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 마음에 조기를 달며...

한국사에는 무섭게도 굴곡진 날짜가 많습니다.

한국어에는 그런 날들을 독특한 숫자 읽기 방식으로 기억해 왔습니다.
독특한 숫자 읽기란, 6.25의 앞부분은 숫자로, 뒷부분은 소수점 이하처럼 읽었다는 것입니다. 육(점)이오로 말입니다. 그러면 12.12는 십이(점)일이로 읽어야 하겠지요.

숫자에는 아무런 가치 판단이 없기에 숫자로 기억해야 했던 그 슬픔까지 기억됩니다.

6.25를 사변이라고 한다면 난리를 일으킨 폭도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 질게고, 민족해방 전쟁이라고 한다면 민족을 구속시킨 실체가 문제가 될 것이고, 한국 전쟁이라고 한다면 한국을 둘러싸고 그 전쟁을 실제로 수행한 이들을 모두 엮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지하실에서 죽어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한국어에는 가치 판단이 배제된 숫자만으로 사건 읽기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합니다.

6월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87년의 민주화 운동과 기만적 전향인 노태우의 항복이 있었고,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있었고, 김구 선생님이 저격된 달이기도 합니다. 4년 전, 붉은 월드컵의 에너지를 보기도 했었지요.

저는 4년 전, 월드컵에 온 나라가 미쳐 날뛸 때, 이래도 되는지... 계속 찜찜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보리가 춤을 춥니다.
파아란 하늘 아래서 짙은 풀빛 보리가 춤을 춥니다.
보리는 자기를 지키려는 듯, 기다란 가시를 겨누고 있지만,
살포시 잡아 보면,
흙의 따스함이 묻어 납니다.
열 다섯살, 두 계집애는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재미진지,
까르륵거리며 보리 이삭을 치기도 하고,
앙감질로 달려도 봅니다.
보리밭 사이로 포장된 도로는
널찍하긴 하지만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참 조용한 길입니다.

그르르르...
멀리서 캐터필러 소리 지축을 울립니다.
선이랑 순이는 친형제 아니지만,
선이나 순이나 영어로 쓰면 같다는 둥,
오늘 과학 시간에 실험을 잘 하던 철이가 멋지다는 둥,
새로 오신 미술 선생님은 얼굴은 안정환인데 성격은 정말 나쁘다는 둥,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며
선이네 집에서 순이네 집으로,
순이네 집에서 선이네 집으로,
얼마나 이 길을 오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길에서 장갑차를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닙니다.
선이와 순이 마을에서 미군을 만나는 일은
선이와 순이가 보리를 만나듯 어려서부터 익숙한 일이지요.
뒤에서 그르렁대는 캐터필러 소리에
선이와 순이는 오른쪽 옆으로 바싹 붙어 섰습니다.
서로 나누던 이야기도 잠시 멈췄습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에 말소리가 잠겼기 때문입니다.

아~악!!!
갑자기 선이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동시에 순이도 신음 소리 섞인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르렁거리며 캐터필러는 계속 지나갔고,
보리가 웃자라 흔들거리던 밭 옆으로,
짓밟힌 꽃송이 둘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한 민국! 함성은 온 땅을 뒤덮었고,
천지는 웃는 사람들 투성이였습니다.
누구도 짓밟힌 꽃송이 따윈 돌아 보지도 않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아, 그러나...
짓밟힘이 숙명처럼 익숙해온 이 민족은,
풀이 되어 다시 모였습니다.
두 꽃송이 짓밟힌 자리에서,
풀뿌리는 동풍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하늘거리는 가녀린 촛불로,
선이와 순이의 가는 길을
추모해 주었습니다.
주둔군 지위 협정이라는 소파는 여전하고,
주둔군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시킨다는 알 수 없는 속셈은,
다시 대추리, 도두리 땅을 만든 노인들을 내쫓았습니다.

오늘은 두 꽃송이 짓밟힌 그 날입니다.
오늘은 토고와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슬픈 기억 따위 묻어 두어도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은 마음 속에 묻어 둔다고 녹아지지 않습니다.
그 슬픔은 세월이 지난다고 흩어지지 않습니다.

월드컵은 4년이 지나 돌아왔지만,
주한 미군의 워커발에 짓밟혀 쓰러진
두 꽃송이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늘은 마음에 조기를 다는 날입니다.

아이들에게, 월드컵의 정치성에 대해서 그 상업적 속성에 대해서 아무리 역설해도, 파키스탄 어린이가 그 작은 손에 가득 굳은 살이 박여 만든 축구공이, 필리핀 어린이가 몇날 며칠을 짠 벌집모양 육각형 그물을 출렁일 때, 그 재미는 나머지 논리를 싸~악 잊게 할 만큼 중독성이 강합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맞붙는 또 다른 정치판, 현실 세계에선 이길 수 없는 강대국들을, 게임 안에서 만이라도 이기는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경기들은 관객들을 전율하게 하고, 사고를 마비시키며 내셔날리즘의 국가주의 광신도로 오락가락하게 만듭니다.

그 안에는 히틀러의 정신 분석적 요소도 들어 있고, 대동아 공영을 외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심도 들어있는 호르몬들이 떠다닙니다. 붉은 악마의 구호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Pride of Asia' 이렇게 국수주의적이고 대동아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호는 오랜 시절 우리 뇌리에 박혔던 애국심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이 호르몬은 한국인들이 몸으로 익혀온 지역주의, 아군 아니면 적군이란 시스템에 전이됩니다.

그래서, 월드컵을 즐기지 않으면 싸이코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어제 일본과 호주의 월드컵 경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는 그 경기를 <제국주의자 일본>과 <한국의 벗 히딩크>의 경기로 재편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제국주의자 일본은 처음엔 장엄하게 떠오르는, 욱일승천의 기세였으나, 한국의 벗 히딩크의 어퍼컷에 나가떨어지는 꼴은 자못 통쾌했습니다. 중독은 이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밤, 이기든 지든 토고와의 축구는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붉은 티를 입고, 광장에 모이고 TV앞에 모여 앉아 붉은 유니폼을 응원할 것입니다. 함성이 퍼져 메아리 커져 갈라져 있던 땅덩어리 하나로 울릴 것입니다. 이 짜릿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마는,

오늘은 6.13입니다.

가슴에 작은 조기 하나 올려, 슬픔을 울릴 수 있어야 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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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월드컵 열기 속에 슬쩍 묻으면 안돼

이강택 회원(KBS PD), 4일(일) 오후8시 [KBS스페셜]에서 고발

 

 

 

 KBS

 

 

편집자 주 :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장을 역임하고 시사성 높고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해 시민단체로부터 많은 상을 받은 생방송 [시사투나잇]을 거쳐 현재 KBS 스페셜을 맡고 있고 이강택 회원(사진)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면밀한 검토 없이 일방적으로 체결될 경우 국민경제에 크나큰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특히 정부는 1차 본협상을 미국 워싱턴에서 6월 5일(월)-9일(금) 열기로 해 월드컵의 열기 속에 저항의 목소리를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아래는 KBS스페셜의 방송보도자료

 

- 연출 : 이강택 PD
- 방송 : 6월 4일(일), 8시, KBS 1TV

■ 기획의도

1994년 우리보다 12년 앞서 미국과 FTA를 체결했던 멕시코. 중남미의 허브를 꿈꾸며 세계 유수의 국가들과 FTA를 맺어온 멕시코는 왜, 어떤 배경 하에서 FTA를 추진했는가?

협상 당시의 찬성론과 반대론은 각기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었는가? 그들은 그동안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겪고 있는가? 4배 이상 급증한 외국인 투자, 3배로 늘어난 수출 등은 과연 국민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는가?

기대에 못 미친 고용창출, 농촌의 붕괴, 양극화 심화 등 부작용들은 어디로부터 연유했으며 이를 최소화할 수는 없었는가?

세계 최초로 미국과 비대칭 FTA를 맺었던 멕시코. 6월 5일 미국과의 본협상 개시를 앞둔 시점에서 그동안 말과 글로만 떠돌던 멕시코의 과거와 오늘을 생생한 현장취재를 통해 집중 조명한다. 이를 통해 한미FTA 협상의 향후진행과 사전, 사후 대책의 수립과 집행에 있어 구체적인 시사점과 교훈을 찾아본다.

■ 주요내용

1. 배반당한 선진국의 꿈 - <‘Donde Voy>’의 진실
미국 샌디에이고와 맞닿아 있는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 그곳 공항 근처의 거대한 장벽에는 수백 개의 십자가들이 걸려있다. 이 곳을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다 사망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십자가들. 그 수는 1994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후 오히려 급증했다. 멕시코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린다는 꿈을 선전하며 강행됐던 나프타. 그러나 그 약속은 배신으로 점철된 사기극이었다.

La madrugada me ve corriendo / Bajo el cielo que va dando color / No salgas sol a nombrarme / A la fuerza de la immigracion
동트는 새벽녘 나는 달리고 있어요.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어느 하늘 아래를 말이죠.
태양이여 부디 나를 들키게 하지 말아다오. 이민국에 신고되지 않도록 말이에요.

Donde voy, Donde voy / La esperanza es mi destinacion / Solo estoy, solo estoy / Por el monte profugo, voy
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난 희망 찾아가고 있어요. 혼자서, 외로이 사막을 헤매며 도망쳐 가고 있어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애절한 곡조의 Donde Voy. 목숨을 걸고 멕시코를 탈출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애환을 절절하게 표현한 이 노래는 나프타 협정 12년의 진실이 오롯이 담겨있다.

2. 그 누구도 FT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례로 보는 NAFTA
경력 17년의 멕시코 천재 영화감독 까를로스 까레라스.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상과 오스카 아카데미상, 황금종려상까지 받은 천재감독.. 그러나 영화감독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불어닥친 NAFTA는 그를 CF제작자로 탈바꿈 시켰다.

멕시코 제1의 주방용품 메이커 에코. 그들은 해외 각지에서 구입한 원자재로 각계각층을 겨냥해 무려 6가지 상표의 제품을 만든다. 최근엔 40억 원을 들여 신기계 두 대를 도입, 대규모의 구조조정과 인원감축을 단행했다. 나프타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제품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기업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티후아나, 미국 샌디에고와 접한 이 도시는 원래 사막에 둘러싸인 조그만 상업도시였다. 하지만 NAFTA이후 마킬라도라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50만 정도였던 인구가 현재 120만으로 늘어났다. 매일 새벽 4시부터 24시간 미국으로 향하는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고, 3교대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로 도로와 술집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FTA는 멕시코 내 모든 개인의 일상과 기업의 행태, 더 나아가 강산을 바꾸었다.

3. 그곳에 국민경제는 없다 - 극에 달한 양극화 실태
즐비한 첨단 고층 빌딩, 200여개에 달하는 다국적 기업의 현지법인, 질주하는 최고급 차량, 94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신흥 상업지구 싼타페는 NAFTA의 수혜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러나 산타페는 섬일 뿐이다. 멕시코시티 구 도심지역 곳곳에는 관공서나 공장, 사무실 등에서 쫓겨난 멕시코인들이 차린 노점상으로 빼곡하다. 멕시코에서는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의 실업수당이나 실업대책조차 없는 현실 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출 3배, 외자도입 개도국 3위의 외형적 성장과 구매력 80위의 모순이 병존하는 현실. 각기 파편화된 채 미국경제에 개별 포섭된 삶의 현장 구석구석을 조명한다.

4. 무너진 농촌, 문 닫은 중소기업 그리고 탈출 
NAFTA이후 농촌주민의 1/3이상이 마을을 떠났다. 마을은 유령이라도 나올 것처럼 휑하고, 남아있는 건 노인과 아이들 뿐. 마을 입구엔 경작을 포기해 버려진 농토들이 즐비하고...이것이 전형적인 멕시코 농촌의 모습이다.

중소기업들의 상당수도 이미 문을 닫았고 그나마 남은 기업들도 빈사직전이다.

멕시코시티 외곽의 공단지대에는 폐업한 공장들이 숱하게 눈에 띈다. 마킬라도라 부문에서 일자리가 60만 개 늘었다지만 제조업 자체만 놓고 보아도 오히려 일자리가 15% 이상 감소했다.

하여 그들은 북부 국경도시로 내몰린다. 하지만 마킬라도라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저임과 평균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 그리고 열악한 주거. 결국 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다. 취재카메라에 포착된 그들의 삶과 탈출의 현장은 인간의 조건을 묻게 한다.

5.다국적 자본의 천국! - 메탈클래드 소송사건의 진상
나프타 이후 멕시코는 외국자본의 천국이다. 금융부문의 95%가 그들의 손에 장악되었고 수출 1위부터 6위의 기업 중 5개가 미국인 소유이다.

그들은 새로 공장을 짓지 않는다. 다만 기존 기업중 쓸만한 것들을 인수,합병해 정리해고를 단행할 뿐이다. 또한 나프타의 이행의무금지 조항에 따라 그들은 멕시코 내에서 부품조달, 고용창출 등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마킬라도라의 멕시코 부품 사용률은 겨우 3%. 따라서 경제성장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온갖 특혜를 누린다. 미국의 폐기물처리 회사가 건설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며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메탈클래드 사건. 인근의 지하수를 오염시켜 수십 명의 암환자와 기형아 출산을 일으키고,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도 미국 관리들의 통한 협박과 회유 그리고 비공개 분쟁처리절차를 통해 165억 원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타낸 사건의 전말을 국내 최초로 상세하게 공개한다.

6. 허위와 기만으로 점철된 ‘FTA 체결 사기극’ 전말
통계조작을 통한 허위 연구결과 발표와 기만적인 전국순회 공청회! 그리고 대대적인 홍보 팜플렛 배포와 TV광고까지 동원한 여론몰이! 살리나스 정부는 오직 대국민 홍보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막상 협상에 임해서는 일방적인 후퇴와 양보로 일관했고, 모든 과정을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했다. 집권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더구나 사후대책도 전혀 없었고, 구조조정이라는 명목 하에 오히려 자국의 농업, 영화 죽이기로 일관했다.

당시의 협상대표, 연구 수행자들의 증언과 현존하는 홍보책자와 TV광고 입수를 통해 협상 전후의 ‘사기극’을 재구성한다.

7. 마르꼬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우리는 그들을 몰아낼 것이다!”
자체적인 성장동력을 상실한 멕시코 경제, 미국 경제에 바람이라도 조금 불라치면 멕시코 경제는 송두리째 흔들린다. 더구나 중국, 인도의 저가공세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NAFTA로 누리던 최소한의 효과마저도 의미를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 대다수 국민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계속 높아만 가는 재협상 요구, 그러나 오히려 대미종속은 더욱 전면화될 뿐이다. 전국을 순회하며 근본적인 변혁을 부르짖고 있는 마르꼬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지난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서 그는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몰아낼 것” 이라고 분노를 쏟아낸다.

8. 의연한 또르띠야 장벽, 무엇을 말하는가?
최근 부시 미 대통령은 6000명의 군 병력을 추가로 파견하고 엄청난 예산을 들여 국경의 장벽을 추가로 쌓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멕시코, 제 1세계와 제 3세계를 가르고 있는 ‘또르띠야 장벽. NAFTA 체결 12년이 흐른 지금 그 의연한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멕시코의 선례를 통해 한미 FTA가 추진되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 한미FTA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준) http://www.noft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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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6-1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데보이... 저 노래 참 슬프더군요.
우리 아이들도 돈데 보이를 얼버무리며 살게 될 것 같아 슬프기만 합니다.
무력한 선배들을 둔 죄로 말입니다.

아나키 2006-06-12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미fta저지를 위해 투쟁해야죠

 
 전출처 : 여울 > 스포츠-마케팅-내면화(ing)



1.

나는 참 축구를 좋아한다. 발등을 감기며 튕겨나가는 슛맛, 발맛만 생각하기만 해도 아연해진다. 서로 느낌을 나누며 주고 받는 공맛, 만들어가는 과정의 재미~ 어느 하나 놓칠 수 없고, 그 긴장감도 역시 생각만해도 짜릿해진다.  그런 나는 사실 4년전과 달리, 지금은 거의 관심이 없다. 누구와 경기를 하는 것인지? 언제 하는지? 아무래도 지나친 과잉이 나를 질리게 만들어 놓은 지도 모르겠다.  몇달전부터 기획을 해온 언론자본과 결탁한 쥐어짜내기 광고의 역겨움을 일찍 냄새맡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경기 전후, 앞뒤를 온통 스포츠 중계를 하는 지겨움에 몸둘 바를 몰라서인지도 모르겠다.

스포츠의 기억은 아련하다. 아마 차범근이 버마와 경기전이었을 것 같다. 흑백텔레비젼 앞에 앉아 수많은 관중에 둘러쌓여 어른거리는 화면, 역전에 환호하는 환호성은 너무도 기억에 또렷하다. 정지한 듯한 그 분위기맛.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의 감격과 섞여있는 그 응원 맛일까?



우리에게 있어 스포츠 마케팅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3s로 대변되는 문화정책은 그래도 귀엽게 보아 줄만 하다. 아마추어리즘이 베여있는 자본에는 인간미가 조금이라도 드러나 있는 듯 싶다. 참여와 놀이가 섞여있어, 그 나마 자라는 청소년에게 아련한 추억을 살찌울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던 그이가 요즘은 무척이나 변한 듯 싶다. 그 은밀함은 우리 뇌를 훤하게 들여다보듯 무의식에 차곡차곡 욕망덩어리를 아무도 모르게 주사놓는다.  '나는 다 이길 수 있는 이성'이라구 주장이 가능한가?

2.



어린 아이들은 똑같은 광고, 회수의 반복에 그대로 노출된 실험아이이다. 마음에 들어온 광고는 기어코 엄마아빠의 호주머니를 비우게 만든다. 마음으로 들어간 광고는 소유와 함께, 맘먹던 재미와 달리, 현실의 소유감은 별로다. 그리 오래가지고 놀지도 못한다. 맘 먹던 재미와 현실의 괴리, 그 차연 - 겉재미에 농락당한 아이는 아닐까?

돈 냄새가 승천하는 시대이다. 간결 명료한 광고의 미학은 너무도 쉽게 주부들의 맘 속에 자리잡는다. 똑같이 제조되는 무의식과 구전효과는 가히 놀랄만 하지는 않는가? 어느집 어디를 가나 색깔까지 똑같은 소유물들. 김치냉장고 들--- 놀이가 끝나 방치된 김치독에 김치는 잘 담아져 있는가? 아이들 장난감같지는 않은가?

의식보다 무의식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 어떤 연구자들은 95%까지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면에서 네모난 화면을 가진 매체는 자본주의를 굴리는 쌍두마차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그토록 공부잘하길 바라는 부모들, 아이들은 매체를 끼고 산다.  그 속엔 '공부'란 재미는 원래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3.

화장 하나, 시선 하나, 장신구 하나하나  그 경기에 매혹되어 마음을 주자마자 그 로고와 소유욕이 우리의 무의식에 둥지를 튼다. 나는 자신있다구. 이것은 자신의 있구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내면화되자마자 살아있는 지식은 나를 움직인다. 유사한 상황이 되면 더욱 명확하게 움직인다. 어디서 본 듯한, 친밀감이 손내민다.

그런 면에서 우리 언론매체는 저질이다. 돈 냄새 풀풀 풍겨가며 쥐어짜내는 꼴이란 차마 돈을 벌려고 질질 울며짜는 것 같아 안스러울 정도이다.

4.



우리는 어쩌면 재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재미와 속재미의 구분이 없어져, 겉재미만 재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 정말 그런 것이 있느냐는 반문을 받을 만하다. 보는 것만으로 축구의 참맛을 알 수 없다. 어릴 때 가진 감흥은 흑백화면에 중계되는 축구가 매개가 되었겠지만, 열정에 넘치는 아저씨 아주머니, 운집한 마을 사람들의 열띤 분위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열세임에도 호흡을 맞추고, 뛰고 땀흘리고 노력하는 모습들, 정오의 낮에 태양과 같이 떠있는 축구공의 기억과 재미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축구 경기장보다 축구에 참여하는 내 재미가 현실적이고 아쉬움의 여운도 없다. 그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는 시간은 언제든지 있다.

5.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소유물을 갖고 있고 작은 아파트에 몰려사는 우리에겐 아마 있는 것 같다.  청계천으로도 외화하고 황우석으로도 외화하고, 월드컵으로도 외화하는 적정한 시점, 적정한 때에 현실화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있는 듯하다.

 


6.




어떻게 분열하고, 떨어져나갈 수 있을까? 자본의 무의식포위망에 우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잇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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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1987년 6월 민주 항쟁

1987년 6월 민주 항쟁


2.12 총선, 선거혁명을 이루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를 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은 '정의 사회 구현'과 '의식 개혁', '선진 조국 창조'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실제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려고 경찰 등 폭압 기구를 강화하여 정권 유지의 방패막이로 삼고,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 채 흔드는 폭력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관계법, 국가 보안법 등을 개악하여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더욱 강력히 탄압하였다. 전 정권은 1980년 말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 기본법을 만들어 언론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이런 속에서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의 결과는 국민들의 5공 정권에 대한 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것이었다.
  1984년 11월 30일 3차 해금으로 풀려난 구신민당 출신 전직 의원들은 1985년 1월 18일 김대중·김영삼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의 창당 대회를 서울 앰베서더 호텔에서 가졌다. 대의원 523명이 참가한 창당 대회는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로 뽑고, 김녹영, 이기택, 조영하, 김수한, 노승환 등 5명을 부총재로 선출하였다. 이 날의 신민당 창당은 2월 12일로 예정된 제 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신민당 창당을 계기로 민주 세력의 결집은 날로 가속화되었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이 같은 '신당바람'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이는 선거일 4일 전인 2월 8일 미국 망명 2년여 만에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정부 여당(민정당)은 김대중의 귀국을 거부하면서, 그가 귀국하면 투옥시키켔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신변 안전을 이유로 귀국을 만류하기도 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귀국을 강행했다. 국내에서는 김영삼이 죽음을 각오한 23일간의 단식으로 흩어진 야권을 결속했고, 국외에서는 김대중의 죽음을 각오한 귀국으로 민주화 세력을 결집, 전두환 정권과의 일전 불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선거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선거 결과 지역구 총 의석수 184석 중 신민당은 92개 지구당에서 50명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이 87석을, 그리고 종래의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은 26석에 불과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 신민당은 17석을 합쳐 67석, 민한당은 9석을 합쳐 35석이 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민한당을 물리치고 창당한지 불과 25일만에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신당 돌풍'을 일으킨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체제 내에 안주해 온 제도권 정당에 대한 국민의 회의와 반발이 깊어진데다 야당다운 야당이 있어야겠다는 국민 의식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신민당은 김대중·김영삼의 권유에 따라 민한당의 인사들이 대거 입당함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야권 통합을 이룩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런 힘을 배경으로 국회가 열리자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민주화 운동 세력도 군사 독재 정권 타도와 이를 위한 직선제 개헌을 적극 주장하였다. 집권세력은 개헌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물리적 힘으로 탄압하면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행위로 매도하였다.

권인숙과 박종철

 권인숙은 대학 출신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비합법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이다. 그녀가 1986년  6월 부천 경찰서에서 추악한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 권인숙 의 진솔하고 도도한, 그리고 당당한 눈물의 법정 발언은 독재 정권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이번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박종철은 반정부운동을 하던 친구의 행방을 대라는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요구에 불응하며 끔찍한 고문을 견디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87.1.14) 다음 날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죽은 까닭을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 같이 있던 치안 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러졌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위 발표는 시민적 공분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어느 시민은 " 박군 관계 신문 기사를 보면서 부부가 함께 울어버렸던 우리들의 아픔을 당신들은 정녕 아는가?"라는 글을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80년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제 5공화국을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억눌린 감정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관련자 처벌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4.13 호헌 조치 그리고  6월....

이런 상황 속에서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의 여망이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4.13 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하였다. 4.13 호헌 조치 뒤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 대중의 결의는 더욱더 강해졌다. 각계 각층에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을 내고,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 대회를 6월 10일 대규모로 벌이기로 결정했다.  6월 10일 그날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한다.

.. 2.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3.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연행을 거부한다. 연행되면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
 4. 전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항의한다....
 7. 또 한번 부탁하거니와 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이런 움직임에 당황한 정부는 6월 10일 며칠 전부터 6.10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봉쇄 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았다. 이에 따라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인쇄소 등에 대한 경찰의 경계와 수색도 심해졌다. 또한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을 발령하는 한편 버스·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고 교대시간도 바꾸도록 종용하였다.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대회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전격 수색하여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드디어 6월 10일이 밝았다.
오전 11시 15분 서울시 송파구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2 30분 채문식 전당대회 의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한 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와 손을 잡고 연단 앞쪽으로 걸어나가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은 신군부 내의 권력 승계를 위한 한판의 축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체육관 밖에서는 또 하나의 '축제' 가 진행되고 있었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서울시청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의 숫자가 12:00로 변하는 순간 도로 건너편 성공회 대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탑 꼭대기에 잿빛 가사를 걸치 스님(지선스님)과 연한 보라색 블라우스에 쉬어링 치마를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소설가 유시춘)이 나타났다.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를 대표하여 종탑에 올라간 그들은 그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될 6.10국민대회의 성공을 예감했다.

 드디어 6시 약속된 시간이 되자 거대한 함성이 도심을 울렸다.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먼저 나서고 시민들이 속속 동참하기 시작했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인 9일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로 인해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규모가 커지면서 급속히 전개되어갔다. 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시위대와 경찰은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거리는 마치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 같았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공주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 시위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시청 한 곳, 파출소 열 다섯 곳, 민정당 지구당사 두 곳 등이 파손되었다. 경찰은 그날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8백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6월 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그 희망의 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성금은 물론 빵, 음료수, 의약품 등을 전달하였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회사원들은 그 자리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도 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옷을 보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 지지편지>
⊙ 민주발전을 위해 써 주십시오. 고등학생이라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요. 지갑을 털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하는 데서 항상 여러분에게 못 미쳤던 평범한 샐러리맨 69명과 식당 주인 아저씨로부터
⊙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몸은 함께 하지 못하나 마음만은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당신과 같이 피를 흘리지 못하나 눈물만은 함께 흘립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 장한 일 하십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시민 일동
⊙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애국적인 투쟁에 따른 희생을 모르는 척 하고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자꾸 치밀어 올라와 어느 모퉁이에서 간절히 동참하고 있는 마음 약한 40대 중반의 못난 선배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부탁이 있소. 폭력은 금물이오.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또 법의 가면을 쓴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정부당국의 발표를 보면 80년 5.17때의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하오. 이번만은 절대로 그러한 우를 범해서 반역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맙시다.  말없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애국적인 학생들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부디 건강을 비오.

  이렇게 명동 성당에서의 농성 투쟁이 6월 민주화 운동의 불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한데 이어서 군대 동원의 가능성에 대한 정부의 경고에도 굽히지 않고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이라는 조직된 시위를 주도하여 1백만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런 국민들의 거대한 힘에 놀란 정권은 '직선제 개헌' 및 광범한 민주화 조치 등을 보장하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선언')을 내놓게 된다. 우리 국민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였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 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29선언 중)



6월 시민항쟁 그 후....

6월 항쟁의 거친 파도 속에서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시민과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 직선제에 동의함으로써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6.29선언은 여당이 국민의 지지를 못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히 모험적인 조치였다. 노 대표가 발표한 8개항에는 김대중의 사면복권, 언론 자유, 대학 자율권 지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노 대표의 핵심 측근에 따르면 광주사태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 했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 순간에 철회했다. 노대표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건의 형식으로 6월 29일 이 제안을 전격 발표했다. 그는 "만에 하나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대표 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비장한 어조로 밝힌 후 국립 묘지를 참배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틀 후 노대표의 계획을 지지했다.
 6.29 선언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노 대표가 대담한 조치를 취함에 따라 전대통령도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노대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전대통령은 그런 소문에 전혀 반박하지 않았으며 노 대표의 결단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4년뒤 6.29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고, 노대통령은 처음에는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연출'을 맡게 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9선언은 1987년 6월의 위기를 종식시켰고, 한국의 정치개혁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6.29선언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한 후 치러진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이래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 선거였다.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를 이끌어낸 역할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軍 배경 때문에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군사 정권에 몸 담은 전력은 그만큼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태우 후보는 1932년 12월 대구 부근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한국 전쟁 초기 단기간 사병으로 복무한 뒤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첫 번째 4년제 정규코스인 11기로 입학했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당시 9사단장이었던 그는 전방에서 병력을 빼내 서울로 이동시킴으로써 이 거사의 핵심적인 지원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수경사 사령관, 보안사 사령관 등을 지냈다.

 노태우 후보에 맞설 야당 정치인으로 양金(김영삼, 김대중)이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모색했다. 그러나 곧이어 김대중씨는 자신의 본거지인 광주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대통령 후보처럼 전국 유세를 시작했다. 김영삼씨도 자신의 본거지인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같은 행동을 취했다. 양金은 오랜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왔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각각 자신이 야당 단일 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양金은 그들의 단일후보 약속을 뒤로하고 둘 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김영삼 후보는1928년 12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어장 사업으로 성공한 부친은 그를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와 서울대로 유학을 보냈다. 25세 때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당선 기록을 세운바 있다. 곧이어 그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에 항거해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평생동안 민주주의 옹호에 나서게 된다. 1960년 북한 공비에 의해 그의 모친이 총살되는 비극 때문에 북한에 대해 확고한 입당을 견지했으며 야당 정치인 탄압에 자주 이용되는 색깔론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기득권 층이라는 사실 때문에 중·상류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198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 3명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정치인에 가까웠다. 야당 지도자로서 김영삼은 오랜 세월 동안 굴복하지 않고 투쟁해왔다. 박 대통령 시절 그는 군부통치에 반대해 투옥됐으며 1969년에는  3선개헌 추진에 반대하다가 황산 투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영삼은 공개석상에서 박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영삼 후보는 민주개혁을 주장하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1924년 1월 전라남도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오랜 라이벌인 김영삼과 달리 유복한 가정 출신이 아닌 그는 한국 엘리트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1971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지명전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승리한 김대중은 여당 측의 극심한 선거부정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에 맞서 46%를 득표함으로써 최고 정치 지도자 대열에 뛰어 올랐다. 박대통령은 그를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박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하려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후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나중에는 또 선동죄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박대통령이 시해된 후 들어선 전대통령도 탄압을 계속했다. 전대통령은 김대중을 체포해 날조된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결국에는 레이건 미 행정부와 가진 협상으로 그를 석방해 미국 망명에 오르게 했다. 1985년 자진 귀국한 뒤 또다시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리고 1987년 6.29선언으로 모든 혐의를 벗고 정치적으로 사면 복권됐다. 대선 전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한다는 군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에 따라 김대중이 당선되더라도 군부 지도자들이 그의 취임을 용납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으며 군부가 김대중을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36%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28%)과 김대중(27%)은 각각 야당 표를 양분했다. 노태우 후보는 치열하게 전개된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에게 결여됐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에 따라 노대통령은 임기 동안 전임자인 전대통령에 비해 언론자유를 확대하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줄일 수 있었다.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또 한국이 강경 반공노선을 완화하고 동유럽 공산국가, 소련, 중국 등과 관계를 발전시켜 결국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소위 '북방외교')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동북 아시아의 전략적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출처 :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http://educate.jinj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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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마지막 수업'... "뿌리를 알고 희망을 찾아야"

- 나무가 나무에게 전하는, 숲으로부터의 엽서 같은 고별강의
  유다연(kae0327) 기자   
▲ 신 교수의 고별강연. 나무 숲 바람이라고 쓰인 칠판이 눈에 띈다.
ⓒ 유다연
valign=top [다시보기] 신영복 교수, 대학강단의 마지막 강의 / 오마이TV


신영복(65)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가 정년을 맞아 8일 고별 수업을 가졌다.

'신영복과 함께 읽기'라는 이름의 강좌는 매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세 시간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이날 수업은 고별 수업의 하나로 오전 9시부터 50분간은 정규수업, 오전 10시부터 50분간은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공개강좌로 진행됐다.

신 교수의 고별 수업인 만큼 이날 강의에는 각종 언론매체의 취재진을 비롯해 학생들은 물론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교수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또 신 교수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신 교수의 한 지인은 "신 교수가 전주교도소에 있었을 당시 함께 있었다"며 신 교수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신 교수와의 첫 대면에서 "10개월 징역으로 들어왔노라" 말을 했더니 신 교수가 "10개월이면 내가 감옥에서 소변보는 시간도 안된다"고 화답했다는 이야기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 고별강연 중인 신영복 교수
ⓒ 유다연
이날 '마지막 수업'의 첫 주제는 '죽순의 시작'이었다. 강의의 화두는 죽순과도 같은 짧은 '마디'를 만들어야 나중에 큰 키를 키우게 된다는 것. 마디는 '뿌리'로부터 오며 그러한 뿌리들이 모여 큰 '숲'을 이루는 것이라 했다. 즉 우리사회의 역량, 잠재적 가능성을 꾸준히 키워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에 한 학생이 "그럼 선생님의 뿌리는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신 교수는 "나의 뿌리는 유년기를 통틀어 만났던 많은 사람들, 세월들이며, 나아가서 우리사회의 뿌리는 과거"라 답했다. 덧붙여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고 말하면서 신 교수는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별수업의 마지막 주제는 '희망의 언어-다시 되새겨 보는 석과불식(碩菓不食)'이었다.

신 교수는 "단 하나 남은 과실 '석과'는 사라지는 법이 없다"며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읽어내는 독법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앞 강의와 연관지어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문제는 '나무가 숲이 되는 방법'"이라며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from Head to Heart)'이고, 인간적인 애정 속에서 진정한 담론과 사상이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신 교수는 "절망의 상황을 희망으로 만들어야 할 과제를 안은 현 시대의 한복판에서 여러 선생들, 학생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면서 강연을 끝마쳤다.

ⓒ 유다연
▲ 강의 후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신영복 교수.
ⓒ 유다연


어깨동무체 글자를 볼때마다 생각이 나겠지요
마지막 수업 함께한 제자들의 편지

지난 한 학기동안 '신영복과 함께읽기'를 수강했던 제자들은 고별 강연이 끝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러나 아쉬움 가득한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다. '신영복과 함께 읽었던'학생들이 떠나는 신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 '신영복과 함께읽기'수업 교재
ⓒ 유다연
졸업 전에 기필코 선생님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각오로 수강신청에 성공했던 날의 그 소소한 기쁨이 기억납니다. 어느덧 한 학기가 흘러 오늘 이렇게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듣게 됩니다. 지나간 당신의 세월을 어찌 알고 또 가늠하겠냐마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함께 한 학생이라는 것이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표면적인 것만 보던 저희 학생들의 단순한 시선에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우선이다 따뜻하게 관조해라 그리고 현상의 구조를 들여다 보라시던 말씀들... 앞으로 선생님의 글들을 읽을 때 마다, 어깨동무체를 발견할 때 마다, 소주를 들이킬 때 마다 선생님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면 제 마음에 잔잔한 호수가 밀려올테지요.
- 신방 02 유다연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함께 읽는 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학교를 떠나신다니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평생 마음 속에 남아 그 파장이 영원할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리며 부디 건강하세요.
- 신방 02 조미숙

▲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이유나(왼쪽)와 조미숙 학우
ⓒ 유다연
저에겐 참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듣는 설레임의 시간,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들을 듣는 즐거움의 시간 그리고 나의 내면을 바라보고 반성하는 가슴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강의실에서 직접 말씀을 듣는 건 마지막이지만, 전 마지막 강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많은 이야기를 늘 기억하고 행하도록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지표를 보여주신 선생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신방 02 이유나

선생님, '아픔을 나누는 삶'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낯익은 길보다 다소 따갑고 낯선 길을 걸어가며 '사랑'을 알고 배우는 시간을 주심에 대해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계속될 것입니다.
-신방 01 김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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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6-1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온 몸의 온기가 몽땅 사라질 때까지 그러하리라고 - 실망과 희망이 교차하리라고 이야기한다면 아픈 님에게 너무 가혹한 위로일까요? '존경한다'는 것,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인가봐요. 심장에 온기가 남았으니 당연히...

아뭏튼 님의 글을 보면 전 왜 항상 스스로가 부끄럽죠? ....
음, 역시 '부끄럽다'는 표현이 적당해요.