔 농촌이면 어디에나 있는 마을을 상징하는 큰 나무가 없다고 합니다. 일정 시대 때 쫓겨나고, 미군 공군기지 조성되면서 다시 추방당하듯 쫓겨난 사란들이 갯벌을 메워가며 이를 악물고 농사지어서 50년 세월을 거친 분들입니다. 이제 겨우 살만 해지니까, 다시 땅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대추분교 이야기는 전해 들어서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어느 분이 잘 써 논 글이 있어서 다시 인용해 봅니다.

거기에 학교가 없었어. 3Km 떨어진 계성초교로 통학했대. 원래 뻘밭이었으니 애들이 길 다니기가 원체 힘들어야지. 대추리/도두리 사람들, 그전에도 땅 뺏기고 온 사람들이니 살림 어려운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 와중에 주민들이 쌀 걷어서 땅 사서 학교부지 만들어 교육청에 기증한 거야. 학교 세워달라고. 1969년 3월 1일 계성초등학교 대추분교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사람들이 대추분교에 모인 이유가 그거야. 나라에서 애들 학교도 안 만들어줘서 올곧이 주민 힘으로 만든 학교. 그래서 거기 모인 거야.

사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스팔트 킨트들인 우리들이 농부들이 생각하는 땅의 소중함, 땅이 곧 생명인 분들의 감각과 생각이 생생하게 전달되긴 어려울 듯합니다. 이제 조만간 FTA란 광풍이 또다시 밀어닥칠 것이고, 우리네 농촌엔 다시 한 번 살벌한 폭풍이 들이닥치겠지요. 물론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경제 규모, 산업적 측면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미미합니다. 아마 순전히 산업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자면 FTA가 꼭 우리에게 손실만 입히진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로 보아 FTA로 이득을 얻을 사람들이 그 이득을 FTA로 손실을 입게 될 사람들을 위해 혹은 국가가 거둬들인 이들을 위해 부의 분배를 이뤄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엔 돈이나 가치, 효율이란 것만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들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이들은 현재의 시위문화(폭력시위)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저도 평화시위, 시위문화를 지지합니다만, 더 큰 폭력(국가폭력, 공권력에 의한 폭력)에는 눈을 내리 감으면서도 그에 비해서는 강도가 훨씬 약한 시위 도중의 폭력에 대해서는 질겁하며 그 사람들을 이 땅에서 내몰아야 할 것처럼 야단입니다. 언제나 길 위에서 우리들과 함께 해주시는 문정현 신부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끝으로 이 글을 줄일까 합니다.

미군기지 확장 문제는 대단한 이슈입니다. 누가 봐도 미군의 군사전략 아닌가요. 신속한 기동력, 정밀한 타격 아닌가요. 전략적 유연성이란 말을 하지만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이라는 게 눈에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화약고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의 재산권은 물론 한반도의 평화권까지 빼앗기는 것 아닌가요. 팽성읍 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지를 반대하기 전에 평화를 사랑하는 운동입니다. 지금은 평택주민들의 시련으로 비치고 있지만 이는 한반도 평화가 달린 문제입니다. 여태껏 팽성읍 내부에서 논의하고 결속력을 다졌다면 이제 세상에 널리 알려서 '우리 일'로 만들어야 할 때인 겁니다. 이 싸움에서 진다고 생각해봐요. 한미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 같아요? 더 종속될 겁니다. 지금의 시련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데 세상은 평택 언저리 작은 마을의 외침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 순박한 주민들이 짊어지고 갈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후에는 모두가 같이 짊어지자는 겁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면 조금씩 나눠지자는 말입니다.

이제, 저는 그 짐을 조금 나눠지기 위해 광화문으로 나갑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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